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65화
아셀의 눈이 흔들렸다.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어쩌면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 같기도 했다.
곧 믿기지 않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처럼 그가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내젓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에 왠지 몰라도 웃음이 나왔다. 너무나 아셀다운 반응이란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일까, 아셀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치고 말았다.
“왜, 또 착각이라고 하려고?”
“……!”
자신의 말에 아셀의 두 눈이 크게 뜨이는 것이 보였다.
이유는 몰라도 더는 싫었다. 자신의 마음이 계속 착각으로 치부당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이게 진심이라는 걸 믿어 줄까.
순간 눈앞에서 넥타이가 흔들렸다. 꼭 잡아 달라는 것처럼.
충동적으로 넥타이를 잡아당기자 이내 별 저항 없이 하얀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깊은 바다 같은 눈동자, 그걸 반쯤 덮고 있는 기다란 속눈썹, 매끄러운 뺨.
솜털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살피다가 더 내려와 도톰한 입술을 응시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 위에 살포시 자신의 입술을 얹었다.
쪽.
맞닿은 입술에서부터 심장의 두근거림이 퍼져 나갔다.
“……이래도 아직 착각인 것 같아?”
정적이 흘렀다.
아셀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유디트는 힐끔 아셀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이었다.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던 입술에는 어느새 웃음기가 지워져 있었다.
왠지 갈증이 나서 침을 꿀꺽 삼켰다. 초조함일지도 몰랐다. 아셀의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꼭 사형 선고를 앞둔 사형수처럼 느껴져서.
“……이래서 그동안 나를 피했던 거구나. 어머니 때문에 내가 미워졌기 때문이 아니라.”
한참 뒤에 나온 말이 그것이었다. 드디어 아셀은 그동안 유디트가 자신을 피해 왔던 모든 행동에 대한 의문을 푼 모양이었다.
“…….”
아셀이 가만히 유디트를 내려다보았다. 어떤 생각에 빠진 듯 고요했다.
얼굴을 샅샅이 살피는 집요한 시선에 유디트는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유디트.”
잠시 후 이어진 아셀의 부름에 겨우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그의 얼굴은 웃음기 한 점 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그 안에서 평상시의 상냥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을까, 이내 그가 입을 열었다.
“만약 네 마음을 받아 준다면, 내 곁에 있어 줄 거야?”
순간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은 게 분명하다는 생각에 유디트가 멍하니 되물었다.
“뭐라고?”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아셀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네가 원하는 게 내 마음이라면 얼마든지 줄게. 그러면…… 나를 떠나지 않을 거야?”
아셀은 여전히 대답 없는 유디트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손을 뻗어 뺨을 감쌌다.
미끄러지듯 내려온 엄지가 입술을 매만졌다.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이.
단단한 손가락이 입술 틈새를 어루만지자 저절로 입술이 벌어졌다. 그러자 아셀이 고개를 숙여 왔다. 미풍 같은 숨결이 닿았다. 검정 머리카락이 바로 눈앞에서 흩날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부딪힐 뻔했으나 아셀이 손을 뻗어 와 뒤통수를 감쌌다.
떨리는 숨결이 그의 입 안으로 삼켜 들어갔다. 뒷머리를 쓰다듬던 손은 어느샌가 내려와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뜨거웠다. 어쩌면 아셀이 뜨거운 게 아니라 자신의 체온이 낮은 것인지도 몰랐다. 오싹함에 몸을 흠칫 떨자 달래듯 입맞춤은 더욱 부드러워졌다. 녹을 듯이.
하지만 기묘한 감각에 휩싸인 몸과는 달리, 이상하게 심장은 뛰지 않았다.
메마르고 건조한, 마치 적선하는 듯한 입맞춤. 유디트는 그렇게 느꼈다.
입맞춤이 더욱 깊어질수록 심장은 더욱 싸늘하게 식었다. 어느샌가 침착해져 이성을 되찾은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이게 고백에 대한 아셀의 대답이구나.
사실 대답도 아니었다. 그냥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곁에 남아 달라는 어리광일 뿐이었다.
보답받을 수 없는 마음을 가져 버린 불쌍한 유디트에게 아셀이 적선하듯 던져 준 동정일 뿐이었다.
결국 유디트는 아셀을 밀어냈다. 미련이 남은 듯 잠시 머뭇거리던 입술이 물러가고 나서야 말했다.
“너는 친구한테 이렇게까지 해?”
아셀이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들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다정히 다가온 손가락이 젖은 입술을 닦아 주었다. 섬세한 손길이었지만, 별다른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고작 친구랑 함께 있기 위해서 이런 행동까지 하냐고.”
“…….”
“네 행동, 어떻게 봐도 이상하잖아.”
아셀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자신의 행동을 곱씹어 보는 듯하다가 오히려 유디트에게 되물었다.
