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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63화 (63/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63화

명색이 여름 파티라지만 시기는 가을에 다다라 있어 저녁이 되자 살짝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유디트가 양팔에 손을 문지르며 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그녀의 어깨 위로 겉옷이 내려앉았다.

“……?”

어느새 아셀이 얇은 셔츠 차림이 되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추울 것 같아서.”

“……필요 없어.”

“그럼 안으로 들어가면 돌려줘.”

그렇게 말하며 아셀이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다시 그와 친했던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왠지 눈을 떼기가 어려웠지만, 유디트는 애써 그런 그를 외면한 채 다시 앞을 보았다.

어느새 화려한 파티 장소로 꾸며진 아카데미 홀이 눈에 들어왔다.

열어젖힌 문 너머로도 밝은 조명이 쏟아져 내리는 걸 보니, 이번 학생회에서 단단히도 준비했다는 게 느껴졌다.

유디트는 눈이 부신 걸 참으며 붐비는 사람들을 헤치고 아셀보다 먼저 안에 발을 들였다.

들어가자마자 파티 홀 정중앙에 마법으로 꾸며진 분수대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보석 가루를 뿌린 것처럼 반짝이는 물줄기는 매번 다양한 모양새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데, 주위를 지나다니는 학생들마다 걸음을 멈추며 감탄하기 바빴다.

찬찬히 시선을 옮기자 그 뒤편에는 조금 어두운 분위기로 꾸며진 한 부스가 간접 조명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저게 바로 한나가 말했었던 그 칵테일 바일까?

길게 이어진 테이블과 선반에 병이 가득한 걸로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물론 학업의 장인 아카데미에는 알코올 반입이 금지였다. 교내 질서를 흐릴 수도 있다는 의견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곳에 앉아 있는 학생 중 몇 명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분위기에 취한 건지, 파티에 열기에 취한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교내 유명 인사인 아셀이 입장할 때부터 주변 학생들의 시선이 이곳으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부러 그와 몇 발짝 떨어진 채 걸었건만, 둘이 같이 입장하는 걸 본 학생들의 수근거림이 작게 이어졌다.

“약혼자들은 어디에 두고 둘이 함께 입장하는 거지?”

“그러니까.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는 해도 단둘이 다니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

의문 어린 눈빛들이 그들을 향했다. 하지만 아셀이 웃는 얼굴로 그들을 쏘아보자, 금세 따가운 시선들이 멎었다.

“……뭐, 이유가 있겠지.”

시선이 멎었다고는 하나 눈치가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기를 죽이는 듯한 불편한 공기는 여전했다.

유디트가 어깨를 움츠리는데, 저 멀리 누군가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유디트! 여기서 보네.”

바로 르데샤였다. 반가운 마음에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려는 찰나,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는 르데인을 발견하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유디트 선배님.”

“……그래, 안녕.”

이런 자리에서 그와 맞닥뜨리게 될 줄 몰랐던 유디트는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물론 그와는 친한 선후배 관계로 남기로 했고, 그 증거로 르데인은 지난 보충반 수업에도 참석한 참이었다. 카렐 교수가 참관했었던 바로 그 수업 말이다.

하지만 그에게 아셀을 좋아한단 사실을 들키고 난 직후 버젓이 아셀과 함께 파티에 참석한 모습을 들키게 되다니.

가뜩이나 르데인은 그녀에게 차인 지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더욱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는 척하면서도 은근히 르데인의 안색을 살피고 있는 와중, 아셀이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르데샤. 르데인.”

붙임성 좋은 아셀답게 그는 그동안 친하게 지낸 적 없던 상대임에도 금세 말을 붙였다.

그러면서 능숙하게 파티의 주최자로서 파티 관련된 화제를 꺼내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제법 정다워 보였다. 물론 겉보기에는 그랬다는 의미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르데인도 내심 이렇게 조우하게 되어 몹시 불편할 텐데.

유디트가 쉽사리 대화에 섞이지 못하고 그들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만 보고 있을 때, 르데인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뜻밖의 제안을 해 왔다.

“혹시 기왕 이렇게 만나게 된 거 다 같이 저기 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르데인이 가리킨 곳은 바로 무알코올 칵테일 바였다.

그는 아셀의 팔 위에 얹힌 유디트의 손에 눈길을 주며 장난스레 말을 덧붙였다.

“오늘은 왠지 한잔 걸치고 싶은 날이라서요.”

그 말에 유디트가 몸을 움찔한 반면, 르데샤는 르데인을 향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기었다.

“어쭈, 너 되게 아저씨 같은 말을 한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누나 모르게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게 많거든요.”

투닥거리는 남매의 모습을 보며 유디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르데인에게 아셀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적어도 그의 제안에 따른다면 아셀과 단둘이 남겨지는 상황은 막을 수 있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합석을 권하는 걸 보면 르데인도 마음 정리를 거의 끝낸 모양일 테니 제안을 받아들여도 좋지 않을까.

