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66화
그림자가 진 체이스의 얼굴은 몹시 어두워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자신의 부름에도 한참이나 말이 없던 그가 잠시 후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여기 주저앉아 있는 거야?”
그제야 아직도 자신이 쪼그려 앉아 있다는 걸 상기한 유디트가 멋쩍은 투로 대답했다.
“다리가 좀 아파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도 엉망인 얼굴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푹 숙였다.
하필 아무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순간에, 이런 식으로 체이스와 마주쳐 버리다니.
하나부터 열까지 엉망인 하루였다.
그러다 문득 기숙사에 있어야 할 체이스가 왜 나와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지독한 훈련광이니 야밤에 검술 연습이라도 하러 나온 걸까.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그의 허리춤에는 늘 차고 다니던 검 한 자루도 보이지 않았다.
입고 있는 옷도 편한 사복 차림인 걸 보아 기숙사에서 쉬다가 잠시 나온 듯했다.
“왜 여기 있는 거야?”
의도하지 않았는데 목소리가 뾰족하게 나와 버렸다.
그의 기분이 상하진 않았을까 걱정되어 슬쩍 고개를 드니, 체이스가 미간을 모은 채 빤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널 찾았어.”
“……날? 왜?”
유디트가 의아하다는 듯이 되묻자 체이스가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살피다 이내 대답했다.
“네가…… 또 울고 있진 않을까 걱정돼서.”
무슨 의미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애써 참고 있던 감정이 북받쳐 올라 그럴 수가 없었다.
곧 눈에 눈물이 고여 넘칠 듯해 유디트는 재빨리 고개를 푹 숙였다.
체이스는 어떻게 알고 이 순간 날 찾아온 걸까. 그리고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유디트는 그가 자신을 걱정해 주고 있는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파티에 참석한 약혼녀가 뭐가 좋다고 일부러 찾아오기까지 한단 말인가.
어쨌건 괜히 체이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해야 하는데, 목구멍에서 말이 탁 막혀 나오지 않았다.
대답 없는 유디트를 보던 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역시 무슨 일이 있었구나.”
“…….”
“그 녀석 때문이야?”
그의 어조는 나직했지만 화를 참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져, 유디트는 재빨리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니야! 아셀은 아무 잘못 없어. 그냥…….”
멍청하게 혼자 기대하고 착각한 내 잘못이지.
체이스를 진정시키기 위해 뭐라고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그 생각을 하니 다시 울컥해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울먹이는 소리가 다시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사실 눈가에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그런 유디트의 앞에 체이스의 두 팔이 뻗어져 왔다. 그리고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가려 주듯 유디트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곤 주춤거리며 다가온 유디트를 어색한 손길로 토닥여 주며 말했다.
“차라리 울어. 이렇게 힘들 땐 그냥 울어 버리는 게 나아.”
그 말을 들으니 차마 그의 손길을 떨쳐 낼 수도 없었다. 유디트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충돌하는 동안, 체이스가 이어 달래듯이 말했다.
“괜찮으니 마음 놓고 울어도 돼. 내가 말했잖아. 마음대로 이용해도 좋다고.”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제 와 염치없이 체이스에게 기대서는 안 되는데.
하지만 머릿속과는 정반대로 막상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된 모양인지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결국 유디트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눈물이 숨겨져 있었나 싶을 만큼 속에서 끊임없이 샘솟았다.
사실 어쩌면 오래전부터 쭉 이렇게 마음 편히 목놓아 울고 싶었던 것 같다. 가슴에 쌓인 감정을 모두 훌훌 비워 낼 수 있도록.
체이스는 자신이 우는 어떤 이유도 캐묻지 않았다. 분명 궁금할 텐데 제가 곤란해할까 봐 일부러 질문을 피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고마웠다. 말없이 자신의 품을 내어 주는 그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자신에게 기대라 말해 주는 그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어도, 아셀에 대한 모든 감정을 접기로 결론을 내린 날이었다.
오래된 마음의 짐을 벗어 던진 것처럼 홀가분한 느낌도 들었지만 그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 순간 자신을 위로해 주러 나타난 그가 반갑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한참을 끅끅대며 울던 유디트는 잠시 후 들썩이던 호흡을 골랐다.
확실히 체이스의 말대로 한 차례 울고 나니 기분이 훨씬 개운해졌다.
눈알이 빠질 것처럼 아파 왔지만, 그 전에 체이스에게 추태를 부린 것에 사과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디트가 겨우 감정을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미안, 내가 너무 민폐-.”
“사과할 필요 없어. 오히려 내가 바라던 바니까.”
