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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57화 (57/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57화

달아올랐던 뺨은 그래도 바람이 닿자마자 금세 미지근하게 식었다.

어머니는 푸른 눈으로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미심쩍다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피하기 위해서 예의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테이블 위의 홍차를 물처럼 거침없이 들이키고 말았다.

“그런데 차가 참 맛있네요!”

미심쩍다는 눈빛은 다행히 거둬졌다.

“그래, 너를 생각해서 일부러 설탕은 넣지 않았단다. 너는 단 걸 안 좋아하니까.”

어머니도 홍차를 마시며 웃었다. 그 말을 듣자 또다시 유디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단 걸 좋아하려고 노력해 봐.’

아무래도 자신이 미친 게 분명했다. 어떻게 해도 유디트에 대한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다니.

하지만 곧이어 체이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고 말았다.

“다음에는 설탕을 타서 주셔도 괜찮아요.”

어머니가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한번 좋아해 보려고요. 단 거.”

“응? 갑자기?”

체이스는 시선을 피하며 그냥, 하고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한순간의 변덕이겠거니 생각하여 자세히 이유를 캐묻진 않았다.

그 후,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묻는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체이스의 아카데미 생활을 궁금해했다. 하지만 체이스는 매번 수업을 땡땡이를 쳤고, 어울리는 친구도 없었기 때문에 어색하게 웃어넘길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었다.

“요즘에는 회계학 수업을 열심히 듣고 있어요. 노트에 필기까지 하면서요.”

“정말? 그럼 이번엔 시험 성적을 기대해 봐도 되는 거니?”

“……그건 모르겠어요.”

뜨끔한 듯 중얼거리는 체이스의 말에 어머니가 웃음을 터트렸다.

“됐어, 나는 네가 아픈 곳 없이 건강한 것만으로도 만족하니까.”

체이스는 가슴께가 간질간질한 기분에 말없이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필기까지 하며 열심히 공부하게 된 거니?”

“그게,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요. 출석과 시험 점수를 일정 기준 이상 넘겨야 낙제하지 않는다더라고요.”

그러자 어머니가 티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더니, 놀랍다는 듯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어머, 체이스. 너도 그걸 신경 쓰고 있었구나? 졸업하든지 말든지 신경도 안 쓰고 사는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농담 반 진담 반인 어조로 덧붙였다.

“어쩌면 나는 네가 아카데미에 말뚝을 박는 건 아닌지까지 생각했단다.”

“설마요.”

아무리 저택에 오는 게 싫어도 그렇지, 그건 아니었다.

아닌가? 만약 유디트가 없었더라면, 그래도 이렇게 졸업하기 위해 노력했을까?

체이스는 한 번 상상해 보았다. 자신이 유디트와 약혼을 하지 않았어도 회계학 수업에 꾸준히 참석했을지.

아무래도 그냥 낙제하고 말았을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졸업할 생각을 하다니. 기특하구나.”

칭찬받을 일이 전혀 아닌데 칭찬을 받아 민망했다. 체이스는 목이 타서 홍차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머니가 힐끗 체이스를 살피더니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먼 길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이만 들어가서 쉬렴.”

온종일 마차에 앉아 있느라 몸이 뻐근한 건 사실이었기에 체이스는 거절하지 않았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 온실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였다.

“체이스.”

어머니의 부름에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새파란 눈이 체이스를 옭아매듯 사로잡았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단다.”

“……말씀하세요.”

어쩐지 조금 전과는 사뭇 바뀐 분위기에 체이스가 긴장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망설임 없는 어조로 내뱉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랑은 쉽게 변해. 영원하지 않아. 한순간의 충동에 이끌려 네 인생을 송두리째 맡기지 말렴.”

꼬박꼬박 대답을 잘하던 체이스는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마음을 주지 않으면 상처 입을 일도, 상처를 줄 일도 없단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내 말 명심하렴.”

* * *

“체이스.”

유디트가 자신을 불렀다. 그것도 입 안에 다디단 사탕을 문 것처럼 달콤한 어조로.

체이스는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유디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지개처럼 퍼지는 아침 햇살 아래에서, 분홍색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어지러이 휘날리고 있었다.

이윽고 체이스의 앞에 당도한 유디트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런 아침부터 나를 부른 거지?

체이스는 괜히 헛기침하며 짝다리를 짚었다. 왠지 모르게 초조하고, 여유가 없어진 상태였는데 유디트에겐 그런 상태를 들키고 싶지 않아 부러 불량한 자세를 취한 것이다.

곧 그가 거만하게 유디트를 내려다보았다. 유디트의 눈에는 부디 자신이 여유롭게 비치길 바라면서.

