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56화
“막상 너는 나보다 더 얇게 입었으면서 잔소리하니?”
어머니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체이스는 재킷도 걸치지 않은 교복 차림이었다, 위에 걸친 것이라곤 하얀 셔츠가 전부인.
그러자 체이스가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전 이 정도 날씨에는 끄떡없다고요. 어머니보다야 훨씬 튼튼하니 걱정 마세요.”
그러자 어머니는 소녀처럼 맑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성벽 안으로 이끌었다.
“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꾸나. 네게 궁금한 게 참 많아.”
그들은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내어 주신 유리 온실로 향했다.
도착한 온실 안에는 훈기가 감돌고 있었다. 마치 체이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티 테이블 위에는 차가 준비되어 있었고 말이다.
온도와 습도가 완벽히 통제된 온실.
지붕이 반원 형태인 온실은 한밤중이 된 바깥과는 달리 한낮처럼 채광이 내리쬐고 있었다.
오랜만에 저택에 방문하는 만큼 온실 또한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이곳만은 어렴풋한 기억 속과 동일했다.
그도 그럴 게 온실의 풍경은 사계절 내내 변함없었다. 노랗고 붉은 꽃들이 언제나 사시사철 피어 있었으며 늘 향기로웠다.
변함없는 아름다움.
마치 어머니의 이상향을 그대로 옮겨 담은 듯한 공간이었다.
“여전히 꽃을 좋아하시네요.”
“당연하지. 내 취향이 나이 먹는다고 변하겠니? 내 눈에는 값비싼 보석보다 이름 모를 들꽃이 더 예쁘게 보인단다.”
이에 체이스는 어머니가 앉을 의자를 미리 빼내 주며 자연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어머니가 가장 아름다우세요.”
어머니가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어머, 얘도 참. 입에 꿀이라도 바른 것 같구나.”
어머니는 손목 부분에 섬세한 레이스가 달린 장갑을 끼고 계셨다.
그 장갑은 체이스가 작년 어머니 생일 때 선물로 드린 것이었다. 그것도 무투 대회에서 받은 상금으로.
고심해서 고른 노력이 헛되진 않았나?
어머니가 웃을 때마다 장갑에 달린 레이스가 함께 웃듯 나풀거렸다.
체이스도 그 모습에 같이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 어머니가 돌연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름답지 않아. 이미 오래전에 생을 다해 시들었거든.”
곧 그녀의 자조 섞인 말에 체이스는 웃는 것도, 정색하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어머니는 꽃을 좋아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시들지 않은’ 꽃을.
체이스는 자신의 어머니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은발을 세련되게 틀어 올려 우아한 목덜미를 드러내고 있었다.
또 귀에는 그녀의 눈동자 색과 같은 새파란 사파이어가 반짝이고 있었다.
온실의 조명을 받아 보석이 더욱 눈부시게 빛났지만, 그 찬연함에도 그녀의 미모는 전혀 묻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체이스는 어렸을 때 보았던 어머니의 모습이나 지금 보이는 모습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온실의 사시사철 화려한 꽃들처럼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으니까.
하지만 어머니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홀로 저 멀리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곧 체이스의 눈길도 어머니가 응시하는 쪽을 향했다.
노란 나비가 꽃들 사이를 한가롭게 날갯짓하고 있었다. 훨훨 날아든 나비는 어떤 꽃 위에 사뿐히 앉았다.
어머니가 문득 입을 여셨다.
“나비가 왜 꽃을 떠나는 줄 아니?”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꽃잎 위에 앉아 있던 나비가 나풀대며 훨훨 떠나갔다. 너울거리는 날갯짓이 꼭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꽃과 나비에 문외한인 체이스는 어머니의 질문에 어찌 대답해야 할지 잘 몰랐다.
하지만 뭐라도 말해 보려고 입을 뗀 찰나, 어머니가 먼저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나비가 꽃을 떠나는 데에는 굳이 거창한 이유가 필요 없어. 그저 꽃이 자신의 효용을 다했으니까, 충분히 배를 채웠으니까. 단지 그뿐이란다.”
어머니의 새파란 눈에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고독이 서렸다. 체이스는 지금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일종의 비유임을 눈치챘다.
꽃이 어머니였고, 나비가 아버지인 모양이었다.
체이스는 얌전히 시선을 내리깐 채로, 티 테이블 아래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애초에 아름다움에 이끌려 찾아왔으니, 그 아름다움이 다할 때 발길을 돌리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지.”
노래를 부르듯 감미로운 목소리에는 체념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눈은, 여전히 꽃을 떠나간 나비의 뒤를 덧그리고 있었다.