“……이상해?”
그렇게 묻는 아셀의 청회색 눈동자에 다양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을 향한 애틋함, 간절함…… 그리고 열망으로 보이는 무언가까지.
거기에 도무지 한 줌의 애정도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유디트는 그것에 마지막 남은 한 가닥 희망을 걸며 그에게 물어보았다.
“너한테 있어…… 난 대체 뭐야? 날 좋아하긴 해?”
자신의 말을 들은 아셀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나는 널…….”
말을 잇는 그의 얼굴에 혼란함이 가득 찼다. 곧이어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뻐끔거리던 입술이 도로 닫혔다.
눈썹을 일그러뜨린 채 머뭇거리는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유디트의 머릿속에 한 가지 확신이 스쳤다.
혹시 아셀 페델리안은 자신과 함께할 미래가 두려운 게 아닐까.
저와의 관계가 변하면서 겪게 될 모든 위험을 감수할 자신이 없어서, 그래서 쉽사리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지 못하는 게 아닐까.
곧이어 아셀이 간신히 말을 끝맺었다.
“……널, 누구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
역시나. 그는 마지막까지 제 속마음을 내보이지 않기를 택했다.
유디트는 실망감이 가득 들어찬 한숨을 내뱉었다.
그동안 무엇을 기대해 온 걸까. 뿔뿔이 조각난 감정들은 알 수 없는 메아리만 남기고 사라졌다.
공허해진 마음에 곧 결론이 섰다.
“굳이 날 좋아하는 척할 필요는 없어.”
“……어째서?”
“이 마음은 알아서 정리할 테니까”
더는 아셀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반응을 한다 하든 달라질 것은 없었으니.
말을 마친 즉시 유디트는 빠르게 뒤돌아섰다. 뒤에 있는 아셀에게서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자신을 붙잡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멀어지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겠다는 듯.
바스락, 바스락.
나뭇잎이 내지르는 비명이 끝도 없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듣기 싫었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슬픈데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는 법조차 잊어버리게 된 사람처럼.
제대로 울지도 못하는 처지가 된 건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돌이켜보면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부터 쭉 그랬던 것 같다. 아셀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버린, 그 비극적인 날로부터 쭉.
사무치도록 슬플 때면 대신 울어 주던 사람이 있었다. 우는 건 자신이 대신하겠다며 말해 주던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떠나 보냈으니, 이 눈물은 이제 대체 어디로 향해야 하는 걸까.
* * *
아셀을 짝사랑하는 것이 신의 선물이라고 여기던 때가 있었다.
내게 닥친 모든 불행과 슬픔이 아셀을 보고 있으면 희미해지는 것만 같아서.
나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것만 같아서. 감당할 수 없는 절망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는 것만 같아서.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게 해 주는 것만 같아서.
아셀과 함께 하는 모든 나날을 소중한 추억이라고 여기던 때가 있었다.
그 추억은 무거운 족쇄가 되어 아셀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음에도.
별것 아닌 친절과 말 한마디를 소중히 간직하면서, 그로 인해 더욱 비참해질지언정 그의 의미 없는 다정함으로 하루하루를 살던 내가 있었다.
아셀과 가까운 옆자리에서 내가 그의 친구임에 안도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비록 가장 가까운 사람은 되지 못할지라도 아셀의 곁에 있을 수 있었기에. 닿을 수는 없겠지만 그저 곁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기에.
가끔 베풀 듯 던져 주는 애정 부스러기들을 주워 먹으며,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라도 된 것만 같은 착각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 짝사랑이 저주와 같다는 걸 직접 체득하는 데에 십 년이 넘게 걸렸구나. 멍청하게도. 바보 같게도. 미련하게도.
하지만 이젠 구질구질했던 모든 것들을 그만둘 것이다.
짝사랑이 끝났다.
* * *
아카데미 동쪽 정원에서 빠져나온 유디트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특별히 어디로 가야겠다는 생각에서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셀과 최대한 멀어지는 것. 그것만이 목적이었다.
막 불꽃놀이가 끝났기 때문인지 정원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그들을 헤치고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유디트는 쉼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이내 주변의 바글바글하던 분위기가 한산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다리가 몹시 아파 와 유디트는 잠시 자리에 멈춰 섰다.
어울리지 않게 차려입느라 꺼내 신은 구두가 몹시 불편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 때문이리라. 한 걸음도 더 걸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끈 떨어진 인형처럼 자리에 풀썩 주저앉은 그녀가 이내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후…….”
바로 그때였다. 고개 숙인 그녀의 앞에 그늘이 졌다.
한참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에, 유디트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차차 익숙한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어둠 속에서도 환히 빛나는 은발이었다.
그 모습에 유디트가 제 눈을 의심하다,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체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