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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73화 (73/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73화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들 줄 알았던 소문은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거세지기만 할 뿐이었다. 마치 장작을 태우는 모닥불처럼.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오랜만에 접한 이 가십거리가 몹시 흥미로운 모양인지, 유디트가 보이기만 하면 소문에 대해 떠들어 댔다.

어느덧 이틀 후, 피하고만 싶었던 회계학 수업 시간에 이르렀다.

마음을 굳게 먹은 채 교실로 들어선 유디트는 평소와 같이 앉은 채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학생 두 명과 시선이 마주쳤다.

르데샤는 자신을 보자마자 살짝 놀라는 눈치였고, 체이스는 반갑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

설마하니 아직 체이스는 소문에 대해 듣지 못한 걸까? 그런 거라면 다행이겠지만…….

유디트는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다른 시선들을 무시한 채 두 사람이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언제나처럼 그들이 비워 둔 가운데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은 유디트가 의자를 당겨 앉으며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모두 안녕.”

“안녕, 유디트.”

“그때 외출하고 나서 오랜만인 것 같네.”

르데샤는 자신의 안색이 괜찮은지 살피는 듯했고, 체이스는 지난 데이트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태도였다.

이에 유디트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꾸했다.

“으응, 요즘 시험 기간이다 보니 공부하느라 바빠서…….”

그렇게 말하며 체이스의 얼굴을 다시 살폈지만, 그의 낯빛은 평상시와 같아 보였다.

소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체이스는 원체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편이었지.

지금처럼 그의 무관심한 기질이 다행이라고 생각된 적이 없었다. 유디트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으로는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유디트의 약혼자인 그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무관했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설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때 체이스가 무언가 불만이라는 듯, 입을 뚱하니 내밀며 입을 열었다.

“바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점심 정도는 같이할 수 있잖아.”

아무래도 요 며칠 유디트와 만나지 못한 것이 그에게는 꽤 섭섭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상념에 빠졌던 것도 잠시, 그의 말을 듣자마자 어쩐지 얼굴에 열이 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점심을 먹자고 제안할 수도 없었다.

식당에만 가면 학생들의 모든 시선이 쏠리게 될 게 분명했으니.

유디트는 애써 침착한 척 헛기침을 하며 제안했다.

“아니면 시험 기간이니 같이 공부를 하는 건 어떨까. 도서관은 시끄러울 것 같으니 자습실 자리를 빌려서……?”

“오, 나도 자습실 자주 이용해. 유디트.”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르데샤가 반갑다는 듯 대화에 툭 끼어들었다.

“요즘 르데인도 함께 드나들고 있는데, 이참에 넷이서 같이 공부할래?”

수업이 끝난 오후마다 함께 가는 건 어떻겠냐며 그녀가 빙긋 웃으며 제안해 온 순간이었다.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유디트가 그러자고 대답하려던 찰나, 체이스가 딱 잘라 말했다.

“안 돼.”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이에 잠시 멍하니 있던 르데샤가 앙칼진 목소리로 물었다.

“왜?”

“너네 남매가 자꾸 잊어 버리는 것 같아서 알려 주는데, 우리 약혼한 사이거든.”

체이스는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듯한 어조로 인상을 쓴 채 말을 이었다.

“그러니 단둘이 시간 보낼 때 자꾸 사사건건 끼어들지 말란 말이야.”

그 말을 들은 르데샤의 표정이 괴상한 것을 본다는 듯 바뀌어 있었다.

떨리는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그녀가 이내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외쳤다.

“그러고 보니 저번부터 분위기 이상했는데…… 너네 혹시 사귀기 시작한 거야?”

아까부터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묘하게 커지고 있어서 유디트는 입술만 깨문 채 상황을 관찰했다.

그런 그녀를 힐끔 바라본 체이스가 이내 시원스레 대꾸했다.

“곧 결혼할 사인데 당연한 거 아닌가? 당연히 서로 진지하게 교제 중이지.”

곧 르데샤의 시선이 사실이냐는 듯 유디트에게로 돌아갔다.

흥미진진하게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잠시 눈길을 주던 유디트가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 응. 체이스 말이 맞아.”

“난 결혼해서도 둘은 그냥 친구처럼 지낼 줄 알았는데…….”

대답을 듣고 어쩐지 서운하다는 듯 르데샤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이내 무슨 생각이 든 건지 안심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그럼 그렇지. 역시 그 얘기들은 다 헛소문이었구나. 유디트가 그럴 리가 없지.”

“…….”