그때 조그만 분홍색 입술이 벌어지더니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을 툭 내뱉었다.

“우리, 이만 약혼을 깨는 게 좋겠어.”

“……뭐라고?”

체이스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하고 말았다. 그러나 유디트의 앞에서 볼썽사납게 넘어지는 꼴을 보여 줄 순 없었으므로, 겨우 균형을 잡아 다시 바로 섰다.

헛걸 들었나?

방금 자신의 귀에 들린 문장을 외면했다.

하지만 유디트는 잔혹하게도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외면하지도 못할 만큼 또박또박.

“어차피 너도 알고 있잖아? 사랑은 영원하지 않고 쉽게 변한다는 거. 그리고 애초에-.”

체이스가 숨을 멈춘 순간, 유디트가 이어 말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었잖아.”

“…….”

“나는 이미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어.”

사색이 된 체이스가 뒷걸음질 쳤다. 분명 조금 전에 볼썽사나운 꼴을 보여 주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디트는 체이스를 빤히 바라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결말은 예상했을 텐데, 왜 그렇게 놀란 얼굴이야.”

체이스는 필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눈을 깜박여 보면 유디트가 바로 체이스의 눈앞에 있었다.

대체 언제, 어떻게 여기까지 쫓아온 거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자신에 비해 눈앞의 황금색 눈동자는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은 채 무감각하기만 했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인형처럼.

체이스는 도망가던 걸 멈추고 고개를 도리질 쳤다.

“나는 그런 거 예상한 적 없어.”

“아니야, 너는 예상했어.”

“예상한 적 없어.”

“정말?”

무기질적인 황금색 눈에 형편없이 덜덜 떨고 있는 체이스가 담겼다.

“그런데 왜 나보고 너를 사랑하지 말라고 한 거야?”

“그, 그건.”

“그리고 너도 나를 사랑할 생각이 없다고 했잖아.”

“나는…….”

“두려워서겠지. 지금처럼, 이런 상황을 마주하게 될까 봐 너는 애써 피했던 거잖아.”

털썩. 결국 다리에 힘이 풀리고만 체이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심장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찌르는 듯이 아파 왔다.

그는 손을 들어 재빨리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유디트의 목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듯 선명했다.

주저앉은 체이스의 앞에 가만히 서 있던 유디트가 곧 무릎을 굽혔다. 그리곤 체이스와 눈을 마주했다.

“무서웠어? 사랑으로 인해서 상처받을까 봐. 그래서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않으려고 한 거야?”

감정이 하나도 실리지 않은 얼굴과는 달리, 목소리에는 언뜻 안타깝다는 어조가 실려 있었다.

“그런데 어쩌지, 너는 이미…….”

벌떡.

“허억……!”

체이스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누군가에게 목이 졸린 것처럼 가빠진 호흡을 애써 가다듬었다.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불이 꺼져 어두운 방.

카르단디 저택, 체이스의 방이었다. 익숙한 광경에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어깨의 힘이 느슨하게 풀렸다.

허무함에 중얼거렸다.

“뭐야, 그냥 꿈이었잖아.”

어린애도 아니고, 고작 꿈 하나에 이렇게 호들갑을 피운 건가?

스스로가 너무 우스워서 픽 웃었다. 그런데 문득 맞은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한 뺨. 붉어진 눈가와 식은땀으로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

그리고 지금까지도 길을 잃은 듯이 떨리고 있는 눈동자까지.

“……왜 이렇게까지 놀란 거야?”

체이스는 자기 자신이 어이가 없었고, 한편으로는 이상하기까지 했다.

사실 돌이켜보면 악몽도 아니었다.

인간을 무참히 죽이는 끔찍한 마물이 등장한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절벽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겪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냥 고작해야 유디트가 약혼을 깨자고 제안한 꿈이었는데.

“그런데 왜…….”

체이스가 혼탁해진 눈으로 축축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손가락 사이로 스치는 머리카락이 기분 나빴다.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봤다.

지난날 마지막으로 르데인과 대화를 나눴을 때처럼, 어둑어둑한 하늘 한가운데에 달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걸 본 체이스는 저도 모르게 그때의 만남을 상기하고 말았다.

자신이 유디트와 나눈 대화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르데인이 뭐라고 말했더라?

분명-.

‘아, 체이스 선배님은 모르고 계셨죠.’

안타까이 접히는 눈동자에 쓸쓸함이 묻어났다. 곧 르데인이 눈을 내리깔며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미 엿들으셨으니 어쩔 수 없이 말씀드릴게요. 사실은-.’

사실, 유디트와 아셀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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