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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74화 (74/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74화

유디트의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슬쩍 넘겨 주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아까 수업 때는 잘만 쳐다보더니 이번엔 왜 시선을 피하는 거야.”

“……그게.”

그의 다정한 태도와 어조에 유디트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이렇게 질질 끌수록 더 고백하기 어려울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자신을 향한 그의 조심스런 태도나 다정한 눈빛이 사그라들까 봐.

다시는 제게 전과 같은 태도를 보여 주지 못할까 봐.

그리고 이대로 제게서 돌아서게 될까 봐 못 견디게 불안하고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제야 유디트는 깨달았다.

나…… 생각보다 체이스에게 의지하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오히려 결심이 섰다.

체이스에게 사실대로 고백해야 한다는 생각에 입술이 말라 왔지만 유디트는 겨우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체이스, 아까 내가 할 말이 있다고 했지. 그게 사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체이스가 유디트의 말을 잘라 버렸다.

“그 소문에 대해 얘기하려는 거라면 괜찮아.”

그 말에 유디트가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미 알고 있었어……?

그런 자신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이내 체이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차피 그 일은 나와 대화를 나누기 전 있었던 일이잖아.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기로 했어.”

말을 마친 체이스가 삐뚜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히려 그 모습에 가슴이 저려 왔다.

“하지만, 넌 그걸로 괜찮아?”

“당연하지. 네 마음만 여전하다면 난 신경 안 써.”

“…….”

“애초에 네가 아셀을 좋아한단 걸 알면서도 기회를 달라 청했던 건 나니까.”

하지만 괜찮다는 말과는 다르게 말을 마친 체이스의 안색은 겉으로도 티가 날 만큼 어두워져 있었다.

아마 신경이 계속 쓰였을 테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키스를 했다니. 그것도 약혼까지 한 상태에서.

아무리 체이스라도 화가 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죄책감에 유디트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 더 이상 네게 폐를 끼치는 일은 없었어야 했는데.”

더군다나 그 소문이 사실인 이상에야. 도무지 체이스의 얼굴을 마주할 낯이 없었다.

이윽고 그녀의 귓가에 체이스의 초조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게 사과하는 이유는, 혹시 그 소문이 사실이라서야?”

직접적으로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그도 소문의 사실 여부를 궁금해하는 듯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디트가 고개를 들어 떨리는 눈으로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맞아……. 실망했지? 넌 날 믿는다고 했는데.”

“…….”

“만약 이 일로 더는 약혼을 이어 가기 싫다 해도 받아들일게.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는데…… 다 내 욕심이었나 봐.”

말을 마친 유디트는 다시 시선을 피하며 사형 선고를 기다리듯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체이스가 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참 이상하지.”

그의 목소리에 유디트가 몸을 딱딱하게 굳힌 순간, 체이스가 이어 말했다.

“솔직히 헛소문이기를 바랬고, 사실이 맞다 해도 그걸 네 입으로 듣고 싶지 않았는데.”

“…….”

유디트가 숨조차 못 쉰 채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런데 모든 걸 다 알게 된 뒤에도, 네가 전혀 미워지지가 않아.”

그 말에 유디트가 퍼뜩 고개를 들자, 놀랍게도 체이스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그녀를 향한 원망이라고는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체이스가 눈물에 얼룩진 그녀의 눈가를 닦아 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네가 이렇게 전전긍긍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약혼을 깨뜨리기 싫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이상하게 기뻐져.”

“……체이스.”

눈물을 닦아 준 뒤 어색하게 제 볼을 어루만지는 체이스의 손길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아마 그만큼 널 좋아하나 봐.”

이어진 체이스의 고백을 들으며, 유디트는 멍하니 생각했다.

속으로는 정말 말도 안 되고 염치도 없는 일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지만.

이렇게 체이스의 손길, 눈빛 하나에 가슴이 일일이 뛰는 걸 보면, 어느 순간 그의 반응 하나하나를 살피고 있는 자신을 보면.

어떻게 생각해 봐도 한 가지 결론밖에 나오질 않았다.

체이스를 좋아하고 있다.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유디트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사실 어쩌면 이건 체이스에게 점차 의지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예정되었던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 마음을 섣불리 고백했다간 체이스는 자신을 동정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간신히 흘러넘치는 감정을 추스른 뒤 유디트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해 줘서 정말 고마워, 체이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할 게 있는데.”

“뭔데?”

“이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선 아무래도 아셀과 한번 만나서 대화를 나눠 봐야 할 것 같아.”

“……그러도록 해.”