그 말이 르데샤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등골이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아아, 이걸로 틀렸어. 이제 체이스도 다 알아차리게 될 게 뻔해.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유디트는 삐거덕거리며 고개를 돌려 체이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왜 그러냐는 듯 눈을 크게 뜨며 그녀를 가만 내려다보기만 할 뿐, 르데샤의 말에 대해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아직도 눈치를 못 챈 걸까?

유디트가 아무 말도 없이 그를 계속 빤히 바라보기만 하자, 멋쩍은 듯 눈을 굴리던 체이스가 이내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나한테 관심 갖는 것은 좋은데 유디트, 이제 그만 수업에 집중해야 할 시간이야.”

손짓으로 교실 앞쪽을 가리킨 체이스가 이내 앞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카렐 교수가 교실로 걸어 들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204페이지부터 펼치거라.”

어떤 불필요한 말 없이 바로 수업에 돌입하는 태도는 여전했다.

카렐 교수의 말에 따라 얌전히 책을 펼치면서도 유디트의 마음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체이스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소문에 대해 알고 있는 걸까, 알면서도 내가 불편해할까 봐 일부러 언급하지 않고 있는 걸까.

그때 문득 머릿속에 조금 전 체이스가 유난히 자신과의 관계를 과시하며 목소릴 높였던 것이 떠올랐다.

“…….”

이내 유디트는 조심스럽게 눈동자를 굴려 제 옆에 앉아있는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왜 자꾸 봐?”

유디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눈이 관자놀이 쪽에 달린 것도 아닌데 어떻게 내 시선을 알아차린 거지?

하지만 체이스는 수업이 따분한지 작은 하품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카렐 교수님께서 뭔가 적으시는데, 너 저거 필기 노트에 따라 적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 응. 알려 줘서 고마워.”

“네가 수업에 집중을 못 할 때도 있다니, 별일이네.”

유디트는 황급히 펜을 쥐고 필기하기 시작했다.

손은 칠판에 빼곡한 공식을 따라 적느라 바삐 움직이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혹시 체이스가 내가 먼저 소문에 관해 말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라면…….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치미는 한숨을 겨우 삼켜 내며, 유디트는 이내 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역시 체이스한테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좋겠어.

그것만이 그에게 받은 신의를 보답하는 길이었다. 또한 그를 위해서, 소문이 이 이상 퍼지지 않도록 해결을 해야 했다.

아셀에게 나랑 넌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니, 나서서 제대로 부인해 달라고 단호하게 말을 해 둬야지.

한나는 그냥 내버려 두면 잠잠해질 것이라고 말했지만, 당사자들이 입을 다물수록 오히려 오해를 살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을 마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져, 유디트는 다시 편안하게 수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 * *

수업이 끝나고 바깥으로 걸어 나오며 르데샤가 크게 기지개를 폈다.

“아, 시험 전이라 그런지 몸이 너무 뻐근하네. 유디트, 다음 수업 없지? 나랑 운동 겸 산책 좀 하러 갈래?”

그녀의 제안에 유디트가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미안, 르데샤.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체이스랑 좀 할 말이 있어서.”

“……나?”

자신의 말에 체이스가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되물었다.

“응, 혹시 바빠?”

놀란 듯 눈을 깜빡이던 체이스가 이내 기쁜 듯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아니, 시간 많아.”

그 환한 얼굴을 보니 살짝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정한 일은 해야 했기에 유디트는 르데샤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체이스와 함께 정원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위를 올려다보니 가을 하늘이 무척 화창했다. 바람도 선선하니 야외에서 활동하기 딱 좋은 날이었다.

“하필 이런 시기에 시험 기간이라니.”

체이스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중얼거렸다.

“……시험 준비는 잘 되어 가?”

그를 슬쩍 올려다보며 묻자, 체이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게…… 열심히는 하려고 하고 있지만. 이번에도 낙제해서 졸업이 유예될까 봐 좀 불안하긴 해.”

그런 그의 말간 얼굴을 마주 보기가 다소 힘들어, 유디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동안 열심히 노력했으니까…… 분명 좋은 결과 나올 거야. 요즘에 성적도 많이 올랐잖아? 출석도 빠짐없이 챙겼고…….”

그 뒤로도 왠지 용기가 나지 않았던 유디트가 두서없이 체이스의 칭찬을 늘어놓자, 잠시 그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

“유디트, 그런 칭찬은 내 얼굴 보고 해 줘야지.”

그 말을 들으니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혹시 너무 어색한 태도를 취했나 싶어 다시 고개를 드니, 체이스가 웃음기를 머금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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