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76화
조금 침묵이 흐른 뒤, 아셀의 목소리가 적막을 깨고 학생회실에 울려 퍼졌다.
“혹시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 체이스, 그 녀석 때문이야?”
어느새 이쪽을 바라보는 아셀의 얼굴에는 조바심이 감돌고 있었다.
유디트는 잠시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고민하다, 이내 단호하게 답했다.
“아니, 체이스랑 관련 없이 나 혼자 내린 결정이야.”
그러자 대답을 들은 아셀의 눈동자에 의미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곧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뜻은 잘 알겠어.”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 같은 반응에 유디트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럼 소문은…….”
“그건 내가 어떻게든 수습해 볼 테니, 걱정하지 마.”
아셀이 씁쓸한 어투로 말했다. 드디어 원하던 대답을 듣게 된 유디트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부탁할게.”
그날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학생회실을 빠져나온 유디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드디어 이 오래된 관계도 끝이라는 생각에, 시원섭섭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휑한 기분이 들었다.
* * *
페델리안 가문에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집사 알버트는 그 편지를 손에 쥔 채 저택의 안주인인 페델리안 부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는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지고 있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주인마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페델리안 부인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누구에게서요?”
“아카데미에서 도련님이 보내신 편지입니다.”
그 말에 페델리안 부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도 종종 제 안부를 편지로 묻곤 했던 아셀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별다른 의문 없이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시 후.
페델리안 부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깜박거렸다.
제 손에 들린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았지만 그런다고 해서 편지에 적힌 내용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한순간에 밀려오는 현기증에 부인은 실수로 찻잔을 밀쳐 떨어뜨리고 말았다. 바닥에 떨어진 찻잔은 이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쨍그랑-.
집사는 깜짝 놀라 페델리안 부인 쪽으로 뛰어왔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그녀는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내저어 보였다. 그리고 혹여 편지의 내용이 보일까 봐 재빨리 접어 품 안으로 감췄다.
“하녀를 불러 깨진 찻잔을 치우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재빨리 다가온 하녀들이 깨진 조각을 치우는 모습을 보며, 페델리안 부인은 복잡한 머리를 정리했다.
아셀이 제르니아스 가문과의 약혼을 깨겠다는 의사를 짤막하게 전해 왔다.
이런 식의 일방적인 약혼 파기는 본인의 명예가 실추됨은 물론, 페델리안 공작가에도 누가 된다는 사실을 그 아이도 모르진 않을 텐데.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인 걸까.
마음 같아서는 이게 무슨 말이냐며 아셀을 불러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은 무리였다. 오후에 귀부인들과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삭이며 생각을 거듭했다.
아셀에게는 이번 주말에 저택에 방문하라고 해야겠어. 그때 약혼을 왜 취소하려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 봐야지.
페델리안 부인은 서둘러 답신을 작성해 집사에게 맡겼다. 편지를 보내고 나자 쿵쿵 뛰던 심장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아셀이 왜 갑자기 리아나와의 약혼을 깨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차피 한순간의 변덕에 불과할 테다.
그도 그럴 게, 리아나는 최고의 신붓감이지 않은가.
높은 신분과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재력까지 제국의 그 어느 여자보다도 뛰어났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런 장점들을 들어 설명한다면 아셀도 금세 이해할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제가 하는 말이라면 토도 달지 않고 수긍하던 아이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날 오후, 귀부인들과의 모임에서 페델리안 부인은 뜻하지 않은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바로 아셀 페델리안과 유디트 사이에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소문이었다.
“호호, 제 딸이 편지에 써서 알려 주더군요. 이 일로 아카데미가 무척 떠들썩하다나요. 저야 페델리안가의 공자가 얼마나 성실한지 알고 있으니 믿고 있진 않지만…….”
“어머, 어린 학생들이잖아요.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를 그런 걸로 풀려는 거겠지요.”
귀부인들은 그저 우스갯소리로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페델리안 부인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걱정했던 불길한 미래가 곧 실현될 것처럼, 눈앞이 깜깜하고 속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설마 아셀과 유디트가 서로에 대한 마음을 깨닫게 된 건가? 그래서 둘이 함께하기 위해 이런 짓을?
그 생각을 하자마자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다.
유디트 그 아이는 내가 그간 베푼 은혜가 얼만데, 이런 식으로 갚다니 배은망덕해도 유분수지.
당장이라도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문득 유디트 쪽에서는 아직 약혼을 깨겠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 사실에 부인이 겨우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래, 아직 둘의 감정이 완전히 무르익은 것이 아니라면 타일러서 해결해 볼 여지는 얼마든지 남아 있었다.
