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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80화 (80/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80화

정말 자신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아셀이 저렇게 확신할 정도면, 유디트도 아셀에게 나름 마음이 있었다는 건가?

페델리안 부인이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아들을 자세히 살피자, 어느새 그의 두 눈동자에 흔들림이 멎어 있는 게 보였다.

이미 그는 자신만의 생각이 확고한 듯했다.

결국 당장 설득하는 건 어렵겠다 판단을 내린 페델리안 부인은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생각한다면 말릴 수야 없지.”

“……네?”

아셀은 방금 들은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마치 자신의 어머니가 순순히 허락할 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하지만 페델리안 부인은 그를 놀리려는 것도, 말실수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무작정 반대했다간 아들의 반감만 살 게 분명하니, 명분을 얻기 위해 한 수 물러나는 것뿐이었다.

“아셀, 네가 그렇게까지 간절하다면 한번 유디트의 마음을 쟁취해 보렴. 하지만 내가 널 도울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말거라.”

그녀는 냉정하게 머릴 굴렸다. 애초에 유디트는 자신의 말에 거역할 수 없다는 데에서 나온 배짱이었다.

아셀의 앞에서는 관대한 척 물러나되, 우선 유디트에게 따로 지시를 내려 연심을 끊어 내도록 만들자.

그것이 페델리안 부인이 내린 결론이었다.

유디트가 아셀과 같은 마음이건, 아니건 간에 상관없었다.

자신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그 애는 결국 부득이한 처사를 감수해야 할 테니까.

“너만큼이나 유디트도 내게 있어 소중한 아이라는 걸 알지 않니. 그러니 이 일에 관해 유디트의 의사를 먼저 들어 보고, 그 대답 여하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고 싶구나.”

아들의 앞에서 자애로운 어머니인 양 연기하면서도, 페델리안 부인은 속으로 바삐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아셀이 돌아가는 대로 서둘러 유디트에게 전보를 부쳐야지. 그리고 어떻게든 아셀의 연심을 끊어 놓으라고 설득해야겠다.

평민 고아와 공작 가문 후계자의 결혼이라니. 이것이 알려진다면 사교계가 발칵 뒤집힐 테다.

페델리안 부인은 죽어도 제 아들이 그런 불미스러운 일의 주인공이 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 * *

유디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기숙사로 돌아왔다.

시험이 무사히 끝나고, 이제 유디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르데샤와 했던 약속뿐이었다.

이제 정말 놀 일만 남았구나.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로 줄곧 바쁜 삶을 살았기에, 유디트는 지금 같은 자유로움이 낯설게 느껴졌다.

동시에 은근히 들뜨기도 했다.

당장 이번 주말에 로지에나 가문의 별장에 놀러 가기로 했는데, 미리 짐부터 싸 두는 게 좋을까.

옷장을 앞에 두고 유디트는 한참을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오랜만에 예쁜 옷을 입고 꾸미고 싶었지만, 숲에서 놀자던 르데샤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활동적인 일을 하려면 아무래도 좀 더 편한 옷이 나을 것 같았다. 마음을 바꾼 그녀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때, 기숙사 방문이 벌컥 열렸다.

벌컥-.

시원스레 열린 방문 너머에서 한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디트, 시험은 잘 봤어?”

방으로 걸어 들어오며 그녀가 활발한 어조로 물어 왔다. 밝은 표정을 보아하니 한나는 시험을 잘 본 모양이었다.

이에 유디트도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쁘진 않았던 것 같아.”

“그래? 우리 둘 다 마지막 시험을 좋게 마무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네.”

그녀의 밝고 경쾌한 웃음소리를 듣던 유디트는 문득 그녀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에 대해 물어보기도 전에, 한나가 먼저 입술을 떼며 말했다.

“아 참, 유디트. 내가 기숙사에 오던 도중 편지함을 봤는데 네 앞으로 온 편지도 있길래 함께 가져왔어.”

“편지?”

“응, 여기.”

불쑥 건네진 편지지를 받아 들며 유디트가 감사 인사를 했다.

“전달해 줘서 고마워, 한나. 덕분에 귀찮은 일 덜었네.”

말을 마친 그녀가 다시 편지 봉투로 시선을 내렸다.

딱히 내게 연락할 사람이 없을 텐데 대체 누구지?

하지만 그녀는 편지를 봉한 밀랍에 새겨진 익숙한 인장만 보고 곧 이것을 보낸 이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동시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그간 부인과 내내 편지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유디트가 먼저 안부를 알리는 편지를 보내지 않으면 답이 오는 경우는 잘 없었다.

더군다나 체이스와의 관계가 굳어진 이후에는 더욱 연락이 뜸해졌고 말이다.

불현듯 날아든 편지를 보니 왠지 징조가 좋지 않았다. 유디트는 순간적으로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설마, 페델리안 부인께서 아카데미에 퍼진 그 불순한 소문을 접하신 걸까?

