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64화
유디트는 제게 내밀어진 하얀 손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벌써부터 많은 학생들이 파트너와 홀 가운데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는 모습이 보였다.
유디트가 망설이는 듯 보이자, 아셀이 재차 설득했다.
“마지막으로 좋은 추억 만들자고 약속했잖아, 응?”
아셀이 간절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니 유디트의 마음도 크게 흔들렸다.
그의 말대로 마지막이니까, 같이 춤추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이내 유디트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자, 아셀이 기쁜 듯이 웃으며 그녀를 파티 홀로 에스코트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알아본 학생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쪽을 계속 곁눈질했다.
사람들의 주의를 끌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감당할 수밖에 없겠지.
유디트가 체념한 얼굴로 아셀의 얼굴을 마주 본 순간, 그가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은 채 자연스럽게 스텝을 이끌기 시작했다.
사실 춤이라곤 교양 수업 때 몇 번 배워 본 게 전부였는데. 혹여 실수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뒤늦게 아셀의 발을 짓밟을까 걱정이 된 유디트는 자신의 춤 실력에 대해 순순히 실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가 아셀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셀, 사실 나 춤 못 춰.”
“응, 괜찮아.”
“발을 헛디뎌서 네 발을 밟을지도 몰라.”
“그것도 괜찮아. 그리고 내가 그런 일 생기지 않도록 노력할게.”
아셀이 자신감 어린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 주었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영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유디트는 그의 능숙한 리드에 어찌어찌 남들처럼 흉내를 잘 내어 따라가고 있었다.
남들이 오른쪽으로 움직일 땐 오른쪽으로 갔고 왼쪽으로 움직일 땐 왼쪽으로 갔다.
가끔 방향을 헷갈려서 실수할 때면 아셀이 바로잡아 주었다.
그렇기에 제삼자가 볼 때 그들은 여유롭고 우아하게 춤을 추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잠시 춤에 집중하고 있는 유디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아셀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인 거 같아.”
“뭐가?”
“너랑 이렇게 오래 얼굴 맞대고 있는 것 말이야.”
“…….”
“그리고 추다 보니 꽤 즐겁지?”
아셀의 말대로 남들의 시선이 신경이 쓰였던 처음과는 다르게, 노래가 흐를수록 긴장이 점점 풀렸다.
어느새 유디트는 노랫소리에 몸을 맡기곤 자유롭게 움직였다.
이래서 사람들이 춤을 추는 거구나.
스텝을 밟는 것에만 집중하다 보니 고민과 걱정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곧 음악이 끝났다. 음악이 멎자 다시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이제 아셀과 헤어질 일만 남았구나.
유디트는 아셀의 팔 위에 얹었던 손을 떼었다. 왠지 모를 아쉬움에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데 아셀이 제 쪽으로 다시 손을 내밀었다.
“유디트, 그러면 이제 불꽃놀이 보러 가자.”
“불꽃놀이?”
“응, 내가 명당을 안다고 했었잖아.”
분명 그와 마지막으로 춤을 추고 헤어지려고 했는데, 못이기는 척 그의 손을 붙잡고 말았다.
* * *
아카데미의 동쪽 정원.
마치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길이 나 있는 이곳은 자칫했다간 미아가 되기에 십상이었다.
게다가 장미 덩굴이 무성해 가시에 찔리기 일쑤라 학생들은 보통 꺼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불꽃놀이 명당이라더니 왜 굳이 이런 곳에?
주변에 인기척도 없었기에 밤이 되자 더욱 음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으스스한 느낌이 등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유디트가 한 차례 어깨를 떨자 아셀은 다시 한번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걸쳐 주었다.
“아니야, 괜찮은데…….”
이번에도 있는 힘껏 사양해 보았지만, 아까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인지 아셀도 순순히 물러나진 않았다.
신사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 거절하지 말아 달라면서 말이다. 결국 유디트는 실랑이하던 어깨에 힘을 뺐다.
어쨌든 힘겹게 미로에서 빠져나와 야트막한 언덕을 거의 다 올라왔을 때 즈음.
“……우와.”
유디트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아셀이 불꽃놀이 명당을 안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실제로 아카데미 안에 이런 작은 동산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
언덕을 올라가자마자 손을 뻗으면 별을 잡을 수 있을 것처럼 하늘이 가까워 보였다.
게다가 야외에도 어둠을 밝히기 위한 마법을 걸어 놨는지 작은 불빛이 허공을 둥둥 떠다니고 있어서 동화 속에나 나올 것 같은 환상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때였다.
펑- 펑펑-.
하늘에서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오색찬란한 불꽃들은 어찌나 화려한지 넋을 놓고 보고 있다가 돌처럼 굳어 버릴 것만 같았다.
눈을 깜박이던 유디트는 수 초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겨우 시선을 돌렸다. 아셀의 하얀 옆얼굴이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는 게 보였다.
그는 이 순간이 즐거운지 입가에 작은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평소보다도 더 부드럽게 풀어진 미소에 고질병처럼 심장이 또 뛰었다.
재빨리 시선을 돌려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펑펑 터지는 불꽃놀이가 붉어졌을 제 얼굴을 가려 줄 테니 다행이었다.
