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78화
유디트와 지난 대화를 나눈 이후로 카렐 교수는 내내 고민을 거듭했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다 파악이 끝난 참이었다.
내심 수습 교수직이 싫지 않다는 것과, 동시에 체이스와의 약혼이 필수 불가결한 일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그는 유디트가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교수님께서 오해하신 것처럼 체이스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오히려 제게는 무척 과분한 사람이에요. 그럼에도 제가 교수님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건-. 체이스와는 정략결혼을 한 사이라, 카르단디 가문에 허락을 구하지 않고서 저 혼자 결정을 내리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이제 유일하게 문제가 되는 건 그 카르단디 가문의 허락이라는 건데.
유디트의 말마따나, 그 집안사람들이 어떻게 나올지를 모르니 설득을 어려워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 때문에 자신도 내내 고심하고 있던 게 아니겠는가. 내키진 않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녀석의 도움이 필요한데 말이지.”
카렐 교수는 눈썹을 찌푸리며 곧 제가 만난 학생 중 가장 버릇없던 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렇게 막 나가는 녀석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예의범절은 말아먹은 녀석, 체이스 카르단디.
분명 그 녀석은 유디트가 수습 교수를 하는 걸 반대하는 듯 보였었다.
하지만 잘 떠올려 보니 지난번, 유디트가 진심으로 교수직을 맡고 싶어 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을 때.
분명 이렇게 답했었지.
“만약 그렇다면 군말 없이 물러날 겁니다.”
솔직히 그 녀석의 대답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었다. 멋대로 호기에 차 내뱉은 대답일 수도 있었기에, 그다지 귀담아 듣지도 않고 있었다.
하지만 유디트는 그런 그를 꽤나 신뢰하고 있고, 따르는 것으로 보였다. 본인에게 과분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할 정도로.
그렇다면 이번엔 내 눈이 아니라, 유디트의 판단을 믿어 볼까.
체이스, 그 녀석이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면 유디트를 위한 선택을 내려 줄 테지.
그렇기에 카렐 교수는 시험 기간이 끝나기를 벼르고 있다가 곧바로 체이스를 찾아온 것이다.
“체이스 카르단디, 시험도 끝났으니 잠시 시간이 있을 테지. 나 좀 보자꾸나.”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체이스였지만, 결국 자신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순순히 따라 나왔다.
* * *
카렐 교수의 연구실 안.
카렐 교수는 작은 테이블을 중간에 둔 채 체이스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체이스는 카렐 교수와 단둘이 대면하고 있는 이 상황 자체가 몹시 어색한 것만 같았다.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계속 꼼지락거리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한참 동안이나 그런 체이스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카렐 교수가 마침내 입술을 뗐다.
“상의할 일이란 건 유디트에 관련된 이야기다.”
“……유디트요?”
체이스가 서두를 듣자마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유디트에 관한 이야기를 유디트가 아니라 왜 저와 함께하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제 졸업 문제가 아니라요?”
체이스가 되묻는 말에 카렐 교수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내키지는 않지만 네 그간 수업 태도와 출석 점수, 그리고 아까 받아 본 시험지를 훑어보니 무던히 낙제는 면할 것 같더구나.”
“정말입니까?”
계속 자신을 경계하던 기색이던 체이스의 표정이 처음으로 안도감에 젖어들었다.
기왕 부탁을 할 거라면 체이스가 협조적인 태도가 되어 주는 편이 좋았으니, 카렐 교수는 떨떠름하게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래, 그동안 수고 많았다. 여전히 형편없는 점수이긴 하다만…… 졸업이야 무난히 통과하겠지.”
잠시 화색을 띠며 뛸 듯이 기뻐하던 체이스가 이내 무슨 연유에선지 낯빛을 흐렸다.
잠시 후 뒤통수를 긁적이며 머뭇거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저, 교수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제가 졸업할 수 있게 편의를 봐주셔서요. 보충반으로 출석 점수를 대체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기도 하고…….”
입에 발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표정이나 태도에서 제법 진심이 묻어나 있었다.
감사 인사를 하는 체이스를 보며 카렐 교수의 완고하던 마음이 조금 흔들리기 시작했다.
‘음, 그래도 은혜는 아는 걸 보니 유디트의 말이 아예 틀리지는 않은 모양인데.’
곧 어려운 부탁을 꺼내야 할 참인데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체이스의 말에 몇 번 고개를 주억거리던 카렐 교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게 느껴 준다면 다행이구나. 사실은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 불렀는데 끝까지 들어 보고 대답해 준다면 좋겠구나.”
“……부탁을요?”
체이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꼿꼿한 태도로 그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카렐 교수는 준비해 온 대사를 내뱉었다.
