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77화
유디트가 르데샤를 돌아보자, 평소보다 퀭해 보이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밤이라도 샜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아냐, 평소보다 부모님 닦달이 좀 심해서 그래. 마지막 시험이잖아.”
그렇게 말한 르데샤가 여전히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체이스를 돌아보았다.
“너는 어째 평소랑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졸업은 자신 있는 거야?”
“그걸 왜 네가 걱정하는데?”
“어머, 걱정하는 건 아냐. 네가 졸업 못 해서 결혼이 미뤄진다면 오히려 달갑지. 그만큼 유디트에게 유예 시간이 생길 테니까.”
“…….”
“그리고 혹시 알아? 유디트가 그때 가서 마음이 또 바뀔지?”
르데샤의 돌직구에 할 말이 없는지 체이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한편 유디트는 르데샤와 체이스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광경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르데샤는 체이스의 눈치를 제법 보는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자신이 없어도 투닥대며 대화를 나눌 정도로 사이가 가까워져 있었다.
언제 체이스랑 저렇게 친해졌을까?
아무래도 회계학 수업 시간마다 나란히 앉고, 점심 식사를 내내 함께한 보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유디트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데, 이를 발견한 체이스가 억울한 투로 물었다.
“유디트, 갑자기 왜 웃어? 너도 쟤 말처럼 내가 졸업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르데샤가 말할 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으나 유디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여기자 체이스는 조금 상처받은 모양이었다.
유디트는 황급히 두 손을 내저으며 그녀가 웃었던 이유에 관해서 설명했다.
“그런 거 아니야! 나는 단지 너랑 르데샤의 사이가 무척 좋아 보인다 싶어서, 그래서 웃었던 것뿐이야.”
그런데 그녀의 말을 들은 체이스는 조금 전보다 더욱 이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설명이 좀 부족했나? 유디트가 뒤늦게 말을 덧붙였다.
“그야 처음에는 너희들이 이렇게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체이스뿐만 아니라 르데샤 또한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둘 다 왜 그러는 거지?
표정의 이유를 짐작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하는데, 체이스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어딜 봐서 내가 저 여자애랑 사이가 좋다는 거야?”
르데샤 또한 체이스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래, 유디트. 저 바보랑 사이가 좋다니, 대체 뭘 보고?”
죽이 척척 맞아떨어지는 걸 보니 어떻게 봐도 무척 친한 사이 같은데…….
평상시 체이스는 보통 다른 학생들을 투명 인간 취급하며 무시하곤 했다.
그것에 비해 르데샤의 말에는 일일이 반응도 해 주고, 나름 배려도 해 주지 않는가.
또 르데샤도 그런 체이스를 어렵지 않게 대하고 있고.
하지만 솔직하게 말했다간 둘 다 기분 나빠할 것이 뻔했기에 유디트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음…… 착각한 거라면 미안해. 어쨌든 체이스는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까 충분히 졸업할 수 있을 거야. 그동안 보충반에서 치렀던 시험에서도 성적이 많이 올랐잖아.”
그제야 체이스는 한껏 구기고 있던 표정을 풀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그래.”
유디트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르데샤 또한 체이스의 졸업에 관해선 더 걸고 넘어지진 않았다.
사실 그녀도 매 수업 시간마다 성실히 임하던 체이스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대충 상황이 마무리된 것 같네.
유디트는 힐끔거리며 시계를 보았다. 아직 카렐 교수가 들어와 수업을 시작하기까진 여유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오늘 진도 나갈 부분을 조금 훑어볼까,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르데샤가 다시금 말을 걸어왔다.
“참, 이걸 묻는다는 걸 깜박할 뻔했네. 혹시 너희 시험 끝나고 뭐 해?”
“응?”
유디트가 책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들자 르데샤는 이어 물었다.
“괜찮으면 다 같이 놀러 가지 않을래? 르데인도 끼워서 말이야.”
얘기를 듣자마자 체이스가 옆에서 질색을 했다.
“그 녀석까지? 난 됐다, 관심 없어.”
하지만 유디트는 르데샤의 의견에 큰 관심을 보였다.
“다 함께 놀면 재밌을 것 같은데. 난 갈래.”
요즘 들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점점 즐거워지고 있는 유디트였다. 그녀가 냉큼 찬성하자 체이스가 놀란 눈으로 유디트를 바라봤다.
잠시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가 내키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그럼 나도 갈게.”
“아깐 안 간다더니?”
“너네들끼리 돌아다니면 위험할 수 있으니까, 보호자가 따라가 줘야지.”
“얼씨구, 유디트가 가니까 냉큼 따라오는 거면서.”
르데샤와 체이스가 다시 투닥거리는 모습에 유디트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다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어디로 놀러 가려고?”
