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58화
그래서 이따위 꿈을 꾼 걸까.
유디트가 고작 그 뺀질거리는 녀석을 좋아하는 게 대체 뭐라고, 이제는 꿈에까지 등장해 자신을 괴롭히는 걸까.
물론 체이스는 유디트가 아셀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날, 조금 혼란스럽긴 했다. 처음 겪는 감정에 휘둘렸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뒤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그냥 예상치 못한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조금 놀란 것뿐이라고.
애초에 사랑은 없을 거라고 약속했던 관계가 아닌가. 그러니 유디트가 누구에게 마음을 주든, 자신이 상관할 일도 아니었는데.
그런데 왜, 이제 와 그 모든 감정들이 자신을 좀먹고 있는 것일까.
곧이어 체이스는 고통스러운 듯 눈을 감았다.
유디트가 아셀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여러 가지 정황들이 모두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맨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우리가 약혼하게 되더라도 너를 사랑하진 않을 거라며 그녀에게 선언했을 때.
당시 유디트의 표정을 스쳐 지나간 감정은 이제 와 떠올려 봤을 때 분명히…….
안도였다. 유디트는 체이스가 본인을 사랑하지 않을 거란 말에 안도했었던 거였다.
그래서였구나.
유디트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이상했다.
유디트더러 자신을 사랑하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으면서, 왜 자신은 그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이토록 당황한 것일까.
그리고 왜 이런 생경한 감정을 느끼는 걸까. 이 감정이 무엇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도 도무지 모르겠다.
문득 첫 만남 때 유디트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략적으로 이뤄진 약혼에 사랑을 바랄 만큼 멍청하진 않거든.’
……그 말대로라면 만약 유디트와 이대로 약혼해도 유디트가 날 사랑하는 일은 없는 거구나. 평생을 함께해도, 유디트는…….
체이스는 곧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홧홧했다. 곧 치솟을 열기에 잠겨 죽을 것처럼.
* * *
다음 날 체이스는 도망치듯 카르단디 저택에서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가족끼리 오붓하게 식사를 하자던 아버지의 말도, 자신을 질척하게 응시하던 형의 시선도 전부 다 무시한 채로.
몸이 안 좋다는 변명을 댔다.
다행히 체이스의 안색이 파리했고, 어머니도 그의 편을 들어준 덕분에 체이스는 일찍 저택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마차를 타고 다시 아카데미로 향했다. 저택에 올 때 그랬던 것처럼 체이스는 커다란 창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집중할 순 없었다.
‘두려워서겠지. 지금처럼, 이런 상황을 마주하게 될까 봐 너는 애써 피했던 거야.’
‘무서웠어? 사랑으로 인해서 상처받을까 봐. 그래서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않으려고 한 거야?’
‘어쩌지, 그런데 너는 이미……’
악몽 속의 유디트는 자신에게 대체 뭐라고 말하려고 했을까.
마지막 그 말을 들으려는 순간, 꿈에서 깨 버려서 듣지 못했다. 궁금한 마음도 있었지만, 차라리 듣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악몽에 나온 인물이 자신에게 좋은 말을 해 줬을 리는 없을 테니까.
체이스는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아카데미로 돌아가서, 유디트를 만나서 증명해야겠어. 내가 유디트를 좋아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체이스는 유디트를 만나서 확실하게 다시 말해 줄 셈이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고 너도 나를 사랑하지 말라고.
그래. 차라리 유디트가 아셀을 사랑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셀에게 마음이 있는 이상 자신을 좋아하게 될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때 마침 심장이 멍든 것처럼 욱신거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심장에도 멍이 드나?
하지만 체이스는 기분 탓이라고 여기며 그냥 흘려넘겼다.
아카데미에 도착하자마자 마차에서 내렸다. 아직 주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카데미는 여전히 돌아다니는 학생들 하나 없이 한산했다.
체이스는 텅 빈 교정을 혼자 걸었다. 기계처럼 다리를 움직였다.
저번처럼 여자 기숙사를 찾아가 유디트를 몰래 불러내 볼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몇 걸음 걷지 않아 벤치에 앉아 있는 유디트를 발견했다.
운명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기막힌 우연.
체이스는 잠시 자리에서 멈춰 서서 유디트를 바라보았다. 유디트는 수첩을 들고 뭔가를 열심히 끄적거리고 있었다.
꿈에서 본 것처럼 무지개 같은 아침 햇살 아래에서, 그녀의 아름다운 분홍색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휘날리고 있었다.
체이스는 인기척을 죽이고 유디트의 몰래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무엇을 하는지 슬쩍 살폈다.
설마 주말까지 공부를 하는 건가 싶었는데, 유디트는 수첩에 조그마한 새를 그리고 있었다.