잠시 후, 불꽃놀이가 끝나고 시끄러운 소리도 멎었다. 불꽃놀이가 여름 축제의 마지막 행사였으니 이제 여름 축제도 막을 내린 것이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마무리 같았다. 이젠 아셀과 멀어져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마지막 불꽃을 감상하고 나면, 그땐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서야지.
아직 화려한 불꽃의 잔상이 눈꺼풀에 남아 있는 듯해 가만히 눈을 깜빡이고 있을 때,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있잖아, 유디트.”
“응.”
바로 눈앞에서 현실 같지 않은 풍경이 펼쳐지고 있어서일까. 몽롱했다. 유디트는 왠지 꿈속을 걷는 듯한 기분으로 대답하였다.
유디트가 대답하는 것을 들은 아셀은 잔잔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나 사실 다 알게 됐어.”
“……뭘 말이야?”
“네가 어머니의 명령에 의해, 억지로 체이스와 약혼하게 된 것까지 다 알게 됐다고.”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속에 담긴 뜻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방금 아셀이 뭐라고 했지?
유디트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당황으로 인해 흔들리는 눈동자로 아셀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는 면목이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때문에 우리 가문에서 너에게 폐를 끼치게 돼서…… 정말 미안해. 이러니까 네가 날 싫어해도 할 말이 없어.”
“…….”
“그런데 네가 내 병문안 왔을 때, 아직 너도 날 많이 걱정하는 것처럼 느껴졌어. 이런 내 기분이 착각이라면 모르겠지만.”
유디트는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닌가 싶어서 제 팔을 꾹 움켜쥐었다.
거의 꼬집는 듯이 강하게 힘을 주자 아릿한 아픔이 몰려왔다. 마치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일깨워 주는 듯이.
페델리안 부인이 아셀에게 먼저 말을 했을 리는 없을 텐데, 아셀이 어떻게 이 사실을 알았을까?
설마 세드릭이 아셀에게 말하기라도 한 걸까?
몹시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우선 침착함을 가장하며 입을 떼었다.
“아셀, 그게 뜬금없이 무슨 말이야? 약혼을 강요당하다니. 네가 도대체 무슨 착각을 한 건지는 몰라도 그런 적은 없-.”
“나한테까지 감출 필요 없어. 너는 내게 있어 부모님 다음으로 소중한 가족인걸.”
“…….”
“그러니 유디트, 솔직하게 말해 줘. 우리 어머니 때문에 원치도 않은 약혼을 지속하고 있는 거라면 파혼해도 괜찮으니까. 그런 문제는 내가 앞으로 잘 알아서 해결할게.”
말을 마친 아셀이 입술을 몇 번 짓씹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 그동안 내가 너무 바보 같았어. 네가 혼자 이런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니. 이런 형편없는 나에게서 정이 떨어지는 것도 당연해.”
아예 확신을 하는 투였다. 그 모습에 유디트는 진정 그가 모든 걸 알아 버렸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동시에 그가 끊임없이 자책하는 모습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고귀한 귀족 가문의 태생인 그가 얼마나 귀하게 자랐는지 알기에, 그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깎아내리는 모습이 낯설었던 것이다.
그것도 저처럼 보잘것없는 평민 친구를 위해…….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쑥 원망이 차올랐다.
아셀은 이렇게나 날 소중하게 여긴다면서, 왜 한 번도 내 감정을 진지하게 들여다봐 주지는 않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지금처럼 그를 원망하고 관계를 망칠 일은 없었을 텐데…….
그 생각을 하니 눈가가 젖어 드는 것 같았지만, 간신히 표정 관리를 한 뒤 차가운 투로 입을 열었다.
“아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
“너희 어머니가 내게 그런 명령을 내리신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고작 그것 때문에 너와 멀어질 결심을 한 건 아냐.”
“그럼 왜……?”
“전에 말했던 대로야. 너와 난 어울리지 않으니까. 넌 차기 공작이 될 사람이고, 난 일개 평민 학생에 불과하니까.”
유디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아셀이 두 손으로 유디트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어깨에 닿는 온기가 따뜻해서 마음이 흔들렸다.
“그런 말 하지 마, 유디트.”
“…….”
“네가 뭐가 어때서? 신분이 뭐가 중요하다는 거야. 너는 내 소중한 친구고, 단지 그뿐이야. 거기에 다른 건 아무것도 관계없어.”
아셀은 달래는 듯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하지만 유디트는 다시 냉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입 안에서 혀를 굴리며, 이 말을 해도 될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와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자 곧 망설임은 사라졌다.
왜일까, 갑자기 이 순간 자신에게 상처받은 체이스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아냐, 그건 굉장히 중요해. 왜냐하면 난…….”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아셀에게 눈을 맞추며, 유디트가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더는 가망 없는 사랑으로 고통받고 싶지 않거든.”
또렷한 목소리였다. 못 들었다는 핑계를 댈 수 없을 정도로. 그럼에도 한 번 더 확실히 입에 담았다.
“너를 좋아하고 있어. 그래서 내가 너를 떠나 주겠다고 하는 거야.”
“…….”
“이런 마음을 품고 네 곁에 있게 된다면, 앞으로 곤란해지는 건 내가 아니라 네가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