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71화
방금 한나가 뭐라고 말했지?
유디트는 멍하니 선 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곧 현실이란 걸 인지하고 나니, 갑자기 머릿속의 피가 모두 빠져나가고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빈혈처럼 도지는 어지러움에 유디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한나가 화들짝 놀라 유디트의 두 손을 잡곤 그녀가 혹여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해 주었다.
“유디트, 많이 놀랐지? 네가 이럴까 봐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한나의 부축에 유디트는 겨우 중심을 잡았다. 잠시 후, 두 눈을 뜬 그녀가 물었다.
“……있잖아, 한나. 혹시 누가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 거야?”
“글쎄…… 나도 알음알음 들은 거라서 정확한 소문의 출처는 모르겠어. 하지만 너무 신경 쓰지 마.”
한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아카데미에서는 헛소문이 많이 돌잖아? 특히 지금 같은 시험 기간에는 학생들이 스트레스가 많아서 더 그럴 거야.”
“…….”
“근거 없는 소문은 쉽게 사그라지기 마련이니까, 시간이 금방 해결해 주겠지. 애초에 증거도 없는 상황이라 애들도 금방 잊을 테고.”
유디트의 입장에서는 근거 없는 소문이 아니었기에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 그날 아셀과 입맞춤한 걸 지켜본 사람이 있는 걸까? 만약 목격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영상구에 그 상황을 녹화하기라도 했다면…….
불길한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유디트의 불길한 상상은 어느새 모든 사실이 밝혀져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비난을 한 몸에 받는 상황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그렇게 되면 체이스의 얼굴은 앞으로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분명 내게 오만정이 다 떨어지게 될 텐데.
아무리 그가 자비로운 사람이라 해도 이런 상황에까지 자비롭게 굴지는 못할 것 같았다.
‘유디트, 소문 사실이야? 네가 아셀과…….’
‘그, 그게…….’
‘……정말 실망이다. 나는 최소한 네가 신의는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전부 내 착각이었구나.’
‘……’
‘기대한 내가 바보였어. 우리 관계도 이대로 끝내도록 하자.’
이윽고 체이스가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다, 떠나가는 모습을 상상한 유디트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고작 상상에 불과했지만, 가시에 찔린 듯 심장이 따끔거리고 아파 왔다.
정말 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네게 실망만 주는구나, 싶어서.
그런데 유디트의 심각한 얼굴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한나는 그녀를 꼬옥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물론 내가 이렇게 말을 한다 한들 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겠지만…… 적어도 너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소문이 헛소문이란 걸 바로 알아챌걸? 너는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할 사람이 아니니까 말이야.”
한나가 위로랍시고 말을 건넬수록 유디트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나는 그런 그녀를 굳게 믿는 눈치였다.
“네가 약혼자를 두고 다른 사람과 키스를 하다니, 말이 안 되잖아. 그것도 약혼녀가 있는 남자랑 말이야.”
“그치, 말이 안 되지. 약혼자가 있는 상태에서, 약혼녀가 있는 다른 남자랑 키스를 하다니…….”
그런데 한나, 사실 내가 그런 말이 안 되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어.
유디트는 결코 입 밖으로는 내뱉을 수 없는 고백을 속으로 읊조렸다.
* * *
혼란스러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다스리기 위하여 평소보다 일찍 침대 위에 누웠다.
어떻게든 잠들어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눈을 감고 양을 세 보기도 하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유디트는 결국 밤새 고통스러운 생각에 시달리며 한숨도 자지 못했다.
짹짹-.
경쾌한 새 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아침이 밝아 왔다.
한나는 일어나자마자 눈가가 퀭해진 유디트를 보고 기겁을 했다.
“아니, 유디트! 설마 밤을 새운 거야?”
“으음, 어쩌다 보니…….”
“어제 얘기한 소문 때문에 그래? 너무 그렇게 신경 쓰지 마. 괜찮다니까? 네가 무시하고 다니면 학생들도 재미가 없어서 금방 사그라질 거야.”
“……과연 그럴까?”
“응, 그리고 괜히 힘들어하는 반응 보이지 마. 분명 소문을 낸 사람은 네 그런 반응을 보고 싶어서 악의적인 소문을 낸 것일 테니까 말이야.”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자신을 싫어하는 누군가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신을 골탕 먹일 목적으로 헛소문을 낸 것일 뿐이라고.
