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75화
아셀은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그는 혼란스러워 보이는 유디트에게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다.
“네가 많이 갑작스러울 거라는 건 알아. 갑자기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해. 하지만…… 우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잠깐만, 아셀. 네가 그렇게 말해도 나는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유디트는 왠지 지금 아셀이 하는 말을 들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본능적으로 그의 말을 가로막고 말았다.
“우리는 지금 아카데미에 퍼진 이 소문을 어떻게 진정시킬지 논의하기 위해서 만난 거잖아. 그런데 갑자기 약혼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건데?”
유디트는 어떻게든 대화의 초점을 바꿔 보려 했지만, 이어진 아셀의 말은 더욱 생뚱맞았다.
“……소문이 그렇게 중요해, 유디트?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어?”
“……뭐?”
소문을 빌미로 자신을 이곳까지 불러 놓고는, 아셀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그럼 넌…… 이 소문이 아무렇지도 않아?”
“물론 처음엔 좀 기분이 나쁠 순 있겠지.”
그때 아셀이 유디트에게 성큼 다가섰다. 그것만으로도 서로의 거리가 꽤 좁혀졌다.
“하지만 결국 내가 널 택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
“장담하건대, 오히려 내 옆자리에 서게 된 네 눈치나 보기에 바쁠걸.”
그렇게 말하며 조금의 웃음기도 없이 진지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셀의 표정이 너무나 낯설었다.
여전히 그의 어투는 다정했지만, 묘하게 분위기가 강압적이랄까.
이에 겁먹은 유디트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난 순간, 앉지도 않고 내내 선 채로 대화하던 그녀의 등이 곧 벽에 닿았다.
“그렇게 겁먹지 마, 유디트. 나는 그저 모든 걸 너무 늦게 깨달았을 뿐이야.”
곧이어 유디트의 뺨에 익숙한 손길이 닿았다. 언젠가 유디트가 그토록 섬세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아셀의 긴 손가락이었다.
“그러니까 사과하지 않아도 돼. 그때 네가 내게 했던 입맞춤…… 난 싫지 않았어. 아니, 오히려 좋았어.”
“…….”
“그리고, 그 덕분에 이렇게 소문이 퍼지기도 했고.”
그가 내뱉은 마지막 말을 듣자마자 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고장이 난 것처럼 눈조차 깜박일 수 없었다.
지금 아셀의 말은 마치, 소문이 퍼진 걸 오히려 기꺼워하는 듯했다.
그 순간 번뜩 어떤 사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혹시 그래서 처음부터 애들의 질문에 적극적으로 부인하지 않았던 건가?
유디트가 곧 사정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는…… 약혼녀도 있는 몸이잖아. 리아나에게 미안하지도 않은 거야?”
“아, 그건 걱정하지 마. 전부 다 정리하고 온 참이니까.”
“뭐?”
“다행히 리아나도 나를 이해해 줘서, 약혼은 없던 일로 하기로 했어. 이미 우리 가문과 제르니아스 가문에 편지도 보냈는걸.”
“그게 무슨…….”
겨우 정신을 차렸던 유디트는 또다시 아셀의 입에서 나오는 충격적인 말들에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해 보려 해도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유디트, 그동안 내가 네 마음을 몰라 줘서 많이 힘들었지? 미안해. 하지만 우리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
“…….”
“이제 나도 널 좋아하게 됐으니까. 지금이라도 서로에 대한 마음을 인정한다면, 모든 일을 돌이킬 수 있어. 그리고 그게 네가 바라던 거였잖아.”
왜 아셀은 이 말을 하필 이 순간 하는 것일까. 차라리 그 여름 파티 날, 아니, 그보다도 전에 해 줬더라면 좋았을걸.
이미 마음이 떠나 버린 유디트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감흥도 없는 고백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랜 소꿉친구였던 아셀의 마음이 아예 신경 쓰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이상한 꿈을 꾸고 있는 거라면 좋을 텐데, 제 앞의 인기척이 너무 생생해서 외면할 수도 없었다.
정말 현실이구나. 머리가 지끈하게 아파 왔다.
“……갑자기 왜 마음이 변한 거야?”
“마음이 변하지는 않았어.”
“거짓말.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좋은 친구로서 그리고 동료로서만 지내고 싶다고 말했으면서.”
“그건 거짓말했던 게 아니라…… 나도 내 마음을 잘 몰랐던 거야. 돌이켜보면 한결같이 너를 좋아하고 있었어. 언제부터인지도 모를 정도로 옛날부터.”
“…….”