유디트 그 애도 멍청한 아이는 아니니 좋게 말한다면 분명 내 뜻을 이해하고 공감해 줄 테지.
머릿속으로 짧게 정리를 끝낸 페델리안 부인이 이내 냉정한 투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신분의 제약이 덜한 아카데미라고는 하나 아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그런 소문이 나돌다니, 용납할 수 없군요.”
“그, 그건-.”
소문을 가장 먼저 입에 담았던 귀부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녀가 우물쭈물 말했다.
“……안 그래도 제 딸에게는 잘 타일렀답니다. 이상한 소문을 옮기고 다니지 말라고요.”
“네, 제 아들들에게도 입단속을 잘 시켜 둘게요, 부인.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페델리안 부인의 눈치를 보던 귀부인들이 하나둘씩 말을 덧붙였다. 그제야 페델리안 부인은 딱딱하게 굳었던 표정을 풀 수 있었다.
* * *
아셀과 대화를 나누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아카데미에 쫙 퍼졌던 소문들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그가 친구들에게 ‘너무 터무니없는 소문이라 상대할 필요성도 못 느끼겠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는 사실이 전해진 것이다.
그러잖아도 긴가민가해 하고 있던 학생들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그럼 그렇지’ 하고 금세 관심을 껐다.
사실 그 누구도 별 볼 일 없는 평민 여자아이가 페델리안 공자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거라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간밤에 어떤 학생이 몰래 교수 연구실에 잠입해 시험 문제를 유출하려다 걸리는 바람에, 예의 소문은 완벽히 묻혀 버리고 말았다.
“들었어? 어젯밤에…….”
“간도 크지. 최소 퇴학 아니야?”
숙덕숙덕-.
아카데미가 다시 새로운 사건으로 시끌벅적해진 걸 보며 유디트는 한시름을 놓았다.
정말 다행이네.
오랜만의 평온한 일상을 기꺼워하며 유디트는 다음 수업을 준비했다.
자리에 앉아 오늘 진도를 나갈 페이지를 넘기고 있자니 누군가 그녀의 옆자리에 앉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체이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은 아침.”
가벼운 인사를 건넨 그가 가방에서 책을 꺼내 드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유디트가 빤히 바라보자 체이스가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그렇게 물으며 그는 손을 들어 뺨을 문질렀다. 유디트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러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체이스의 시선에 유디트는 어쩐지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옛날에는 어떻게 체이스의 얼굴을 마주 봤었더라.
이내 핑계를 떠올린 유디트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게…… 요즘 공부는 잘 되어 가는지 궁금해서.”
“아, 그거.”
그 말에 체이스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웅얼웅얼 대꾸했다.
“네가 이것저것 도와줘서 회계학 말고 다른 과목들도 열심히 준비 중이긴 해. 결과는 자신할 수 없지만…….”
“잘할 수 있을 거야.”
유디트가 기운 내라며 응원의 말을 늘어놓는데, 체이스가 별안간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던져 왔다.
“그런데 유디트, 나 졸업하면 우리 결혼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
“…….”
그 말에 유디트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얼굴만 붉혔다. 하지만 체이스는 그녀가 부끄러워한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재차 물었다.
“넌 언제가 좋아?”
“뭘?”
“언제 결혼하는 게 좋겠냐고.”
유디트는 최대한 목소리의 떨림을 감추려 애쓰며 겨우 입을 열었다.
“……너네 가문 어른들께서는 아무 말씀 없으셔?”
“글쎄, 아버지께서는 최대한 빨리 해치우길 원하시겠지. 난 기사 작위도 받고 입단도 해야 하니 좀 여유를 가져도 상관은 없는데…….”
역시 체이스는 곧장 기사가 될 생각이구나. 하고 싶은 일이 뚜렷한 모습에 왠지 부러워졌다.
동시에 문득 카렐 교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위한 일이 하나쯤은 꼭 필요해.”
“…….”
됐어, 이미 거절한 일인데 이제 와서 뭘 떠올리는 거야.
유디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체이스에 이어 다른 것까지 탐내다니 욕심도 무척 많다고 생각하면서.
그때, 평소보다 살짝 늦게 도착한 르데샤가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오전부터 너무 붙어 있는 거 아냐, 두 사람?”
그녀는 뾰족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유디트의 팔에 팔짱을 껴 왔다.
르데샤의 방해에 유디트의 몸이 기울자 체이스의 얼굴이 대번에 불퉁하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