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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55화 (55/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55화

그때 점성술 교수가 카렐 교수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아직도 그 소문을 못 들었나! 자네 참 소문에 느리구먼!”

“대체 뭐길래 그러나?”

“글쎄 유디트가, 그동안 연금술 실험실에서 몰래 벌 청소를 해 왔다는 소문이 아카데미에 파다하네.”

“벌 청소?”

카렐 교수는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유디트는 애초에 벌을 받을 만큼 잘못을 저지를 학생이…… 아.”

그러고 보니 지난 고급 회계학 시간이 끝나고 유디트와 잠깐 대화를 나눴을 때, 그녀에게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혹시 체이스는 어디서 벌 청소를 하나요?’

설마, 그래서 물어본 거였나? 그 고얀 자식을 도와주려고?

“뭔가 짐작이 가는 구석이 있는가?”

“있긴 하지.”

체이스 카르단디.

그 시건방지기 짝이 없고 재수 없는 놈이 결국 유디트가 벌 청소까지 하게 만들다니.

정말 도움이라고는 쥐뿔도 되지 않는 녀석이었다. 카렐 교수가 이를 악물었다.

“듣기로는 유디트가 자신의 약혼자의 벌 청소를 도왔다고 하던데 말이야.”

“……소문이 그렇게 자세하게 났나?”

“내가 데리고 있는 수습 교수들이 좀 많아야지. 그들이 소곤대는 것만 듣더라도 금세 파악할 수 있다네.”

점성술 교수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내뱉었다.

“아카데미 소식이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가 빠삭하게 꿰고 있어.”

“…….”

카렐 교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대체 교수인 자네가 그런 걸 알아서 뭣 하나?

카렐 교수는 점성술 교수를 조금도 이해할 순 없었지만, 구태여 입씨름할 기분도 아니었기에 그냥 넘어갔다.

“어쨌든, 유디트는 약혼자를 꽤 좋아하는 모양이야? 벌 청소까지 같이해 줄 정도면.”

“흥, 유디트가 그런 졸업도 간당간당한 놈팡이를 좋아할 리가.”

“좋아하지 않는데 벌 청소는 뭣 하러 해 주나?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으니까 해 줬던 거겠지.”

그 말에 카렐 교수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감히 반박하진 못했다.

카렐 교수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그런 그를 향해 점성술 교수는 은밀하게 속닥거렸다.

“심지어 그 연금술 실험실이네. 들어가기만 해도 뿌연 먼지가 눈 앞을 가리고, 목구멍이 간질거리는 그 기분 나쁜 곳.”

카렐 교수도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연금술 교수는 원래 정리 정돈을 꺼리는 희한한 성정의 교수였다.

본인만의 정리법이 있다며 늘 주장하긴 했지만, 정작 그가 머물다 간 곳은 금세 쓰레기장이 될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연금술 실험실도 늘 엉망진창이었다.

벌 청소 기피 장소 1위.

어쨌든 그런 곳까지 가서 체이스를 도와주다니.

카렐 교수의 잿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불현듯 머릿속에 어떤 끔찍한 가정이 스쳤다.

설마 진짜 유디트가 체이스를?

그러던 와중 점성술 교수가 태평한 어조로 말했다.

“하여튼 둘 사이가 이렇게 좋은데, 만약 결혼을 하면 유디트가 수습 교수 일을 할 수 있겠나?”

“겨, 겨, 결혼?!”

깜짝 놀라 고함을 지르는 카렐 교수 때문에 점성술 교수가 더 놀라고 말았다.

“아이고 깜짝이야. 이 사람아, 갑자기 소리는 왜 지르고 그러나? 간 떨어질 뻔했지 않나.”

하지만 카렐 교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주먹을 꾹 쥐었을 뿐이다.

“좋을 때야, 좋을 때.”

“좋긴 무슨? 누가 봐도 유디트가 아까운 상황인데.”

카렐 교수는 자신의 눈에 흙이 들어가도 유디트와 체이스의 결혼은 결사반대였다.

그는 체이스와 일전에 했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 유디트를 사랑하는 것이냐 물었을 때, 그 건방진 놈은 분명 아니라고 했었다. 왜 그런 이상한 오해를 하냐며 극구 부인하기까지 했다.

“하.”

카렐 교수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런 녀석이 유디트가 벌 청소를 같이해 준다고 한 건 거절을 안 해?

카렐 교수의 머릿속에 건방진 체이스의 얼굴이 두둥실 나타났다.

‘유디트가 곁에 있으면 귀찮은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아서 편하니까. 약혼을 깨고 다시 약혼녀를 찾는 건 귀찮은 일이니까 웬만해선 약혼을 깨고 싶지 않습니다.’

체이스, 그 고약한 놈의 머릿속에는 온통 유디트를 이용해 먹을 생각만으로 가득한 게 틀림없었다.

아득. 카렐 교수의 턱에서 마치 뼈가 어긋나는 듯한 엄청난 소리가 났다.

점성술 교수는 깜짝 놀라 카렐 교수의 어깨를 흔들었다.