“어쩌면 네가 나를 좋아한 것보다 더 오래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아셀에 관한 마음을 접기 전이라면 그가 지금 하는 말들이 얼마나 기쁘고 설렜을까.
하지만 지금의 유디트는 전혀 기쁘지도 설레지도 않았다.
이미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그녀의 무심한 반응을 아셀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는 살짝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아직도…… 나한테 화가 많이 난 거야?”
그렇게 물은 그는 대답을 재촉하는 것처럼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그래서일까, 왠지 지금의 아셀은 지금까지 유디트가 알아 왔던 그가 아닌 것만 같았다.
아셀이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조금 더 다른 사람을 배려해 주고, 여유로운 태도를 가졌던 것만 같은데…….
어쨌건 지금의 아셀과 단둘이 더 오래 머물렀다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아셀이 평소의 이성적인 모습이 아닌 것도 불안했고, 지금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체이스의 모습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체이스의 한결같은 믿음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은 뒤,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안 돼, 아셀. ……이미 너무 늦었어.”
“늦다니?”
“너랑 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어째서? 너도 나를 좋아하고 나도 너를 좋아하는데…… 왜?”
아셀은 이어서 들려올 말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듯, 느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그에게 유디트는 다시 한번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그야 이젠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
그 순간 아셀의 두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유디트는 그렇게 당황한 그의 표정은 처음 보았다.
자신이 좋아한다며 고백하던 순간에도 여유로워 보이던 그였는데, 더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에 저렇게 충격받은 얼굴을 하다니.
참 신기했다.
곧 아셀이 파리하게 질린 채 제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이내 그가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잘못했어. 그런 말을 할 정도라니, 네가 얼마나 상처받았을지 짐작이 가. 물론 나도 뻔뻔하게 당장 용서해 달란 말은 아냐, 그저-.”
유디트는 아셀의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고민했다. 그는 왜 또 같은 사과를 반복하고 있는 걸까, 하고.
아무래도 아셀은 그동안 그가 그녀의 마음을 받아 주지 않아 자신이 화가 났다고 오인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그녀가 마음에도 없는 잔인한 말을 내뱉는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유디트는 한순간의 치기로 인해서 아셀에게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있는 사실 그대로를 입에 담은 것뿐이었다. 스스로도 신기할 만큼 정말 그녀는 그에 대한 마음이 싹 식었으니까 말이다.
“네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상황상 어쩔 수 없었어. 나는 페델리안 가문의 뒤를 이어야 할 후계자였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더 이상 아셀이 착각에 빠진 것을 두고 볼 수밖에는 없었기에 유디트는 그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네가 어쩔 수 없는 사정이었다는 건 나도 알아. 너는 페델리안 가문의 뒤를 이을 하나뿐인 후계자고, 그런 너는 너와 어울리는 고귀한 집안의 아가씨와 결혼했어야만 했다는 거지?”
“……”
“주변에서 하도 그런 소리를 많이 듣고 자라서 무의식적으로 그 생각이 머릿속에 박혔다는 거잖아.”
조금 어안이 벙벙해 보였던 아셀은 겨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네 말이 맞아.”
그제야 이해가 갔다. 아셀은 제게 늘 ‘소중한 친구’라고 하면서 늘 과분한 대접을 해 주었다.
마찬가지로 소꿉친구인 세드릭에게보다도 제게 더 극진한 태도를 보이고는 했으니까.
유디트는 문득 상념에 빠지고 말았다. 만약에 아셀이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깨달았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그러나 금방 고개를 저어 볼품없는 상념을 떨쳐 냈다.
지금에서는 의미 없는 가정일 뿐이었다. 아셀의 깨달음은 너무 늦었고, 그 사이에 유디트는 매우 상처 입고 지치고 말았으니까.
결론을 내린 유디트가 입을 열었다.
“그래, 네가 환경 때문에 네 마음에도 없는 선택을 했다는 것은 잘 알겠어.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이제 더 이상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야.”
“…….”
“이미 축제 날 밤에 말했었잖아. 너에 대한 짝사랑은 완전히 접을 거라고. 그 말이 이제 실현된 것뿐이야.”
단호하게 말을 마친 유디트는 시선을 저 멀리 창밖에 두었다.
언젠가 아셀이 그녀처럼 짝사랑에 빠지는 광경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한 번쯤은 자신처럼 아파하고 괴로워해 봤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막상 그 상황이 닥치니 전혀 즐겁지 않았다.
조금 침묵이 흐른 뒤, 아셀의 목소리가 적막을 깨고 학생회실에 울려 퍼졌다.
“혹시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 체이스, 그 녀석 때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