솜씨가 꽤 수준급이었다. 체이스는 유디트의 부전공이 미술이었음을 상기했다.
동시에 유디트가 그리고 있는 새가 두 눈이 동그란 게 꼭 유디트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림체가 주인을 따라가는 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체이스는 곧 풀썩, 유디트의 옆자리에 앉았다. 유디트는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데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자신임을 확인하더니-.
“체이스?”
곧장 굳어진 표정을 풀며 뒤로 물린 몸을 바로 했다. 마치 안도하는 듯이, 그리고 어쩌면 자신을 반겨 주는 듯이.
그 모습에 체이스의 멍든 심장이 또 한차례 울렁거렸으나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간신히 떨쳐 냈다.
체이스는 역시 몸 상태가 안 좋은 모양이라고,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 쉬어야겠다고 재차 다짐했다.
그러니까 빨리 유디트에게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오늘 밤에도 또 그 악몽을 꿀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정작 입 밖으로 그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대신 다른 말만 튀어나왔다.
“여기에 혼자 앉아서 뭐 해?”
“그림 그리고 있었어.”
유디트가 손에 들고 있던 수첩을 내밀었다. 가까이서 본 새는 더욱 유디트를 닮은 것 같았다. 체이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봐줄 만하네.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조금이 아니라 상당히 귀여웠지만.
평소에는 시끄럽고 거슬린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은데, 체이스는 처음으로 자신이 새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때 유디트가 부욱, 종이를 뜯어냈다.
설마 버리려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몰래 주워 가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유디트는 불쑥 제게로 종이를 내밀었다.
“그럼 가져, 선물이야.”
“…….”
“네가 나한테 쿠키를 줬었잖아. 그거 몰랐는데 되게 구하기 힘든 거라며? 한참 줄 서서 기다려야 겨우 살 수 있다던데.”
종이를 받아 든 체이스가 말없이 눈만 깜박거리고 있자 유디트가 고개를 기울였다.
“마음에 안 들어? 귀엽다면서.”
“……마음에 들어.”
체이스가 혹여 구겨질까 봐 재킷 안주머니에 종이를 소중히 갈무리했다. 단추를 채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유디트는 체이스를 살펴보다가 그가 꽤 화려한 옷을 걸쳤다는 걸 확인하고 물었다.
“그런데 너는 뭐 하고 있었어? 어디 다녀온 거야?”
“집에 갔다 왔어.”
“그래? 그런데 빨리 돌아왔네.”
“응.”
유디트는 뭔가를 더 묻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일전에 벌 청소할 때 들었던 가정사에서, 대충 빨리 집에서 돌아온 이유를 추측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리 화목하지 않은 가정이라는 걸 들킨 모양이다.
체이스는 왠지 민망하여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아, 맞다. 이번 여름 파티가 지연되었다는 소식 들었어, 아셀이 다쳐서 그런 거라고 하던데.”
그러자 유디트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다친 아셀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다시금 체이스의 가슴이 찌르르 저려 왔지만 애써 참아 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유디트에게 물었다.
“걘 너랑 꽤 친한 친구잖아. 괜찮아?”
“……아, 응. 아셀도 심각하게 다친 건 아니니까.”
“그렇구나, 많이 다치지 않았다니 다행이네.”
“그렇지. 낫기만 하면 파티도 다시 예정대로 열릴 거래.”
사실 체이스는 아셀이 다쳤거나 말거나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아셀에 대한 얘기를 꺼내면 유디트의 반응이 어떨지.
예상대로 유디트는 아셀이란 녀석을 몹시 신경 쓰는 듯 보였다. 그리고 왠지 그게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묻고 말았다.
“……그래? 그럼, 그 파티에 나랑 함께 참석할까?”
유디트의 두 눈동자가 커졌다. 그녀는 아마 그가 이런 질문을 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한 것 같다.
하긴, 아카데미 행사는 죄다 불참하곤 했던 체이스였으니까.
그러니까 아마 이번 파티 또한 예외가 아닐 거라고 여긴 거겠지.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두 사람은 약혼을 했으니, 유디트의 공식적인 파트너는 자신이 기꺼이 되어 주는 게 맞지 않겠는가.
만약 그녀가 그 파티에 참가하길 원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때, 유디트가 난감하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어쩌지, 미안해. 나는 이미 선약이 있어서.”
“…….”
그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체이스는 표정 관리도 못하고 멈칫 얼굴을 굳혔다.
겨우 고개를 돌려 유디트를 바라봤을 때, 그녀의 얼굴에 난처함이 가득한 것이 보였다.
내가 유디트를 난처하게 만들었구나.
더 이상 그녀를 곤란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자꾸만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다음 질문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혹시 그 선약을 아셀과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