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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67화 (67/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67화

* * *

이른 저녁 시간부터 남자 기숙사 안이 시끌벅적했다.

그러나 침대에 드러누운 체이스는 애써 주변의 번잡스러움에 눈을 돌리려 했다.

“넌 파티 참석 안 하냐?”

체이스의 룸메이트가 나가기 직전에 질문을 던졌지만, 일부러 눈을 감고 잠든 척하며 무시했다.

곧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혔다.

사실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수업에 참석하는 것보다 땡땡이 치는 날이 많았던 체이스에게는 이깟 행사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유디트가 옆에 있으니까. 그녀라면 즐거워할 것 같아 함께 가 볼까 생각했던 것뿐인데.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제 대신 그 녀석과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속이 메슥거리고 불편했다.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불쾌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왜 유디트는 그런 녀석을 좋아하는 거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물론 아셀 페델리안은 공부도 잘하고, 가문도 좋기로 유명한 녀석이긴 했다.

하지만 생긴 것도 유약해 보이는 데다, 키도 체격도 뭐 하나 나보다 나은 게 없는 녀석인데.

심지어 성격도 자신이 더 좋은 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게, 아셀은 지난날 이미 유디트를 울린 전적이 있지 않았던가.

체이스의 눈에는 아직도 그날이 눈에 선했다. 날카로운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다시피하며, 유디트가 분노를 토해 내던 그날이.

정말로 화난 것처럼 보였었지. 착한 유디트를 그토록 화나게 만들 정도라면 그 녀석이 정말 몹쓸 잘못을 저지른 게 분명한데.

그런데도 염치도 없이 유디트의 앞에 나타나 몇 번이나 매달리고, 심지어 다른 약혼자가 있는 주제에 유디트에게 파트너 신청까지 하다니.

하지만 무엇보다 가슴이 아픈 것은, 자신은 그토록 냉정히 거절했던 유디트가 그 녀석의 요구만큼은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제게는 더 다가오지 말라고 거리를 두던 유디트가 그 녀석에게만큼은 많은 걸 용인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오랜 소꿉친구라고 했었지…….’

둘 사이에 함께한 세월이 그만큼 길기 때문일까.

서로 얼마나 가까웠던 건지는 몰라도, 만약 자신이 유디트를 뒤늦게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애초부터 한계가 정해져 있던 거라면.

그건 정말이지 너무나 억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 체이스가 감은 눈을 부릅떴다. 창밖을 내다보니 아까보다 날이 훨씬 어두워져 있는 게 보였다.

지금쯤이면 유디트도 기숙사로 돌아갔으려나? 아니면 아직 아셀 그 녀석과 함께 있으려나.

혹시나 만에 하나, 아셀이 또 몹쓸 짓을 해서 유디트를 울리고 있는 거라면?

그 생각을 하니 당장이라도 걱정이 되어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졌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보고 싶지 않은 마음과, 유디트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마음이 서로 충돌했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지난번 유디트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녀가 파혼하자고 선언했던 것이 떠올라서였다.

만약 또 눈앞에 나타난다면 이번에야말로 자신에게 완전히 질려 버리는 게 아닐까. 정말 끝이라면서…….

체이스가 마른세수를 하며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곧 유디트를 걱정하는 마음이 머릿속 가득한 우려를 지워 냈다.

그냥 슬쩍 멀리서 괜찮은지만 보고 오면 되지 않을까.

만약 유디트가 그 녀석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그대로 돌아오면 될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체이스는 곧 아무 옷이나 대충 주워 입고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후덥지근하던 여름밤의 공기는 가시고, 날씨가 제법 쌀쌀해져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걷던 체이스는 곧 많은 인파와 조우했다. 그 안에는 체이스도 아는 사람이 있었다.

“어, 체이스!”

주홍빛 머리카락에 눈동자를 지닌 로지에나 남매였다.

둘 다 기숙사 쪽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는지 체이스의 맞은편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불꽃놀이도 다 끝났는데.”

르데샤는 처음 만났을 때 제 눈치를 슬슬 보던 것과는 다르게, 이제는 퍽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 왔다.

“……그냥 산책 겸. 혹시 유디트 봤어?”

“아, 아까 파티 홀에서 만나긴 했는데……. 그 뒤로 각자 따로 놀아서 잘 모르겠어.”

르데샤가 어깨를 으쓱이자, 체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그럼”이라 말하며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그때 르데인이 붙잡듯이 말을 걸었다.

“아까 두 사람도 불꽃놀이 보러 간다고 했으니까, 정원 쪽에 있지 않을까요?”

그 말에 체이스가 재빨리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르데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여 보일 뿐이었다.

하여간 눈치가 귀신 같은 녀석이라니까.

“알려 줘서 고맙다.”

체이스는 손을 흔들어 보이며 다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말대로 모두 불꽃놀이를 보러 몰려나왔는지 앞으로 걸어갈수록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지나치는 사람들의 안면을 샅샅이 훑었지만 유디트의 분홍색 머리카락은 조금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아니면 정원 안으로 들어가 살펴야 하나? 하지만 그러면 밖으로 나오는 그녀와 엇갈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이스는 잠시 멈춰 선 채 고민했다.

‘아니면 아예 여자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목으로 가 볼까.’

