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59화
“아, 그게…….”
유디트가 그의 질문을 듣자마자 크게 당황하며 머뭇거렸다. 수첩을 쥔 손이 불안하게 꼼지락거리는 게 보였다.
그 순간 체이스는 스스로가 정말이지 구차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유디트라도 이런 녀석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때, 한참 말하기를 주저하던 유디트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맞아.”
사실을 인정하는 나지막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역시 유디트는 아셀을 좋아하는구나.
더없는 확인 사살이었다. 이미 알던 사실이지만 그것을 본인에게서 직접 확인받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마음이 아픈 동시에 살짝 화가 났다. 유디트의 약혼자는 나인데, 어째서 나랑 한마디 상의 없이 이런 일을 결정해 버린 것일까.
그에 체이스는 저도 모르게 날 선 어조로 유디트에게 말하고 말았다.
“……네 약혼자는 걔가 아니라 나야. 그런데 왜 그 녀석이랑 참석하겠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
“미안해, 체이스. 내가 사정이 있어서…….”
“대체 무슨 사정인데? 적어도 미리 말은 해 줄 수 있는 거였잖아.”
한심한 놈.
스스로를 욕하면서도 체이스의 입에선 말이 멈추질 않았다.
“내가 직접 묻기 전에, 네가 먼저 나한테 언질이라도 해 주지 그랬어.”
그랬더라면 이렇게 비참하진 않았을 텐데. 쥐꼬리만 한 자존심 덕분에 뒷말은 겨우 삼켰다.
“…….”
유디트는 아무 말도 없었다. 어쩌면 너무도 형편없는 제 모습에 실망한 걸지도 몰랐다.
한참 뒤에, 유디트가 그를 불렀다.
“저기, 체이스.”
체이스는 울분을 삼키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몹시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너 혹시…… 우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체이스는 가까스로 태연한 척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목소리의 떨림은 감출 수 없었다. 그 모습에 유디트는 더욱 미안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체이스. 나도 뭐라 변명할 말이 없어. 정말 진심으로 미안해. 약혼자인 네 입장을 더욱더 생각했어야 했는데…….”
“됐고, 나 안 울거든.”
“하지만 네 무릎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는걸.”
“…….”
체이스는 황급히 손을 들어 눈물 자국으로 엉망이 된 바지를 가렸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눈물이 손등 위로 뚝 떨어졌다.
유디트는 그 모습을 보며 의문을 가졌다.
체이스는 왜 이렇게 속상해하는 걸까. 마음만 먹는다면 그녀 말고도 얼마든지 다른 이와 파티에 참석할 수도 있는 사람이.
자신이 다른 사람과 선약을 맺었다는 사실만으로 이토록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유가 뭘까.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어깨를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유디트의 머릿속에 있을 수 없는 사실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설마 하면서도 묻고 말았다.
“……체이스, 너 혹시 날 좋아해?”
그렇게 말을 한 순간, 곧장 부인해 올 줄 알았던 체이스가 어쩐지 대답이 없었다.
왜 대답이 없을까. 하도 황당한 말이라서 반응을 해 주기도 귀찮았던 걸까?
그런데 한참 후, 팔을 들어 눈을 거칠게 닦아 낸 체이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 말과 동시에 그의 붉게 충혈된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이번에는 유디트가 돌덩이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한꺼번에 백만 가지의 생각이 머릿속을 범람하는 바람에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혹시 내 귀가 잘못된 걸까?
하지만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그의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유디트는 감히 현실 부정을 할 수 없었다.
눈을 감는다고 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정신이 어질어질한 나머지 그녀는 눈을 꾹 내리감고 말았다.
새까만 어둠을 마주하자 그제야 심장이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
이윽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지금까지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체이스가 보였다.
마침내 결심이 선 유디트는 그런 그를 향해 느리게 입을 뗐다.
“……하지만 너 예전에 이렇게 말했었잖아.”
“어떤 말?”
그녀가 체이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끝맺었다.
“나보고 널 사랑하지 말라고.”
제 말을 들은 체이스의 얼굴이 뻣뻣해졌다. 딱딱하게 경직된 표정을 애써 모른 척하며 유디트가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너도 나를 사랑할 생각이 없다고 했었잖아.”
“…….”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저도 모르게 원망 같은 말들을 쏟아내고 말았다.
여전히 체이스는 대답이 없었기에, 곧 유디트는 그를 피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뺨에 와닿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모른 척하면서.
“저기 체이스, 우리는 어디까지나 정략 약혼 관계라는 거 잊지 마. 서로에게 쓸모가 있어서, 서로를 이용할 목적으로 붙어 있는 것뿐이니까.”