체이스의 아버지인 카르단디 백작은 사냥이 취미였다. 그는 젊은 시절, 사냥을 하기 위해 종종 수도와 멀리 떨어진 지방에도 자주 나다니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히 들른 시골 마을에서 운명처럼 어머니와 마주쳤다.
어머니는 한미한 자작가의 영애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의 아름다움에 반했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그녀를 데려왔다.
그리고 체이스가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버지는 어머니를 나름대로 애지중지 아껴 주었었다.
하지만 그들 모자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첩을 들이는 게 법률상 어긋나는 행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머니를 향하는 카르단디 부인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카르단디 부인의 앞에서 언제나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려야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행복은 길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더라. 아버지의 눈길이 어머니를 떠난 순간은.
정확히 시기를 판별하기는 어려웠다. 아버지의 눈길은 언젠가부터 서서히 어머니에게서 멀어져 다른 곳을 향했으니까.
어느새 체이스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웃는 모습보다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멀리서 바라만 보는 모습이 더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눈길은 더 이상 어머니를 향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눈길은 항상 아버지를 향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행여 자신을 뒤돌아봐 주지 않을까 헛된 기대를 품고서.
잠시 과거를 회상하던 체이스의 귓가에 높고 얇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체이스, 내가 이 이야기를 갑자기 왜 하는 줄 아니?”
체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네가 걱정되어서란다.”
근심이 가득 담긴 물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네 형이 검술 실력이 뛰어난 너를 시기해서, 억지로 너 같은 인재를 평민 계집아이와 약혼을 시켰잖니.”
억지로.
분명 체이스의 상황을 적합하게 표현한 단어가 맞았는데, 어쩐지 반박하고만 싶어졌다.
“그것도 너는 얼굴도, 이름도 잘 모르는 사람과 말이다. 얼마나 끔찍한 일이니. 전혀 몰랐던 타인과 강제로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건.”
체이스는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분명히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정작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어머니의 말이 맞았다.
체이스는 약혼이 달갑지 않았다. 오히려 귀찮고 성가시기만 했다.
제 외모만 보고 수련 시간에 달라붙는 학생들처럼 제 약혼녀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관심도 없이 그럴싸한 껍데기만 보고 홀린 듯 다가오리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정작 제 약혼자가 된 유디트는…….
“나는 걱정이 된단다. 너는 겉보기와 달리 마음이 여린 아이니까 혹여 네 약혼녀에게 홀랑 마음을 줄까 봐서. 네 형이 어떤 입김을 불어넣었을지 모르는데, 그 상대와 그대로 사랑에 빠지는 건 말이 안 되지 않겠니.”
“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체이스가 저도 모르게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어머니를 보고서야 큼, 헛기침을 내뱉곤 도로 앉았다.
“잠시 다리에 쥐가 나서.”
통하지도 않을 변명을 덧붙이는 건 덤이었다.
어머니는 다 티가 나는 거짓말을 하는 제 아들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체이스의 얼굴이 더 화끈 달아오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흐음,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던데?”
어머니의 읊조림에 체이스의 귓가가 홧홧해졌다.
“절대 아니에요. 제가 유디트를 사랑할 리가…….”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순간 체이스의 머릿속에 유디트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듯이 생생하게.
카렐 교수의 앞에서, 제 졸업을 책임지겠노라고 당차게 선언하던 모습이라든지.
자신이 처음으로 회계학 수업에 출석한 날, 거리낌 없이 노트와 필기구를 빌려주던 모습이라든지.
그리고 매캐한 먼지가 폴폴 날리던 연금술 실험실에서, 제 몸집만 한 커다란 빗자루를 들고, 자신을 빤히 응시하던 모습들까지.
‘빨리 청소 끝내고 같이 수업 들으러 가자.’
별것 아니라는 듯 무심히 말하지만, 언제나 자신을 생각해 주는 그 배려 넘치던 목소리가 차례로 떠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검술부장이라고 하더니, 능력이 정말 뛰어나구나.’
자신을 향해 얼굴 가득 지어 보였던 그 환한 미소까지 생각나자, 체이스의 얼굴이 툭 건드리면 터질 듯이 새빨개졌다.
갑자기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종잡을 수 없는 스스로의 반응에 체이스는 손바닥에 얼굴을 숨기듯 파묻었다. 할 수만 있다면 어디론가 도망가고만 싶었다.
어머니의 의아한 듯 불렀다.
“체이스?”
“……네.”
“너 갑자기 왜 그러니?”
“잠시 더워서.”
손바닥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든 체이스가 셔츠 옷깃 부분을 잡고 덥다는 듯이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