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79화
“죄송할 것까진 없지. 네게도 뭔가 사정이 있었을 테니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지로 적기보다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고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렇구나.”
잠시 뜸을 들이던 페델리안 부인은 입술을 열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니? 혹시 뭐 리아나와 다퉜다거나 한 것은…….”
일단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는데, 아셀은 아니라는 뜻으로 팔을 저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리아나와 합의해서 결정한 일이고 앞으로는 친한 친구 사이로 남을 거니까요.”
아셀은 페델리안 부인을 안심시키려는 듯 그렇게 말했지만, 오히려 그 말에 부인은 더욱 불안해지고 말았다.
서로 다퉈서 홧김에 약혼을 깨겠다고 한 것도 아니면, 설마 정말로…….
곧장 페델리안 부인의 머릿속에 분홍 머리를 지닌 여자아이, 유디트의 모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닐 거야. 아셀이 그런 보잘것없는 아이를 좋아할 리가.
그녀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고 되뇌며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심장이 불길하게 엇박자로 뛰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불안을 전혀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은 그녀가 이내 침착한 어조로 아셀에게 물었다.
“그러니? 리아나와 싸운 게 아니라니 다행이구나. 옛날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인데 한순간에 사이가 멀어진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니.”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페델리안 부인은 다시 본론을 내뱉었다.
“그런데 들을수록 의문이구나. 리아나와 싸운 것도 아니라면 대체 약혼을 왜 깨려 하는 거니? 그런 좋은 조건의 아일 두고.”
비록 제 아들이 꽤 똑똑한 편이라지만, 아직 세상에 대한 이치는 잘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부인이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너도 알다시피 리아나는 정말 완벽한 아이잖니. 외모면 외모, 집안이면 집안, 재력이면 재력.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그런 최고의 신붓감을 마다하는 네가 나는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말이다.”
“…….”
“만약 네가 이번에 리아나와의 약혼을 파기한다면, 앞으로 그 아이보다 더 훌륭한 신붓감을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구나.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만 같아서 안타깝단다.”
물 흐르듯 나오는 페델리안 부인을 말을 아셀은 얌전히 듣고만 있었다.
혹시 자신의 말에 조금이라도 설득되고 있는 걸까?
그런 기대를 품었을 때, 굳게 닫혀 있던 아셀의 입이 열렸다.
“어머니, 혹시 제가 리아나와의 약혼을 결심한 이유가 뭔지 아세요?”
“그건…….”
페델리안 부인은 아셀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아셀이 리아나와 약혼하겠다며 통보를 했을 때, 몹시 급작스럽다고 느끼긴 했다.
그동안 자신이 제시한 수많은 귀족 가문의 영애들을 거절할 땐 언제고 손바닥 뒤집듯이 마음을 바꿨으니 말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리아나와 아셀은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인데다, 둘 다 선남선녀이니 서로 모르는 새 감정이 싹텄을 수도 있겠거니 했다.
그런데 둘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며 그게 큰 착각임을 깨달았다.
그들은 좋은 동반자로는 보였으나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페델리안 부인은 그것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둘 다 한창때의 남녀이니만큼 계속 붙어 지내다 보면 마음이 통하는 것도 시간문제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공식 석상에서는 둘은 늘 서로를 배려했고 사이좋은 모습만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셀이 약혼을 결심하게 된 다른 이유가 있었다니.
“내가 했던 말?”
페델리안 부인은 의아함에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가문을 위해서 훌륭한 여자를 신붓감으로 받아들이라던 말 말이니?”
하지만 그녀의 질문에 아셀은 곧장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에 페델리안 부인의 사고가 뚝 멈추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그 무렵, 아셀에게 약혼을 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디트에게도 상대를 찾아주려 약혼자 후보들을 알아봤었던 기억이 났다.
설마 아니겠지.
그녀는 초조한 마음으로 아셀에게 물었다.
“혹시 유디트 때문이니? 내가 유디트를 약혼시킨다고 해서?”
사실 그 이전부터 부인은 점점 커 가는 아이들이 불순한 소문에 휘말리게 될까 봐 내내 전전긍긍해 왔었다.
이로 인해 행여나 제 아들이 피해를 입게 될까, 한발 앞서 유디트에게 분수에 맞는 짝을 찾아주고자 했던 것인데.
만약 제 아들이 유디트의 정략결혼을 막고자 자신의 약혼을 서두른 거라면…….
제발 아니기를 바랐던 부인의 불길한 예감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그렇습니다, 어머니.”
확답을 들은 페델리안 부인은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한순간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겨우 입술을 뗐다.