말을 이어 갈수록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래, 우리는 단지 그뿐이잖아.
초조함이 가시고 점차 안심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너는 정말 좋은 약혼자였어. 그리고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어.”
“…….”
“앞으로 나도 너에게 좋은 약혼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
문득 처음으로 부 활동 시간에 땡땡이를 치고 체이스를 찾아갔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 자신은 대체 왜 그랬을까? 왜 체이스의 모습이 뇌리를 스쳐 갔을까.
고민해 봤지만,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어떤 이유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확실히 해 둬야 했다. 서로 깊은 감정으로 발전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유디트에게나, 체이스에게나.
이제 확실하게 말했으니까, 자신도 마음을 정리했으니까, 또 체이스도 슬픔에서 벗어나 조금은 진정된 듯 보였으니까.
그러니까 이만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단지 정략적인 관계일 뿐인데 더는 이렇게 시시덕거리며 붙어 있을 이유가 없었으므로.
탁.
하지만 체이스가 돌아서는 그녀를 붙잡았다. 잡힌 건 겨우 재킷 끄트머리였지만 유디트는 어쩐지 뿌리칠 수가 없었다.
미미하게 느껴지는 그 힘이 어쩐지 너무나도 절박하게 느껴져서.
결국 뿌리치고 나아가려 했을 때, 뒤에서 난데없는 고백이 들려왔다.
“너를 사랑해.”
“…….”
발밑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어서, 속이 울렁거렸다. 지독한 현기증에 눈을 감았다.
허탈하게 생각했다.
이럴까 봐서였는데.
이럴까 봐 지레 겁먹어서 도망치려고 했는데. 그런데 멍청하게도 도망치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너를 사랑하고 있어. 나조차도 모르는 사이에.”
그래서 결국엔 외면하고자 했던 사실을 들어 버리고 말았다.
체이스가 다름 아닌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지러웠다. 혼란스러운 와중 머리를 거치지 않고 따지는 듯한 물음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왜?”
뾰족한 가시가 돋친 말. 어쩌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방어 기제일지도 몰랐다.
다른 이를 상처입힐지라도 자신이 상처 입기 싫다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네가 나를 왜 사랑하는데?”
체이스가 그냥 물러섰으면 좋겠다. 실수였다고, 말이 헛나왔다고 변명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바랐는데.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이유가 필요해?”
체이스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자신을 응시해 왔다.
“그냥 네가 좋아. 그거면 충분하잖아.”
충분하지 않다.
“이유가 없는데 어떻게…….”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어?
그저 뒤죽박죽이었다. 유디트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야? 이유도 없이 가능할 만큼, 별것 아닌 일이야?
하지만 사고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체이스의 목소리가 다시금 고막을 파고들었기 때문에.
“굳이 이유를 이야기하자면 내가 힘들 때 곁에 있어 줘서.”
숨을 멈췄다.
“다정하게 위로해 줘서.”
체이스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다가와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아서.
“나를 소중한 사람처럼 대해 줘서.”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너랑 함께 있는 모든 시간이 특별하고, 영원히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느꼈으니까.”
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너를 사랑하게 됐어.”
눈을 꾹 감았다. 눈꺼풀을 들어 올릴 자격이 없었다. 스스로가 끔찍하게 느껴져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 파묻힌 뒤에야 깨닫고 말았다.
나는 어쩌면…….
아셀이랑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만 건 아닐까.
* * *
아셀 페델리안을 사랑한다. 어떻게 부정할 수도 없을 만큼 명확하게.
왜 아셀을 사랑할까. 스스로가 답답하면서도, 괴로워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할까.
아셀을 사랑하는 이유에 관해서는 고민해 볼 필요도 없었다. 셀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에.
하지만 굳이 몇 가지를 꼽아 보자면 힘들 때 곁에 있어 주고, 다정하게 위로해 줘서.
‘울지 않아도 돼. 우는 건 내가 할게. 너는 웃는 것만 하도록 해.’
또 나를 소중한 사람처럼 대해 줘서.
‘새로운 친구가 생기더라도 네가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래서 결국은 함께 있는 모든 시간이 특별하고, 영원히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느꼈으니까.
하나같이 체이스가 말한 것과 똑같은 이유였다.
어째 모든 것이 꼬여 버린 것만 같았다. 단지 아셀을 끊어 내기를 원했을 뿐인데, 끊어 내기는커녕 체이스까지 휘말리게 만들다니.
하지만 유디트는 아셀에게 상처받았던 것처럼 체이스에게 상처를 주기는 싫었다.
그에게만은 아셀처럼 잔인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