“믿어 주는 거야?”

“둘 사이를 확실하게 정리하기 위한 거라면, 찬성하지 않을 까닭이 없지.”

그렇게 말한 체이스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의 웃음 띤 얼굴에는 어떤 거짓이나 불안도 섞여 있지 않았다.

“……고마워, 체이스.”

유디트는 그런 그를 따라 마주 웃음 지으며 생각했다.

여러모로 체이스와 아셀은 참 다른 것 같다고.

아셀은 그동안 좋은 친구이자 가족이었지만, 함께하는 데 있어 자신의 감정은 내내 모른 척하고 무시해 왔다.

인연을 끊자던 자신의 간청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지.

하지만 체이스는 그와는 달랐다.

자신이 싫다면 깨끗이 물러나겠다고 함은 물론, 이런 추문에 휘말리면서까지 원망 한 점 없이 자신을 응원해 주고 믿어 줬다.

그런 그에게 이번에야말로 믿음을 보답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유디트는 속으로 굳게 결심을 다졌다.

* * *

아셀과 어떻게 약속을 잡아야 할까.

혹시라도 단둘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다른 학생들에게 들켰다가는 소문에 불을 지르는 격일 텐데.

그런 고민을 하며 책상에 앉은 그때, 위에 못 보던 쪽지 하나가 올려져 있는 게 보였다.

뭔가 싶어 펼쳐 보니 곧바로 익숙한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유디트, 저녁 먹고 시간 괜찮으면 학생회실에서 잠깐 만날 수 있을까? 소문 관련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아셀]

먼저 약속을 잡을 필요도 없이 그가 먼저 만남을 청해 왔다. 게다가 남들 눈을 의식한 건지 비밀리에 쪽지까지 전해 가면서.

이걸 보면 아셀도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긴 한 모양이다.

하긴, 아셀이 제 명예를 갉아먹는 추잡스러운 소문을 그대로 내버려 둘 사람은 아니지.

유디트는 안도하며 그날 저녁, 약속대로 학생회실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텅 빈 복도에 유디트의 노크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잠시 후, 굳게 닫혀 있던 학생회실의 문이 열렸다.

문을 열어 준 아셀은 유디트 보곤 기쁘다는 듯이 웃었다.

“유디트, 와 줬구나.”

유디트는 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누군가 또 제가 아셀과 있는 모습을 목격할까 서둘러 안으로 들어섰다.

어쩌다 보니 아셀과 만나 대화를 나눠야 할 상황에 놓이긴 했지만, 당연히 그와 오래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었다.

최대한 용건만 간단히 하고 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유디트는 아셀이 마시라며 건네준 홍차는 손을 저어 거절하며 입술을 열었다.

“일단 사과부터 할게. 그날 충동적으로 네게 입을 맞췄던 건 정말로 미안해.”

“…….”

“너도 당황해서 피하기 어려웠을 텐데, 결과적으로 나 때문에 이런 추문에 휘말리기까지 했으니……. 정말 미안하단 말을 하러 왔어, 아셀.”

유디트는 아셀에게 사과를 건네며 제가 했던 행동을 다시 곱씹어 보았다.

아무리 그때 분에 못 이겼다지만, 그런 창피한 행동을 하다니.

하지만 그걸 계기로 아셀에 대한 짝사랑을 완전히 접을 수 있는 건 다행이긴 했다.

게다가 지금은 예전과 다르게 아셀을 마주 보고 있어도 더 이상 심장이 뛴다거나, 숨을 잘 못 쉬겠다거나 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이제 이 추문만 좋게 마무리된다면 아마 그와 더 엮일 일은 생기지 않을 테지.

그런데 아셀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유디트는 어쩌면 아셀이 화가 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으로 인해 그의 명예가 실추되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잠시 뒤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는 나긋하기만 했다.

“미안해 할 것 없어, 유디트. 이제 나도 깨달았으니까.”

“……깨달았다고?”

예상과는 다른 답변에 유디트가 의아해하자, 아셀이 사뭇 진중해진 얼굴로 말했다.

“있잖아, 유디트. 나는 어긋났던 모든 일을 다시 바로잡고 싶어.”

“어긋났던 모든 일이라면?”

“내가 리아나와 약혼을 하고, 네가 체이스와 약혼을 한 일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이야?”

유디트는 분명 아셀의 말을 들었음에도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여기서 약혼 얘기는 왜 나오는 거지?

게다가 그걸 어긋났다고 표현하는 것도, 바로잡는 것도 뭘 어떻게 한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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