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72화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스치고 지나갔다. 입술만 벙긋거리던 리아나가 이내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가문 어른들께 뭐라고 말씀드릴지 아직 결정하지도 못했는데?”
“그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할게. 너한테는 피해 안 가도록.”
“……어떻게 하려고?”
그녀의 질문에 아셀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따로 마음에 품은 사람이 있어서 어렵다고 말하려고.”
그 말에 리아나는 더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넌 유디트랑 그런 관계 아니라며?”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런데?”
“알고 보니 유디트가 나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아.”
“……하아.”
아셀의 말을 들은 리아나가 인상을 찡그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잠시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던 그녀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럼 너도 거기에 응해 주고 싶어진 거고?”
“그렇다고 봐야지.”
“그래…… 결국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마음을 깨달았다니, 어쩔 수 없지. 내가 양보할게.”
리아나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한 말에, 아셀이 잠시 멈칫했다. 곧 그가 천천히 시선을 들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긴, 네가 들은 그대로야. 내가 양보해 주겠다고.”
“…….”
“아셀, 너는 나랑 약혼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거야. 아무리 마음에도 없는 관계라 해도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이렇게 순순히 넘어가 주진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리아나가 덧붙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셀은 여전히 의아한 얼굴이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가 입술을 뗐다.
“리아나, 내가 착각하는 게 아니라면 지금 네가 하는 말들은 너는 나와 유디트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리아나는 숨길 것 없다는 듯이 쉽게 긍정의 말을 내뱉었다.
“응, 그래.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
충격으로 인해 딱딱하게 굳어진 아셀을 바라보며, 그녀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 하지만 굳이 내가 너희들의 사랑을 이어 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말을 아꼈던 것뿐이야.”
“……그런데도 용케 나와 약혼을 결심했구나.”
아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하자, 리아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쩔 수 없지. 너만 한 신분을 가진 데다 내게 귀찮게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찾기 힘들거든. 어쨌건 내내 모른 척해서 미안해.”
리아나가 예전부터 제 마음을 알고 있었다는 예상 밖의 사실에 잠깐 당황해하던 아셀은, 이내 다시 침착한 평상시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혹시 한 가지 더 물어봐도 괜찮을까?”
“물어봐.”
리아나는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셀은 그녀의 눈을 관찰하듯 빤히 응시하며 말했다.
“그럼 넌 유디트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유디트와 그리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잠깐 말을 멈칫했던 아셀이 이어 말했다.
“그리고 내가 유디트를 좋아한다는 건, 나조차도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는데 어떻게 나보다 네가 먼저 파악한 거지?”
“그게 궁금했어?”
리아나는 픽 웃음을 흘리더니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그건 그냥 보다 보니 알았어.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모르는 게 더 바보 같은 게 아니야? 그도 그럴 게, 나와 함께 있을 때도 네 시선은 항상 유디트를 향했고, 유디트 또한 은근슬쩍 너를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말이야.”
“…….”
“그동안 애써 모르는 척하느라 나도 꽤 힘들었어. 그래도 이걸 계기로 이젠 눈치 없는 척하지 않아도 돼서 속이 다 후련하다.”
그렇게 말한 리아나는 지금까지 두 사람 다 서로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은 게 용하다며 덧붙였다.
리아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아셀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랬구나. 다 알면서도 이해해 주고 받아들여 주다니, 이 감사를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뭐, 그렇게까지 네가 고마워해야 할 일을 한 건 아니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그저 내 이득을 채우려고 했을 뿐이니까.”
“우선 네 입장이 곤란하지 않도록 제르니아스 가문에는 내가 편지를 보내도록 할게.”
“그래, 아셀. 우리 가문뿐만 아니라 네 가문에도 잘 설명해야 한 거야.”
리아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너 지금까지 별다른 문제 한번 일으키지 않다가 이번에 사고 한번 거하게 치는구나. 페델리안 부인께서도 이 소식을 접한다면 깜짝 놀라시겠다.”
“……그렇지, 어머니께서 많이 놀라시겠지. 내가 잘 말씀드려 봐야지.”
아셀은 뭔가를 고민하는 듯 잠시 수심에 잠겼다. 하지만 리아나가 활기차게 말을 건네는 바람에 그 모습은 금방 깨어졌다.
“어쨌든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모쪼록 잘 해결되길 바랄게. 유디트와도 네가 좋은 관계로 발전했으면 좋겠어.”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가능성 있어. 어차피 체이스와 유디트도 정략적으로 맺어진 약혼 관계니, 네가 노력한다면 끼어들 틈은 분명히 존재할 테니까.”
그렇게 리아나가 아셀의 사랑을 응원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길고 길었던 그들의 대화가 끝났다.
리아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학생회장실을 나왔다.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복도를 걸으며 생각에 빠졌다.