“자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길래 턱이 부서져라 이를 악무는 겐가?”

“아무것도 아닐세.”

점성술 교수는 카렐 교수의 살벌한 분위기에 감히 뭔가를 더 묻지 못하였다.

그 사이에도 카렐 교수는 여전히 체이스와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만약 유디트가 진심으로 교수직을 하고 싶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거냐?’

‘만약 그렇다면 군말 없이 물러날 겁니다. 하지만 어차피 지금 유디트는 수습 교수를 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니까요.’

건방지기가 하늘을 찌르는 새파란 놈. 만약 그 약속대로 유디트가 수습 교수가 되지 않는다면 이대로 체이스와 약혼하게 될 터였다.

그건 절대 안 된다.

체이스와의 약혼을 필사적으로 방해하고, 유디트를 기필코 수습 교수로 들여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는 셈이었다.

이에 카렐 교수는 둘의 사이가 어떤지 직접 감시할 요량으로, 언제 한번 보충반 수업을 참관해 봐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 * *

언제나 북적거리던 아카데미가 한산해졌다. 수업이 없는 주말이면 여유가 되는 학생들은 본가에 다녀오곤 했다.

벌써 청명한 여름의 하늘은 아득하게 높아졌고, 태양이 정중앙을 밝게 장식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진입로에는 저마다 다른 문양을 가지고 있는 마차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사치스러운 마차들은 제각각 가문들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체이스는 그 마차들 사이에서 카르단디 가문의 문양을 찾아냈다. 꽤 오랜만에 타는 가문의 마차였지만 별다른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저택에 방문하는 게 그리 내키진 않았다. 그러나 곧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찾아온다.

그러면 아카데미 교복도 동복으로 바뀌게 될 테니 그걸 가져오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저택에 방문해야만 했다.

체이스는 턱을 괴고 커다란 창을 통해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깊은 생각에 잠겼다.

신은 종종 인간에게 선물을 하사하곤 한다. 그러나 모든 이에게 그 선물이 긍정적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적어도 체이스에게는 신의 선물이 축복이 아닌 불행으로 작용했다.

체이스는 그날의 기억을 선명히 기억한다. 자신이 검을 잡는 순간, 한순간에 호의가 사라지고 경계로 물들던 형의 붉은 눈동자를.

그날은 가문의 일원에게만 전수되는 검술을 처음으로 익히던 날이었다.

체이스가 한 번 본 검술을 완벽하게 구사하자 아버지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쓸모없다고 여겼던 것에서 나름의 쓸모를 감지해 낸 눈빛이었다.

형의 입술에서는 탄식이 비집고 나왔다.

‘축하한다, 체이스. 재능이 있는 모양이구나.’

형은 체이스에게 상냥히 말을 건넸지만, 눈빛만은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그때부터 체이스는 형에게 ‘불쌍하고 어린 것’에서 ‘제 자리를 위협할지도 모르는 존재’가 되었다.

위협은 싹부터 잘라내야 한다.

그걸 체이스의 형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잔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체이스를 완전히 잘라 내지도, 완전히 보듬어 주지도 못한 채 어중간한 상태를 유지했다.

차라리 너를 온전히 미워할 수 있었더라면.

형은 입버릇처럼 원망을 내뱉었다.

“도착했습니다.”

아침에 아카데미에서 출발했던 마차는 한참을 달려 어두운 밤이 돼서야 목적지인 카르단디 저택에 도착했다.

체이스는 마차에서 내렸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기 전, 저택을 감싸고 있는 높고 거대한 성벽을 바라보았다.

저택의 역사와 전통이 유구한 만큼 성벽 또한 지어진 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조금의 허물어짐 없이 견고했다.

문득 성벽이 마치 울타리 같다고 생각했다. 다른 곳과의 경계를 짓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는.

그렇다면 자신은 저 성벽의 경계선 안에 포함된 사람일까? 아니면 침입자에 불과한 사람일까.

짧은 상념에 잠겼던 체이스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실낱같은 바람에 현실로 돌아왔다.

성벽에서 외면하듯 눈을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에는 이미 무수한 별들이 그 위를 수놓듯 알알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카데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항상 환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마주한 별이었다. 아름다웠다.

그래서인지 체이스는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사실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시킨 것뿐이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기 싫은 것이 아니라 그저 빛나는 별에 시선을 빼앗겼을 뿐이라고.

“체이스.”

그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체이스가 곧장 뒤를 돌았다.

그러자 얇은 숄을 두른 채 자신을 마중 나온 어머니가 보였다. 짜임새가 헐거운 숄은 틈새로 바람이 숭숭 통할 것만 같았다.

그걸 본 체이스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어머니에게 성큼 다가가 한 팔에 잡히는 가녀린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머니.”

카르단디 저택은 고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여름이라고는 해도 밤이 되면 살갗에 닿는 공기가 꽤 쌀쌀했다.

체이스는 저도 모르게 툴툴댔다.

“밤공기가 차가운데 왜 나와 계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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