“너도 느꼈겠지만, 유디트는 정말 뛰어난 인재다. 뛰어난 회계학 실력을 갖춘 것은 물론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일에도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어.”
“……”
“그런 유디트가 이제 마지막 시험까지 치렀으니 슬슬 진로를 결정해해도 좋을 시기가 아니냐.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졸업 이후에는 너와의 결혼이 예정되어 있지.”
침을 꿀꺽 삼킨 카렐 교수가 이어 말했다.
“이런 와중에 만약 유디트가 수습 교수직을 맡고 싶어 한다면 어쩔 테냐?”
“네?”
“……사실 지난번에 유디트와 깊이 대화를 나눴다. 유디트도 수습 교수직에 흥미가 있는 모양이지만, 너와의 약혼이 걸리는 건지 어쩔 수 없이 포기하겠다고 하더구나.”
“…….”
“하지만 그런 식으로 그 애가 꿈을 포기하게 하는 건 좀 잔인하지 않느냐? 그토록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너와의 결혼으로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는 게?”
카렐 교수의 말을 들은 체이스는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진지한 얼굴로 뭔가를 고심해 보고 있는 듯했다.
이내 체이스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자신이 지금 유디트의 앞길을 막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가 설득되고 있다고 확신한 카렐 교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짖으며 계속해서 말을 붙였다.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건 이거다. 네가 정말로 유디트를 위한다면, 직접 가문 사람들을 설득해 줄 수 없겠느냐. 유디트는 졸업과 동시에 기사가 될 네 뒷바라지를 할 생각인 모양이던데, 그런 일로 이런 좋은 기회를 걷어차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아.”
카렐 교수의 말이 끝났음에도 체이스는 대답이 없었다. 수없이 말을 고르던 그가 나중에야 겨우 입술을 뗐다.
“저도 유디트가 수습 교수직을 하고 싶어 한다면, 응원해 주고 싶어요. 말씀대로 저희 아버지의 승낙을 받는 건 쉽지 않겠지만…….”
그는 뭔가를 떠올리는 듯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회계학 보충반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줄 때 유디트는 정말 신나고 열정 가득해 보였으니까 말이에요. 저도 유디트가 앞으로도 그렇게 행복하기를 바라요.”
“흐음.”
“교수님 말씀은 이해했습니다, 만약 유디트가 진심으로 교수직을 맡길 원한다면 가문의 허락을 받을 수 있게 설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정 안 되면 유디트와 저, 단둘이 독립하거나요.”
카렐 교수는 체이스의 말에 내심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체이스가 무작정 유디트의 수습 교수직을 반대할 줄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녀의 뜻을 존중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유디트를 위해서라면 가문에서 독립하겠다는 말까지 하니 한층 신뢰가 더해졌다.
“어쨌건 저도 이 부분에 관해선 유디트와 대화가 필요할 것 같네요. 기회가 되면 한번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구나.”
의외로 대화가 잘 풀려서 다행이다.
카렐 교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체이스가 자신의 연구실 바깥을 나갈 때까지 정성을 들여 배웅해 주었다.
* * *
페델리안 부인은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제 곧 올 때가 되었는데……”
지난번에 아셀로부터 리아나와 약혼을 깨겠다는 편지를 받은 후, 그녀는 아셀에게 주말에 저택에 한 번 방문하라는 답장을 보냈다.
자세한 이야기는 직접 만나서 나누자고.
그래서 페델리안 부인은 정원에 앉아 아셀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막 정각이 되었을 무렵, 아셀이 저택에 도착했다. 역시 약속 시간은 늘 칼같이 지키는 아셀다웠다.
아셀은 페델리안 부인을 향해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어머니,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아셀. 일단 앉거라.”
겉옷을 하녀에게 맡긴 아셀이 자리에 앉자, 페델리안 부인은 우선 그에게 안부를 물었다.
“어디 아픈 데는 없지?”
“없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도 몸 편찮으신 곳은 없으시죠?”
“나야 뭐 늘 그렇든 건강하단다. 음, 시험이 막 끝난 참이겠구나. 최근에 본 시험은 어떻게 되었니?”
“무난했습니다.”
아셀이 말하는 무난은 일종의 겸손에 가까운 표현으로 이번에도 수석은 떼놓은 당상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역시 내 아들다워.
페델리안은 그런 아셀을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이 만남의 목적을 상기하곤 다시 표정을 굳혔다.
참 이럴 때가 아니지.
현재 아셀과는 좋은 일로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건 아니었다. 페델리안 부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해지는 걸 본 아셀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약혼과 관련해서 어머니께 더욱 상세히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