생각을 마친 유디트는 아셀이 미처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좋아. 가 보자, 저기.”

“정말로?”

르데샤는 의외라는 듯이 유디트를 쳐다보았다.

모범생인 유디트가 저런 것에 관심을 보일 줄 몰랐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왠지 민망했으나 볼을 긁적거리며 칵테일 바로 앞장섰다.

곧이어 긴 테이블에 네 사람이 나란히 일렬로 앉게 되었다. 르데샤는 선반에 진열된 빈 술병들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 봐. 테이칸 제국의 언어야. 수입해 온 건가?”

“그런가 봐요, 누나.”

그들은 잘 꾸민 내부에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이내 메뉴를 골랐다.

각자 주문한 칵테일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와중, 르데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유디트. 혹시 체이스는 어디에 있는 거야? 왜 체이스가 아니라 아셀이랑…….?”

“아, 그게 그러니까…….”

유디트가 곤란해하는 것을 짐작하였는지 르데인이 대신 대답해 주었다.

“유디트 선배님은 아셀 선배님과 친한 소꿉친구시니까요. 그리고 체이스 선배님은 시끄러운 파티를 싫어하시니 대신 와 주신 거겠죠.”

르데샤는 이해한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파티에 참석한 체이스라니. 상상이 잘 안 되긴 한다.”

때마침 주문한 칵테일이 나왔기에 그 주제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더 이상 곤란한 일은 없겠다고 여기던 그때, 칵테일을 벌컥벌컥 들이켜던 르데샤가 유디트를 향해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오늘 유디트는 아셀과 함께 구경 다니겠네? 뭘 하고 다닐 계획이야?”

“아, 그게 음…….”

그녀의 질문에 유디트가 난감한 듯 머뭇거렸다. 솔직히 말해 오늘 뭘 할지 조금도 계획해 둔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아셀이 옆에서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안에 부스들을 좀 돌아보다가, 정원의 조경이 예뻐서 그리로 나갈 계획이야. 불꽃놀이를 감상할 명당을 알고 있거든.”

그의 자연스러운 답변에 유디트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그때, 르데샤가 눈을 빛내며 감탄했다.

“우와, 역시 학생회장은 다르네. 그러고 보니 이 파티도 거의 아셀이 준비한 거였지. 그럼 우리한테도 그 명당이 어딘지 알려 줄 수 없을까?”

아무래도 마지막에 예정된 불꽃놀이 공연을 감상하는 것이 르데샤의 주된 목적이었는지 그녀는 유독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아셀은 난처한 미소를 띤 채 르데샤의 부탁을 거절했다.

“미안하지만 어려울 것 같아. 유디트와 모처럼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싶거든.”

그렇게 말하며 그가 다시 유디트에게 눈길을 주었다.

아셀의 깊은 청회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유디트가 피하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였다.

옆에서 르데인의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하지만 저도 누나랑 함께 불꽃놀이까지 감상할 생각은 없는데요.”

“뭐? 지난번에 그렇게 도움을 받아 놓고 이렇게 입을 싹 씻으려고?”

“사실 그렇게 도움이 되지도 않았는데 좀 억지 아닌가요?”

남매가 활발하게 투닥거리는 모습이 재밌었던 모양인지 아셀의 관심이 금세 그들에게로 쏠렸다.

그에 유디트도 안심하며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말은 저래도 누나를 아끼는 르데인이니 아마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까.

유디트는 좋을 대로 짐작하며 제 앞에 높인 칵테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곤 곧 놀란 눈으로 칵테일을 바라봤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과일의 단맛과 톡 쏘는 탄산이 잘 어울려서 무척 맛있었다. 진짜 술이 섞인 것도 아닌데 다채로운 맛이 나는 것이 신기했다.

이래서 이곳에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몰려 있었던 거구나. 유디트는 신기하다는 듯 칵테일 바 내부를 훑었다.

그때, 파티 홀 전체에 울려 퍼지던 은은한 곡조가 자연스럽게 밝고 경쾌한 선율로 바뀌었다.

한창 사교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춤곡이었다.

달라진 분위기에 흥이 돋았는지, 르데샤가 동생과 다투던 걸 멈추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 내가 좋아하는 노래야!”

그러더니 신이 난 그녀가 르데인의 손을 잡아끌며 그대로 홀 중앙으로 사라져 버렸다.

순식간에 아셀과 단둘이 자리에 남겨지고 말았다. 어색하게 눈을 굴린 유디트가 고개를 돌려 다시 아셀의 얼굴을 바라봤을 때였다.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친 아셀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유디트, 너도 괜찮다면…….”

그는 자신에게 권하듯 정중하게 한쪽 손을 내밀며 말을 끝맺었다.

“함께 춤추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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