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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54화 (54/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54화

“하지만 지금처럼 아셀이 빠질 걸 대비해서 대책을 마련해 두지는 않은 거야? 대리인이라던가.”

“그것까진 모르겠어.”

하긴, 학생회가 아닌 한나가 세세한 부분까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문득 능력이 뛰어난 탓에 모든 일을 다 떠맡게 된 아셀의 처지에 연민의 감정이 들었다.

“그런데 유디트.”

“응?”

유디트가 혼자서 곰곰이 생각에 빠진 동안, 한나는 어딘가 진중한 표정을 한 채 유디트를 보고 있었다. 유디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나는 답지 않게 조금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떼었다.

“나 뭐 하나 더 물어봐도 돼?”

“……?”

의아한 유디트를 향해 한나가 곧이어 말했다.

“유디트, 너는…… 역시 체이스를 사랑하는 거지?”

“…….”

오늘따라 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많은 거지?

유디트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다 곧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아니.”

“……뭐? 하지만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그게 체이스가 아니면 누군데?”

“지난번에도 난 분명히 아니라고 했잖아. 그리고 갑자기 또 그건 왜 묻는 거야?”

그러자 한나가 드물게 비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해 왔다.

유디트가 곤란한 기색을 보이면 질문을 속으로 삼키던 평소와 달랐다. 그 모습에 유디트가 긴장하고 있는 사이, 한나가 곧 입을 열었다.

“……그게, 비밀을 공유하면 더 친한 사이가 된다고 하잖아.”

“그래서 물어보는 거였어?”

“응.”

유디트는 터져 나올 뻔한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대답해 주었다.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 이게 사랑인지 아닌지.”

이번에도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한나에게, 사실은 약혼자도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고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만약 이런 제 마음을 안다면 한나는 자신을 경멸할 것이 분명했기에.

유디트는 분명 사랑하고 있다. 이보다 더 헷갈릴 여지도 없을 만큼 명확하게.

하지만 그 대상이 체이스가 아닐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셀을 향한 자신의 감정이 변해 가기 시작했다.

원래 아셀을 떠올릴 때면 항상 가슴께가 간지러운 설렘과,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솜사탕 같은 감정을 맛보곤 했다.

분명 그랬던 것 같은데, 어느 샌가부터 벅차올랐던 감정들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아셀에게서 느껴지는 건 마음을 아릿하게 만드는 괴로움, 그것이 전부였다.

물론 그렇게 괴로워하면서도, 왜 자꾸 아셀을 떠올리고 있는 건지는 모를 노릇이었지만…….

한나는 유디트가 상념에 붙잡힐 틈도 주지 않고 또 물어 왔다.

“그럼, 만약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면 말이야. 싹수없고 너를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보단 예의가 바르고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때?”

“그게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아주 만약, 누군가를 사랑할지 선택할 수 있다면 말이야.”

만약 사랑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지금 같은 고통은 겪지 않았을 텐데.

질문을 들은 유디트가 망설이지 않고 대답을 내놓았다.

“둘 다 선택하고 싶지 않아.”

“뭐어? 둘 다 별로야? 그럼 네 취향은 뭔데?”

유디트는 잠시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곧 메마른 입술 사이로 흘리듯 숨이 뿜어져 나왔다.

“-나에게 다정하지 않은 사람.”

“뭐야, 너 체이스 안 좋아한다면서?”

“응.”

한나는 곧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멀뚱히 유디트를 쳐다보았다.

유디트 역시 오늘따라 한나가 유독 알쏭달쏭한 소리를 많이 한다고 생각하며, 그 시선을 태연하게 마주했다.

* * *

카렐 교수는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렸다.

팔짱을 끼고, 의자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앉은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상당히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자세였다.

그는 점심시간에 점성술 교수와 나눴던 대화를 가만히 되짚어 보고 있었다.

원래 그 교수와는 그다지 친분이 있진 않았지만, 그가 교수들 중에서 수습 교수들을 가장 많이 거느리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먼저 말을 건네 본 것이다.

‘크흠, 물어볼 게 있는데.’

‘으응?’

점성술 교수는 카렐 교수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 자체에 뛸 듯이 놀랐다. 그 모습에 카렐 교수는 왠지 민망하여 턱을 긁적였다.

‘별건 아니고, 수습 교수에 관한 질문인데.’

‘아하, 그렇지. 자네, 소문에 따르면 수습 교수를 새로 들였다면서? 이름이 유디트라고 했던가?’

점성술 교수는 붙임성이 매우 좋은 사람이었다.

서로 평소 대화라곤 한마디도 해 보지 않았지만, 그는 마치 카렐 교수가 오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살갑게 말을 붙였다.

‘그 학생 유명하지. 내 수업을 듣는 건 아니지만, 평민인데도 학년 수석을 할 만큼 명석하고 수업을 듣는 태도가 올곧다고 귀에 박히도록 칭찬을 들었어.’