결국 발길을 틀어 아까 로지에나 남매와 마주쳤던 곳으로 돌아 나오던 길이었다.

주위가 점차 한산해지더니, 문득 체이스의 시야에 누군가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평소와 다르게 틀어 올린 머리 모양과, 차려입은 모습이 무척 낯설었다.

하지만 달빛 아래 희끄무레하게 빛나는 저 머리카락은 분명 유디트의 것이었다.

“유…….”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을 뻔했지만, 아까 전 그녀의 눈에 띄지 말자고 결심한 게 생각나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는 모습이 보였다. 양 무릎에 얼굴까지 처박았다.

사위가 어두웠지만 힘없이 떨리는 어깨만은 뚜렷하게 보였다.

어째서 아셀은 그녀를 제대로 바래다 주지도 않고 어째서 저 상태로 혼자만 남겨 둔 거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모든 망설임이 사라지고, 어느새 체이스의 발은 그녀의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윽고 자신의 인기척을 눈치챈 유디트가 고개를 들었다.

걱정하던 대로 울고 있진 않았지만, 우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엉망인 얼굴이었다.

그것에 가슴이 더없이 아려 왔다.

“……체이스?”

떨리는 목소리로 제 이름을 뱉는 것에, 체이스는 아셀을 향한 원망을 간신히 참아 내며 말을 이었다.

“……왜 여기 주저앉아 있는 거야?”

머릿속에 두서없이 걱정의 말이 쏟아져 나왔지만, 정작 체이스의 입 밖에 나온 말은 고작 이런 것이었다.

역시나 그녀는 자신의 등장이 그다지 달갑진 않았는지, 곧 날카로운 투로 왜 왔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반응에 다소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솔직히 네가 괜찮아 보이면 아는 척하지 않고 지나치려고 했다.

네가 아셀 그 녀석과 함께하는 게 더 행복하다면 사실은 보내 줄 각오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에게 기대긴 싫다면서 이런 얼굴로 혼자 감정을 삭이고 있는 너를 보면, 어떻게 내가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칠 수 있냔 말이야.

“네가…… 또 울고 있진 않을까 걱정돼서.”

고르고 골라 말을 마친 순간, 유디트의 눈가에 빠르게 눈물이 고이는 것이 보였다. 곧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며 소리 없이 울음을 삼켰다.

그 모습을 보자 스스로가 참 바보처럼 느껴졌다.

아까는 눈치 없이 네 눈앞에 나타나 미움받는 건 아닐까 봐 그렇게 조마조마했는데, 막상 네가 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제 네게 미움받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그저 이 순간, 네가 어서 눈물을 그치기만을 바라게 됐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기며, 체이스가 애원하듯이 말했다.

“차라리 울어. 이렇게 힘들 땐 그냥 울어 버리는 게 나아.”

* * *

꾸벅꾸벅 졸던 한나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곧장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퀭한 눈으로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자지 않고 유디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유디트!”

성큼 걸어온 한나가 유디트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사정없이 앞뒤로 흔들었다.

“대체 뭐야? 왜 네가 약혼자인 체이스가 아니라 아셀과 함께 파티에 참석한 거냐구?”

“그, 그게…….”

“설마 체이스, 그 못된 놈이 너 혼자 파티에 가라고 그랬던 거야?”

한나가 와다다 말을 쏟아 냈다. 계속되는 맹렬한 기세의 말에 유디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어깨 위 한나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그런 거 아니야. 오히려 체이스가 내게 먼저 파티에 함께 참석하자고 제안했었는걸.”

“응?”

한나가 어깨를 흔들던 손을 멈추었다. 어지러운 시야에 유디트가 눈을 감았다가 뜰 때, 그녀가 의아한 듯이 중얼거렸다.

“체이스가…… 네게 먼저 파티 파트너 제안을 했다고? 그런데 너는 왜 아셀과 함께 파티에 참석했던 거야?”

“……아셀이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해 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어.”

“그러면 아셀은 왜 그랬대? 걔도 약혼녀가 있잖아.”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던 유디트는 대충 얼버무렸다.

“내가 아셀의 가장 소중한 친구라서 마지막 파티를 같이 즐기고 싶었나 봐. 졸업을 하면 나랑 아셀은 보기 힘들어질 테니까 말이야.”

“아하, 그것도 그러네.”

한나는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반면 졸업을 하면 리아나와 아셀은 결혼을 할 테니 앞으로 평생 볼 사이니까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너에게 파트너 제안을 한 건가 보다.”

“……응, 그런가 봐.”

아셀에 대한 짝사랑을 접기 전이었다면 마음이 아팠을 테지만 지금은 꽤 괜찮았다. 아직 완전히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견딜 만했다.

지금 유디트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시간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언젠간 언제 아팠냐는 듯이 멀쩡해질 테다.

게다가 체이스가 곁에서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조금 더 수월하게 아픔이 가실 거야.

이제 더는 체이스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기로 했다.

그의 마음이 그렇게 확고하다면, 유디트 또한 그와의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하면 될 일이었으니 말이다.

체이스의 도움을 받아 아셀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 내기. 기한은 졸업 직전까지.

반드시 완수해야만 할, 유디트의 새로운 목표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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