체이스는 유디트가 눈물을 그친 걸 확인하자마자 조심스럽게 그녀의 고개를 잡아 들었다.
그리고는 검지로 섬세하게 눈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눈물이 걷히자 또렷해진 시야로 그의 진지한 표정이 보였다.
“이렇게라도 네게 힘이 되어 주고 싶어.”
“…….”
“그러니까 오늘처럼 힘든 일이 생기면 그냥 나한테 기대.”
그의 자상한 말에 유디트는 입술만 깨물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는 제게 너무 과분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상냥한 체이스에게 나는 정말 못된 마음을 가졌었구나. 아셀을 떼어 내기 위해서 그를 이용하려고 했다니…….
다시 울컥하려는 찰나, 밤하늘에 낀 구름이 걷히며 희미한 달빛이 그들 사이에 비쳐 들었다.
동시에 체이스의 가슴팍이 동그랗게 젖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보자마자 부끄러움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어쩐지 민망해진 유디트가 손에 든 가방을 뒤적여 손수건을 꺼냈다.
“……나 때문에 옷이 다 젖었네. 이걸로라도 닦아.”
그 말을 들은 체이스가 제 옷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양쪽 귀를 붉혔다. 하지만 곧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냐, 날도 더운데 시원하니 딱 좋은걸, 뭐.”
너무나도 그다운 대답에 유디트는 결국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다시 주섬주섬 손수건을 가방에 집어넣은 유디트가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체이스, 오늘 일은 정말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네가 이렇게 한다 해서 내가 네 마음에 보답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유디트가 말끝을 흐리자, 체이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어차피 그런 건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어.”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혹시 알아. 이렇게 계속 네 옆을 지키다 보면 언젠가 너도 날 좋아하게 될 날이 올지.”
말을 마친 그가 씨익 웃어 보였다.
어쩐지 쉽사리 대답할 수가 없어 유디트가 침묵만 지키고 있으려니 그가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넌 아무런 죄책감 가지지 않아도 돼. 어차피 너, 처음부터 아셀과 멀어질 생각으로 나와 약혼했던 거잖아.”
그 말도 딱히 틀리지는 않아 유디트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체이스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런 자신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한 듯 체이스가 덧붙이듯 말했다.
“넌 다른 건 몰라도 지독히도 성실한 녀석이니까……. 스스로 이 약혼을 결심한 이상 신의는 지킬 거라고 생각했어.”
생각보다 체이스는 자신에 대해 무척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내가 너를 끝까지 좋아하지 않으면 어떡해?
유디트는 그렇게 되묻고 싶었지만, 너무 잔인한 말이 아닌가 싶어 주저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체이스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냥 나한테 기회만 주면 돼. 아셀 그 녀석은 싹 잊어버릴 수 있게 노력할 테니까, 네가 날 한번 지켜보고 판단해 봐.”
그러면 되잖아?
말투는 당당했지만 체이스의 표정은 어딘가 제 눈치를 살피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당당하던 모습의 체이스가 이렇게 자신감이 사그라들어 있다니,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 사실을 상기하니 가슴이 쓰려 왔다.
“……아니.”
그런 제멋대로인 약속은 할 수 없었다. 누가 봐도 체이스만 손해 보는 상황이었다.
아셀과의 관계에서 한 가지 배운 게 있다면, 적어도 상대의 진심에는 진심으로 응해 주어야 한다는 거다.
이에 유디트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체이스를 위해 무엇을 해야 좋을지 처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하지 마, 체이스. 넌 내 약혼자잖아.”
“……?”
체이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것을 지켜보며 유디트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띄웠다.
“그러니까 나 또한 우리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책임을 다할게. 약속해. 설사 네가 나중에 내가 싫어져서 떠나기 전까지는 네 곁을 지키겠다고.”
자신의 제안을 들은 체이스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내내 곱씹는 듯하던 그의 입가가 잘게 씰룩이다가 이내 한 가지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내가 널 싫어하게 될 일은 평생 없을 것 같은데.”
그 말에 유디트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싫어?”
“……큼, 나쁘진 않은 제안이네.”
단번에 태도를 바꾼 체이스의 얼굴에는 아까 전보다 한결 편안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까까지 미어지는 것 같던 가슴이, 울분에 찬 머릿속이 씻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정말 난 처음부터 끝까지 너한테 도움만 받는구나.
이상한 일이지. 예전에는 너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었는데.
이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네가 애틋하게 여겨질 정도로 가까워지다니.
비록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내린 결정에 불과했지만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체이스를 약혼 상대로 골라서 무척 다행이라고.
유디트는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