그간 점성술 교수는 별로 사교적이지 못한 카렐 교수에게 지나칠 정도로 살가웠고, 그래서 오히려 거부감이 들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유디트의 칭찬이 점성술 교수의 입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그런 껄끄러움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싹 사라졌다.

저 교수, 뭔가를 좀 아는 사람이로군?

카렐 교수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크흠, 유디트가 좀 그렇긴 하지. 하지만 아직 완전히 수습 교수로 들인 건 아니야.’

‘뭐어, 아직 그 제안을 거부하고 있단 말인가?’

점성술 교수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카렐 교수는 유디트를 편들 듯 말했다.

‘유디트는 신중하고 진중한 성격이거든.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유형이기 때문에 시간이 좀 필요할 뿐이네.’

‘그런가? 거참, 그렇게 조심스러운 성격이라니. 들으면 들을수록 회계학 수습 교수로 딱 알맞다는 생각이 드는구먼.’

‘그렇지!’

카렐 교수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겼다.

동시에 점성술 교수는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가가 내려졌다.

아카데미 교직 생활을 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처음으로 동료에게 내린 후한 점수였다.

점성술 교수는 카렐 교수의 격한 반응에 잠시 놀란 듯 보였지만, 이내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허허허. 참, 어쨌든 물어볼 게 있다고 했지. 뭔가? 내가 아는 거라면 뭐든 대답해 줄 테니.’

‘아, 그게- 보통 수습 교수의 책상에는 뭐를 놔두곤 하나?’

‘아, 자네가 직접 준비해 주려고?’

점성술 교수가 눈을 깜박이며 되물었다.

보통은 교수가 준비해 주는 게 아닌가?

카렐 교수가 속으로 의문을 품고 있자, 점성술 교수는 이내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10년 전 내가 새록새록 떠오르는구먼. 내가 첫 번째 수습 교수를 들였을 때 딱 자네 같았지. 뭐든지 해 주고 싶었어.’

곧이어 신이 난 점성술 교수가 이런저런 물건 리스트들을 추천해 주었다.

그리하여 주의 깊게 그 말을 경청하다 온 카렐 교수는 이 같은 상황에 처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뭐가 더 나은 거지?”

카렐 교수는 지금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유디트의 책상에 놓을 책꽂이의 색상에 대해서.

책상에 오랜 시간 붙어 있으려면 그만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그는 지금 두 가지의 색상 중 무엇을 고를지 망설이고 있었다.

검은색으로 하자니 무난하지만 칙칙할 것 같기도 했고, 그렇다고 흰색으로 하자니 금방 때가 탈 것 같기도 했다.

카렐 교수의 눈썹이 한차례 꿈틀거렸다. 그는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뭐가…….”

카렐 교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유디트에게 대놓고 물어보는 건 어떨지 잠깐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잠시지만 그런 나약한 생각을 하고 말다니. 무릇 선물이란 건 비밀 유지가 제일 중요한 법.

고민스럽다고 해서 유디트에게 절대 사실대로 밝힐 수는 없었다.

카렐 교수는 개인 맞춤용 의자에 앉으며 깜짝 놀란 토끼 눈을 했던 유디트를 상기했다. 황금색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렸던 유디트를.

그때 유디트는 선물에 대해서 따로 감사를 표하진 않았지만, 분명 말도 나오지 않을 만큼 기뻤던 게 틀림없었다.

오랜 시간 앉아 있을 것까지 예상해 기막힌 선물을 주었으니 분명 마음 깊이 감동하였을 것이다.

물론 그런 것 치곤 수습 교수 제안에 아직 넘어오진 않긴 했다. 그러니 이번 선물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었다.

해가 동쪽에 걸려 있던 오전부터 하늘이 주홍빛으로 변해 버린 오후까지.

카렐 교수의 치열한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하얀색과 검은색. 두 가지의 상반된 색깔이 팽팽하게 맞서 싸우며 자기주장을 해 대던 와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카렐 교수의 연구실 문을 두드려 왔다.

똑똑똑.

문을 열자 곧장 점성술 교수가 보였다. 무슨 일인가? 하고 묻기도 전에 점성술 교수는 심각한 얼굴로 그의 연구실에 발을 들였다.

그리곤 비밀을 전하듯 목소리를 낮추곤 속삭였다.

“그거 들었나?”

“뭐를?”

“자네가 수습 교수로 점찍어 뒀다는 그 학생과 관련된 일일세.”

……혹시 유디트에게 무슨 사고라도 난 건가?

사실 최근 파티 홀에서 돌연 샹들리에가 떨어져 학생회장이 다쳤다는 소식을 접하기는 했다.

혹시 유디트도 거기에 함께 휘말리기라도 한 것일까……?

그걸 상기한 카렐 교수의 낯빛이 순식간에 회색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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