그래서 한나의 말처럼 소문이 금방 사그라들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유디트의 바람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첫 수업을 가는 내내 자신을 지나치는 학생들에게서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그들은 유디트를 바라보며 곁에 있는 친구와 작게 수군거리기도 했다.
한나는 별일이 아닐 거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예상은 틀렸다.
모두가 아카데미의 유명인인 아셀의 추문을 흥미롭게 여기는 기색이었다.
게다가 하필 그 상대는 오래전부터 구설수에 나돌았던 유디트였으니 입방아를 찧는 데 더 거리낄 게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여름 파티 날, 아셀이 약혼자가 아닌 유디트와 함께 등장했던 것에 의구심을 가지던 몇몇 학생들이 있었다.
그런 학생들이 지금의 소문을 듣게 된다면 의심의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지 않을까.
때마침 오늘은 아셀이나 체이스와 마주칠 일이 없어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불행이라 해야 할지.
상념에 빠진 채로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해 있었다.
유디트가 첫 수업을 듣기 위해 교실 안에 나타난 순간, 복도까지 울려 퍼지던 소음이 일시에 멎었다.
학생들은 그녀의 등장에 힐끔힐끔 돌아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얼마 안 가 목소리를 낮추어 작게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화는 고요해진 실내에서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그거 알아? 오늘 아침에 내 친구가 아셀한테 직접 물어봤대. 근데 그냥 웃어넘기기만 할 뿐 정확한 대답을 안 하더라는 거야.”
“뭐어? 정말로?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인 거야?”
“글쎄, 만약 사실이 아니더라도 약혼자가 있는데 그런 미적지근한 태도를 취하는 것부터 좀 수상하지 않아?”
“그러게. 왜 아셀은 헛소문이라고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았을까.”
“그거야…….”
소곤소곤.
말을 잇는 아이들의 시선이 따갑게 이어졌지만, 더 이상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듣지 않아도 이어질 말은 대강 예상할 수 있었다.
“그거야 뭔가 찔리는 게 있으니 부정하지 못한 거겠지.”
하아.
유디트는 깊은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겨우 삼켜냈다.
아셀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 그쪽도 약혼자가 있어 곤란한 상황이긴 마찬가지일 텐데 부정하질 않았다니.
그렇게 모호한 태도를 보일수록 활활 타오르고 있는 이 소문에 더욱 부채질하는 꼴이라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설마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복수를 하려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무리 아셀과 유디트가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고 해도, 학생들은 감히 그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내거나 조롱하진 못할 테니.
이런 수모를 겪는 것은 오로지 유디트, 혼자일 테니까 말이다.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유디트는 멀거니 책상만 내려다보며 어서 수업이 시작해 사람들의 관심이 제게서 멀어지기만을 바랐다.
* * *
한편 교내를 한창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 아셀 페델리안은 학생회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이곳은 회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학생회장의 허락을 받아야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아도 되는 그만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누군가 적막을 깨고 방문을 노크해 왔다.
똑똑똑-.
아셀은 줄곧 낯선 이의 방문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 주었다.
문 앞에는 탐스러운 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서 있었다. 바로 그의 약혼녀인 리아나 제르니아스였다.
“…….”
리아나가 살가운 인사 없이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자, 아셀은 그녀가 편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묵묵히 자리에서 비켜섰다.
이내 그녀가 완전히 안에 들어온 걸 확인한 아셀은 문을 굳게 잠근 후, 그녀를 소파 쪽으로 이끌었다.
그 위에 털썩 주저앉은 리아나가 이내 입을 열었다.
“이제 어쩔 셈이야?”
“……소문 들었구나.”
아셀의 표정에 금세 씁쓸함이 감돌았다.
“당연하지. 오늘 아침에 내 친구들이 다 몰려와서 무슨 일인지 물어봤다고.”
리아나는 평소와 다르게 쌀쌀맞은 말투였다. 아셀도 면목이 없었는지 푹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조심을 했어야 하는데 설마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은……. 하지만 입막음은 했으니 네가 더 곤란할 일은 없을 거야.”
그 말에 리아나가 잠시 눈을 깜빡거리다 다시 따지듯 물었다.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이었어?”
그녀의 질문에 아셀이 대답 없이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뭐야, 유디트랑 설마…… 사귀기로 한 거야?”
아셀은 그녀의 말에 더더욱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직 그런 건 아냐.”
“……그럼 사귀지도 않는데 키스를 했다고?”
“어쩌다 보니.”
어깨를 으쓱이던 아셀이 갑자기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리아나. 아무래도 이참에 파혼을 해야 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