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6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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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파티로 인해 활력을 띠었던 아카데미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날씨도 완전한 가을에 접어들었고 일상으로 돌아온 학생들은 시험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그것은 유디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유디트는 어느 때보다 열심히 회계학 시험을 준비했다.
사실 자신의 시험공부 때문에 바쁜 것이 아니라 것이 아니라, 회계학 보충반 친구들의 성적을 끌어올릴 비법 노트를 만드느라 혈안이었다.
덕분에 유디트는 교과서와 참고 교재, 보충 자료를 읽고 정리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하는데,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기숙사 방은 한나가 잠을 자야 해서 불을 늦게까지 킬 수 없었고 도서관은 학생들이 유디트에게 시시때때로 질문을 던져 오곤 해서 곤란했다.
이런저런 궁리를 하던 유디트의 머릿속에 문득 카렐 교수가 수습 교수로 일하라며 마련해 줬던 공간이 떠올랐다.
어차피 교수님은 수업이 끝난 뒤에는 보통 자택으로 바로 돌아가시니까 괜찮을 거야.
결국 유디트는 늦은 시각, 카렐 교수의 연구실로 찾아가고 말았다. 안을 살피니 다행히 인기척 없이 고요했다.
조심스레 불을 켠 뒤 책상 앞에 앉자 매우 편안하고 좋았다.
주변은 고요한 데다, 다양한 수업 자료를 늘어놓기 좋을 만큼 자리가 넓었고, 못 보던 책꽂이까지 위에 올려져 있었다.
딱 지금의 상황에 안성맞춤이었다.
유디트는 책꽂이에 가져온 자료들을 꽂아 둔 뒤 하나하나 필요한 것을 끄집어내 가며 노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정신없이 일에 골몰하고 있을 때,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벌컥 문이 열렸다.
“……유디트? 여기서 뭐 하는 거냐?”
놀란 유디트가 숨을 들이키며 몸을 굳혔다.
이 시간에 카렐 교수님이 대체 웬일이시지?
“저…… 그게.”
“손에 든 그건 뭐냐?”
사색이 된 유디트는 머뭇거리다 결국 사실대로 실토하고 말았다.
“보충반 친구들을 위해 회계학 시험에 나올 만한 문제들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눈썹을 삐뚜름하게 올린 채 인상을 쓰던 카렐 교수가 곧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곤 휙 하니 유디트가 손에 들고 있던 노트를 가볍게 빼앗아 갔다.
카렐 교수가 매의 눈을 한 채 노트를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가끔 탄식을 내뱉거나 손등으로 이마를 짚거나 했다.
“유디트, 너는 정말……”
카렐 교수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혀를 쯧쯧 찼다.
“이 노트로 제대로 공부만 한다면 정말 만 점도 어렵지 않겠구나. 놀랍구나, 놀라워. 당장 돈을 주고 팔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야.”
작게 감탄하던 카렐 교수의 시선이 이내 유디트를 향했다. 그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곧 의미심장한 투로 말했다.
“너는 정말 이십 년 전의 나를 빼다 박았구나. 내가 아카데미에 재학할 적이랑 똑 닮았어.”
“……!”
……이건 칭찬인 걸까?
유디트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침묵을 지키는 사이, 카렐 교수의 눈이 어지러이 수업 자료들이 널려진 책상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이내 책꽂이를 사용한 흔적을 보곤 흐뭇하게 웃었다.
“이건 사 둔 지 얼마 안 된 것인데 벌써 잘 쓰고 있구나. 어떠냐?”
“아, 네. 편합니다.”
얼떨결에 대답을 한 순간, 뭔가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간다는 예감이 들었다.
카렐 교수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더욱 진해졌기 때문이었다.
“역시. 이런 완벽한 환경에서 일을 하니 능률도 올라가고 좋지?”
“그건 그렇지만…….”
“그거 아느냐? 수습 교수로 일하다 실력을 인정받으면 나중엔 정식 교수가 되어 개인 연구실도 꾸릴 수 있게 된단다. 그땐 지원비도 따로 나오게 되지.”
“……아.”
그 말에 유디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러자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카렐 교수가 수습 교수가 아카데미에서 받는 복지와 혜택, 급여에 관한 설명을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명예직인 데다 고위 귀족들도 다닐 만큼 전통 있는 학교이니만큼 대우가 좋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하지만 얘기를 들어 보니 솔직히 유디트가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비록 아셀이 제안했었던 분에 넘치는 보수만큼은 못 했어도 여자 혼자 평생을 꾸리고 살아가기엔 부족함이 없는 환경이랄까.
또 최근 정말 자신이 누군가를 가르치는 데 제법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터라 살짝 혹하고 말았다.