“음, 구체적으로 아직 생각해 보진 않았는데 우리 가문에 딸린 별장이 하나 있어. 숲속에 지어져 있는데 가서 밤도 줍고, 호수에서 배도 타고, 그러면 재밌지 않을까?”
숲속에 지어진 별장이라니, 게다가 호수에서 배를 탄다니.
단 한 번도 그런 걸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에 유디트의 마음이 기대감에 부풀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다가, 이내 의문이 들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르데인은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어? 벌써 찬성한 거야?”
그러자 르데샤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니, 아직 말은 꺼내 보지 않았어. 이따가 만나면 한번 말해 보려고.”
만약 르데인이 찬성하지 않으면 무산되는 게 아닌가 싶어 유디트가 걱정 어린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르데샤가 확신 어린 어조로 덧붙였다.
“근데 걱정하지 마. 걔도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가 장난 아닌 것처럼 보였으니까, 아마 수락할 거야.”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유디트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곧 두 사람이 뭘 하고 놀지에 대해 신나게 의논하기 시작하자, 체이스가 옆에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내 의견은……?”
* * *
금세 시험 기간이 도래했다. 하필 하고 많은 시험 중에 회계학 시험이 가장 마지막이었다.
매번 악독한 난이도와 전혀 본 적 없는 유형으로 문제를 출제함으로 유명한 카렐 교수답게, 이번 회계학 시험도 무척 어려웠다.
시험을 치르는 교실에는 사각거리는 펜 소리와 학생들이 고통에 차서 앓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렇게 두 시간 후, 드디어 시험이 끝났다.
“끝났다…….”
함께 시험을 치렀던 르데샤는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정리하는 유디트를 발견하곤 쏜살같이 달려왔다.
“유디트, 시험 잘 봤어?”
“음…….”
유디트는 말끝을 흐리다가 답했다.
“잘 본 건진 아직 모르겠지만, 우선 모르는 건 없었어.”
유디트의 그 대답에 르데샤는 또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갈무리했다.
“이번 수석도 또 네가 되겠네. 뭐, 어쩔 수 없지.”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굴리는 유디트를 향해 르데샤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말했다.
“그래도 모든 시험이 끝났으니까 저번에 약속한 것처럼 다 같이 놀러 가자. 르데인에게도 따로 말을 해 봤더니 좋아하더라.”
그때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체이스를 발견한 르데샤가 불쑥 그에게 말을 걸었다.
“체이스! 시험은 잘 봤어?”
그런데 그 물음을 들은 체이스는 잠시 침묵했다. 유디트는 체이스의 표정을 살펴보았으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혹시 너무 어려웠던 걸까, 하고 걱정이 드는 찰나.
“일단 찍은 문제보단 푼 문제가 더 많긴 했어.”
“헛, 정말?”
꽤 희망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그동안의 노력이 역시 헛되진 않았구나.
꾸벅꾸벅 졸면서도 필기하고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문제를 풀던 체이스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왠지 저가 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체이스는 감격에 찬 표정을 한 유디트를 보더니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그렇게 좋아, 유디트?”
“……? 당연하지.”
망설임 없이 나온 대답에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체이스가 갑자기 싱글벙글 웃기 시작했다.
“왜?”
“응? 아무것도 아냐.”
그러자 옆에서 르데샤가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뭔데 자꾸 그렇게 기분 나쁘게 웃는 거야?”
그러자 체이스가 한숨을 쉬더니 머리를 쓸어 넘기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봤지, 르데샤. 유디트도 막상 내가 졸업하길 간절히 기대하고 있는 거.”
“……고작 그런 것 때문에 그렇게 웃은 거였어?”
르데샤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체이스는 그 사실이 꽤 뿌듯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때, 내내 입꼬리를 올리고 기분 좋은 미소를 짓던 그의 얼굴이 점점 굳어 가는 게 보였다.
뭐 때문에 그런 거지?
유디트가 그의 시선이 고정된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교실 바깥에 카렐 교수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던 것이다.
“……교수님?”
그를 알아본 학생들이 굳은 표정으로 지나가면서 인사를 던지는데, 그는 아는 척도 하지 않고 곧장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유디트는 그가 자신을 만나러 왔나 싶어 어리둥절해하며 앞으로 나섰지만 의아하게도 카렐 교수는 그녀를 지나쳐 체이스에게 다가갔다.
“체이스 카르단디, 시험도 끝났으니 잠시 시간이 있을 테지. 나 좀 보자꾸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체이스가 살짝 위축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나 자신의 졸업에 다른 문제가 생겼나 싶었던 것이다.
카렐 교수가 그의 질문에 유디트 쪽을 힐끗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 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