흐음, 그런데 이상하네. 아셀은 왜 소문에 관해서 적극적으로 부인하지 않은 걸까?
증거에 대해서는 미리 입막음을 해 두었다지만, 그래도 유디트를 아끼는 만큼 그녀가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건 막아 줘야 하지 않나?
마치, 그 소문을 일부러 키우려는 사람처럼 말이다.
“뭐, 말도 안 되는 가정일 뿐이지.”
리아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상상을 고개를 저어 떨쳐 냈다.
아셀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던 것은 그저 너무 당황했기 때문일 거라며.
아무리 페델리안가의 차기 공작이자 아카데미의 유명인인 아셀이라지만, 그런 소문이 났는데 평정을 유지하긴 어려웠을 테니까.
그렇게 결론을 내린 리아나는 이내 후련한 마음이 되었다.
이제 더는 아셀과의 결혼을 피하기 위해 졸업을 미룰 필요도, 그의 약혼자로서 불려 다닐 일도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일이 더욱 기대되기 시작했다. 아셀이 자신과 약혼을 깼다는 사실을 다른 학생들이 알게 된다면 얼마나 더 아카데미가 떠들썩해질까.
기숙사로 돌아가는 리아나의 발걸음은 마치 깃털처럼 가벼웠다.
* * *
결론적으로 그날, 아셀은 책상에 앉아 페델리안가와 제르니아스 가문에 보낼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자신이 행실을 똑바로 하지 못해 아카데미에 이러한 추문이 번졌고, 이를 책임지기 위해 리아나와 파혼을 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탁, 편지를 모두 작성한 아셀이 손에 들고 있던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편지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그는 상념에 빠졌다.
이제 이 편지만 보낸다면 리아나와의 관계도 모두 정리될 테다. 어쩌면 이미 오래전부터 이랬어야 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애초에 리아나와 약혼을 하지 않았어야만 했다. 유디트의 약혼을 막기 위해서 너무 성급히 리아나와의 약혼을 결정했다.
그로 인해 유디트가 받았을 상처를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사실 약혼을 성급하게 결정하게 된 데에는 그의 어머니인 페델리안 부인이 크게 일조했다.
가뜩이나 어릴 때부터 아셀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하곤 했었던 그녀였다.
‘어쩜, 유디트와 넌 정말이지 한 쌍의 남매 같구나. 딸이 하나 더 생긴 기분이야.’
‘아카데미를 함께 가겠다고? 하지만 유디트는…… 그래, 어릴 때부터 동고동락했으니 그 마음은 이해한단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 나설 땐 오해받지 않게 조심하렴. 너희 입장에서야 가족이고 친구라고 해도, 남들이 보기엔 그렇지 않을 테니.’
‘아셀,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유디트를 이성으로 보아선 안 된단다. 그러다 오랫동안 함께한 관계를 망가뜨릴 생각은 아니겠지?’
‘명심해라, 아셀. 너는 가문을 위해서라도 나중에 좋은 가문의 아가씨와 결혼해야 한단 걸.’
그러던 어머니가, 점차 자신이 약혼을 미루는 기색을 보일수록 유디트의 약혼을 들먹이며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너와 유디트 둘 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내 꿈이란다. 그러니 슬슬 혼처를 정해야 하지 않니.’
그대로 미적거렸다간 정말 어머니가 유디트를 아무나와 약혼시켜 버릴까 두려웠다. 그래서 애써 태연한 척 연기했다.
‘리아나는 성격도 좋고 같은 학교 친구고 하니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애와 약혼하겠어요, 어머니.’
그리고 그런 자신의 결정에 어머니는 뛸 듯이 기뻐하셨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머니의 말씀들은 거의 세뇌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아셀이 스스로의 마음을 파악하는 데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오류를 이제는 바로잡아야 했다.
아셀이 소문에 관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잖아도 벌써 여러 차례 유디트에게 실수를 저질러 온 자신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이 이미 돌아섰대도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유디트와 자신의 소문에 부채질을 한다면, 아무리 정략적인 관계라 해도 유디트와 체이스 사이에 흠집을 낼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소문을 아카데미 전체에 퍼트린 것이다.
엉망으로 맺어진 거짓된 관계를 모두 끊어 내고, 처음부터 너와 나, 우리 단둘이 원래의 홀가분한 관계로 돌아갈 수 있도록.
어쨌건 이번 일에까지 제법 힘을 써 준 세드릭에게는 따로 감사를 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이지 그의 노고가 많았다.
먼 옛날부터 자신은 이런 결말을 원했던 건지도 몰랐다. 엇갈린 모든 퍼즐이 도로 맞춰지는 이런 결말을.
아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내일, 유디트에게 다시 말을 걸어 볼 것이다.
설령 그녀가 아직 자신에게 화가 나 있더래도, 소문이 신경 쓰이는 이상 이런 자신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진 못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