만약 페델리안 부인의 명령만 없었더라면, 그리고 직속 상사가 카렐 교수인 점만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수락하고 싶을 만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유디트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체이스와 약혼을 이어 가기로 굳게 맹세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 애를 배신할 셈이야?
간신히 마음을 다잡은 유디트가 미안함을 담은 표정으로 카렐 교수를 올려다보았다.
“저…… 정말 죄송해요, 교수님. 지금까지 정말 절 많이 신경 써 주시고 아껴 주신단 걸 느꼈지만……. ”
그녀가 머뭇거리며 사정을 설명했다.
“체이스와의 약혼을 깰 생각은 없어요. 이대로라면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하게 될 텐데 그러면 교수직은 아무래도…….”
그 말에 카렐 교수의 낯빛이 굳어지더니, 이내 목소리를 내리깔며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전적으로 네 의사가 맞느냐?”
그가 인상을 쓴 채 말을 이었다.
“아니면 그 녀석이 그렇게 강제하든? 졸업과 동시에 집에서 살림이나 하라고?”
“……아니요! 체이스는…….”
유디트가 무어라 변명하려 했지만, 이미 노기에 찬 카렐 교수는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얼마 전에 참관 수업에서 보니 그 녀석과 꽤 데면데면해 보이던데. 그 단순무식한 녀석이 널 괴롭게만 하는 것 아니냐?”
그는 무언가에 열에 받친 듯 끊임없이 불만을 토해 냈다.
“만약 그런 거라면 결혼 생활도 불행할 게 뻔하지 않느냐, 유디트. 네가 교수직에 관심이 없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만약 그 녀석이 네 의사는 조금도 고려하고 있지 않는 거라면…….”
말끝을 흐린 그가 느닷없이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그러더니 이내 한결 잦아든 어조로 덧붙이듯 말했다.
“솔직히 말하마. 네가 회계학에 관심이 없는 거라면 이해하겠다. 넌 다른 과목들에도 충분히 재능이 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얼마 전 수업을 할 때 보니 꽤 열의가 있어 보이던데, 그건 너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조금이라도 흥미를 느꼈다는 얘기가 아니냐?”
“…….”
“그런데 고작 결혼 때문에 이런 좋은 기회를 포기하겠다고? 물론 지금에야 결혼이 굉장히 중요한 일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인생에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란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위한 일이 하나쯤은 꼭 필요해.”
마치 자신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카렐 교수의 말에, 유디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뭐라고 다시 거절의 말을 드려야 할까.
하지만 솔직히…… 카렐 교수님의 말이 옳다고 느껴졌다.
결국 그녀가 머뭇거리며 입술을 뗐다.
“회계학이 싫은 건 아니에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재미있었고요.”
“그럼 대체 왜 거절하는 거냐? 역시 체이스 때문이야?”
“아뇨! 교수님께서 오해하신 것처럼 체이스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오히려 제게는 무척 과분한 사람이에요. 그럼에도 제가 교수님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건-.”
유디트가 카렐 교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솔직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체이스와는 정략결혼을 한 사이라, 카르단디 가문에 허락을 구하지 않고서 저 혼자 결정을 내리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에요.”
“…….”
“그것에 관해 자세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그쪽 집안에서는 아마 기사가 될 체이스를 제가 내조해 주길 바라고 있을 텐데…….”
그녀가 말을 마쳤지만 카렐 교수에게선 어떠한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무언가를 깊이 고민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뿜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카렐 교수가 다시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체이스와 약혼을 깰 마음은 없단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네가 마음에 걸리는 일은 방금 말한 그것뿐이고?”
“네.”
“알았다.”
“네?”
“납득했다는 말이다. 유디트 네가 수습 교수가 될 수 없는 이유.”
어째 대답이 너무 순순하셔서 유디트는 순간 얼이 빠지고 말았다. 지금까지 꽤 끈질기게 제안해 온 것치곤, 너무 깔끔한 마무리이지 않나.
“뭐, 일단은 바빠 보이니 나도 더 방해하진 않으마. 너무 늦지 않게 돌아가거라.”
“……네.”
간단히 인사를 마친 카렐 교수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더니, 이내 들어왔을 때처럼 벌컥 연구실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순식간에 유디트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빛이 떠올랐다.
과연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신 게 맞나……? 오히려 표정이 좀 밝아지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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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유디트는 다음 회계학 보충반 수업이 도래하기 전, 늦지 않게 시험을 대비한 교재와 노트를 완성해 냈다.
이를 학생들에게 나눠 주자 그들 모두 놀란 얼굴로 감사를 표했다.
이상하게 깃털로 간지럽혀진 것처럼 기분이 간질간질했지만, 유디트는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정말 수습 교수가 될 것도 아닌데 쓸데없는 감상일 뿐이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