어쩌면 자신을 힐난하는 내용이 적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편지가 돌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굳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유디트는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잔뜩 긴장하며 편지를 열어 보았다.

그런데 편지의 첫 부분을 읽은 유디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유디트에게,

상황이 급하니 인사치레는 넣어 두도록 하마. 부디 이해해 주렴.

사실은 얼마 전 아셀이 내게 리아나와의 약혼을 깨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 왔었단다.

그래서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자초지종을 알기 위해 아셀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는데, 그 이유가 너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하더구나.

혹시 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니?

……(중략)]

“…….”

유디트는 헛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결국 페델리안 부인께서도 상황을 파악하셨구나.

아셀이 약혼을 깬 이유에 관해 어떻게든 둘러댈 줄 알았더니만, 이렇게 곧이곧대로 페델리안 부인에게 고백했을 줄이야.

페델리안 부인은 얼마나 놀라셨을까. 아셀이 갑자기 약혼을 깬다고 통보한 데다가 그 이유가 보잘것없는 평민 때문이라니.

이런 상황을 바라고 그동안 나를 아셀의 곁에 머물도록 허락해 주신 게 아닐 텐데…….

만약 다음번에 그녀를 만난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페델리안 부인을 뵐 면목이 없었다.

어쨌든 유디트는 떨리는 눈동자로 나머지 내용도 마저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는 이미 약혼자가 있고, 그 애와 사이도 좋다고 하지 않았니.

이런 상황에 아셀이 너와 이루어지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상대 가문에게도 실례인 일이고 말이야.

해서 말인데, 네가 어떻게든 아셀이 마음을 돌릴 수 있도록 설득해 줄 수는 없겠니?

이미 여러 번 타일러 보았다만 도무지 이 어미의 말은 듣지 않아서 말이다.

그러니 너만 괜찮다면 마침 시험도 끝났겠다, 얼굴도 볼 겸 저택으로 한 번 찾아와 주면 고맙겠구나.

그때 아셀도 함께 부르도록 하마.

네가 약혼자 핑계를 대서라도 그 애의 마음을 단념시켜 줄 수 있다면 정말 고마울 것 같구나.]

몇 번이나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알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셀은 여전히 자신을 단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차분한 눈으로 페델리안 부인의 편지를 훑던 유디트는 이내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청에 따르겠다는 내용의 답신을 적었다. 그녀의 말대로 다음 주 주말에 찾아뵙겠노라고.

막상 페델리안 부인이 모든 상황을 알게 되었음에도 크게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아들의 문제에 언제까지 자비로운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눈치가 빨랐던 유디트는 이번 일을 끝으로 아셀에 관한 일을 모두 마무리 지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동시에 어쩌면 다음 주 주말에 페델리안 가문과의 기나긴 인연이 막을 내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 *

평일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주말이 찾아왔다.

손을 꼽아 기다리던 약속 당일.

무엇을 입고 갈지 고민하던 유디트가 이에 대해 한나에게 상담하자 그녀가 시원스레 결론을 내려 주었다.

‘오랜만에 멀리까지 놀러 가는 건데 당연히 예쁘게 꾸며야지!’

‘음, 그런데 야외 활동을 많이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또 숲이라 밤이 되면 좀 쌀쌀할 것 같기도 하고.’

유디트가 걱정을 털어놓자 한나가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거리며 말했다.

‘쯧쯧, 그건 나한테 맡겨. 하룻밤만 자고 올 거랬지?’

이내 그녀가 유디트의 옷장과 자신의 옷장을 번갈아 뒤지더니, 색색의 옷을 꺼내 들고 조합하기 시작했다.

곧 그녀가 봉긋한 블라우스에 어울리는 긴 모직 치마와, 그 위에 걸치면 좋을 예쁜 숄을 내밀었다.

딱 지금처럼 쌀쌀한 날씨에 좋을 것 같은 옷차림이었다.

‘여기에 바지랑 망토만 챙겨서 필요할 때 갈아입으면 돼. 햇살이 강할 것 같으면 모자도 챙겨 가고.’

한나의 조언이 딱 들어맞았는지, 거기에 머리까지 리본으로 장식해 묶자 제법 귀여운 차림새가 되었다.

게다가 덕분에 오늘처럼 일교차가 큰 날에도 조금도 춥지 않았다. 유디트는 짐 가방을 든 채로 교문 앞에 서서 얌전히 친구들을 기다렸다.

너무 일찍 나왔나 싶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다른 친구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 밝은 주황색 머리의 르데샤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모직 재킷에 발목 위로 깡총 올라오는 모직 치마를 한 쌍으로 갖춰 입었는데, 전체적으로 무척 발랄하고 귀여워 보였다.

뒤이어 나타난 르데인과 체이스도 제법 차림새에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특히 체이스는 평소와는 다르게 조끼에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매고 나타났다.

늘 흐트러져 있던 앞머리까지 웬일로 깔끔하게 쓸어 넘긴 채였는데, 그 모습이 무척 근사해서 유디트는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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