“왜? 그 아이가 대체 네게 뭐라고?”
“…….”
“너희들이 친한 사이란 건 안다만, 아셀. 서로 사는 세계가 너무 다르지 않니?”
그동안 아셀의 앞에서 유디트를 친딸처럼 여기는 척하던 페델리안 부인의 자비로운 면모는 사라지고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제 아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유디트를 은근히 깎아내리고 힐난했다.
동시에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되고 만 것인지에 대해 내내 고심했다.
역시 처음부터, 유디트를 아셀의 곁에 붙여 둬서는 안 되었던 걸까?
페델리안 부인이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아셀이 입을 열었다.
“……물론 어머니께서 보시기엔 말도 안 된다고 느껴지실 수 있겠죠.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을 만큼 유디트를 좋아하게 되고 말았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하…….”
“그리고 그걸 깨달은 이상 약혼을 지속하는 건 리아나에게도 실례일 거라 생각이 들어 약혼을 깨려고 한 겁니다.”
귀부인들과의 모임에서 직감했던 그 불길함이 사실이었구나.
페델리안 부인은 몰려오는 현기증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곤 생각에 빠졌다.
처음에 유디트를 아셀의 곁에 둔 건 단순한 동정심에 불과했었다.
그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아이가 가여웠기에, 불쌍한 고아 하나를 거두는 건 크게 힘이 드는 일도 아니었기에.
더불어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에게 자비 어린 면모를 보여 주고자 일부러 저택에서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감도 없잖아 있었다.
아카데미 또한 마찬가지다. 유디트가 평민치고는 비상한 머리를 지녔기에 평소 귀부인들과 하던 자선 사업 삼아 후원해 준 것뿐이었다.
무엇보다 제 소중한 아들의 청이 있었기도 하고.
물론 다른 이유 때문도 있었다.
당시 페델리안 가문의 하나뿐인 후계자인 제 아들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들을 견뎌 내느라 몹시 힘들어한단 걸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유디트였기 때문에, 부러 그녀를 곁에 두어 조금이라도 아셀이 편해지길 바랐던 것이었는데…….
유디트는 제 처지를 잘 파악할 만큼 영민하다고 생각했고, 행여나 아셀에게 괜한 기대를 품지 않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모두 다 자신의 오산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결국 알량한 동정심이 모든 일을 망치고 말았구나.
혹여 이런 일이 생길까 봐 귀에 못이 박히도록 아셀에게 잔소리를 해 댔던 것인데 말이다.
입 아프게 떠들어 댔던 말들이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다니.
“후우…….”
페델리안 부인은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 상황이 아예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를 대비해 유디트에게 다른 알맞은 상대를 미리 소개시켜 주지 않았던가.
페델리안 부인은 그 핑계를 대서라도 어떻게든 유디트에 대한 아셀의 연심을 단념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내뱉었다.
“네 마음은 잘 알겠다. 하지만 유디트는 이미 약혼자가 있지 않니. 상대 집안 체면도 있을 텐데 네가 리아나와 파혼한다고 해서 그쪽에서 순순히 받아들일 것 같니.”
부인은 지금도 유디트가 보내는 편지를 받아 보고 있었기에, 둘의 사이가 제법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근래 들어서는 아셀이 끼어들 틈도 없을 만큼 끈끈해 보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걸 아셀도 알고 있는지 그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페델리안 부인은 아셀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제 아들이라는 것을 빼고 보더라도 아셀은 완벽한 아이였다.
그런데 어울리지도 않게 평민, 그것도 고아인 여자애에게 마음을 주다니. 그것도 이미 다른 이와 약혼하기까지 한 아이를.
본인이 가시밭길로 걸어 들어가려 한단 사실을 스스로 알기는 하는 건가.
페델리안 부인은 어떻게든 아들을 설득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고 잘 생각해 보렴, 아셀. 유디트가 네게 마음이 있다면 모르겠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 애는 다른 사람과 약혼해서 이미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상황이야. 내가 유디트에게 계속 근황을 전해 듣고 있었다는 것 잘 알지 않니? ”
“……유디트는 그저 상황에 순응한 것뿐이에요. 은혜를 입었기에 감히 어머니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요.”
“그렇다면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니?”
“그런 얘긴 아니에요. ……하지만 시작은 분명 유디트의 의지는 아니었으니까요. 아무리 새 약혼자에게 정이 들었대도, 긴 시간 알아 온 저만 할까요.”
“…….”
유디트와 오랫동안 소꿉친구로 지내 온 아셀이 저리 호언장담을 하니 페델리안 부인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