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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81화 (81/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81화

“유디트, 일찍 나와 있었네!”

그때 제일 먼저 그녀를 발견한 르데샤가 쏜살같이 달려와 곁에 섰다.

“와, 지난번 파티 때 드레스 입은 모습도 귀여웠는데 이런 평범한 사복 차림도 너무 잘 어울린다.”

금세 유디트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은 그녀가 눈을 빛냈다.

뒤이어 나타난 르데인도 유디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어쩐지 긴장한 듯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선배님, 휴일에도 뵙게 되어 기뻐요.”

“나도. 너희 별장에 초대해 줘서 정말 고마워.”

세 사람이 오랜만의 외출에 들떠 수다를 떨고 있을 때, 뒤이어 나타난 체이스가 로지에나 남매와 유디트 사이를 파고들며 말했다.

“저기, 잡담은 그만하고 빨리 출발이나 하지.”

세 사람이 잠시 벙찐 채로 그런 체이스를 올려다볼 동안, 그는 자연스럽게 유디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우리 먼저 가자.”

자연스럽게 그녀를 마차 앞으로 이끈 체이스는, 이내 기사라도 된 양 깍듯하게 문까지 열어 주었다.

“먼저 타, 유디트.”

그 모습에 르데인은 잔뜩 인상을 찡그렸고, 르데샤는 그 친절의 반의반만큼이라도 사람들에게 베풀라며 뾰족하게 소리쳤다.

정작 유디트는 체이스의 손길에 이끌려 마차에 오를 때까지 다소 긴장해서 어떤 반응도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저 자연스럽게 제 옆에 따라 앉은 체이스를 힐끔 바라보다, 물끄러미 마주친 시선에 놀라 간신히 감사 인사만을 건넸을 뿐이다.

“……고마워, 체이스.”

왜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을까.

오늘 보니 그동안 아카데미 학생들이 난리를 친 게 이해될 만큼 체이스가 무척 멋있어 보였다.

반듯해 보이는 이마나 콧대는 물론, 저 루비 같은 붉은 눈동자까지. 거기다 차가운 인상과는 반대로 은근히 다정한 행동들마저.

“별것도 아닌데 뭐. 그나저나 간밤에 잠은 잘 잤어?”

“응? 으응. 그건 왜?”

“그야 한참 가야 할 테니까, 졸리면 미리 자 두라고. 뭣 하면 내가 어깨 빌려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체이스는 제 한쪽 어깨를 툭툭 치며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저런 모습까지 귀여워 보이다니…….’

그제야 유디트는 자신의 상태가 꽤 심각하다는 걸 자각했다. 그녀가 급격하게 치닫는 상념을 털어 내기 위해 도리질을 할 때였다.

어느새 르데샤와 르데인이 투덜거리며 그들이 앉은 자리 반대편에 올라탔다.

“체이스, 먼저 올라타는 건 좋은데 아예 문을 닫아 버리는 게 어딨어?”

“오늘 가는 곳이 저희 집안 별장이란 거 잊으신 거 아니죠, 체이스 선배?”

그러고 보니 얼마나 정신이 없었던지 자신이 올라탄 이후에 체이스가 문을 닫아 버린 줄도 몰랐다.

유디트가 놀란 얼굴로 체이스를 올려다보자, 그가 찔린 얼굴이 되어 이내 머쓱한 투로 사과했다.

“아, 미안 미안. 너네도 가는 거였지. 깜빡했어.”

하지만 오히려 그 사과에 로지에나 남매는 더욱 약 올라 하며 분함을 감추지 못했다.

……왠지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생각보다 긴 여정이 될 것 같았다.

* * *

실제로도 로지에나 가문 소유의 별장은 아카데미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마차를 타고도 꽤 한참을 달렸음에도 아직도 도착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이동 시간이 길 거라고 예상했던 유디트는 아무렇지 않게 뻐근한 어깨를 주물렀다.

사실 오래 이동해서 진이 빠지는 것보다도, 함께하는 친구들이 연신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것에 더 정신이 없었다.

르데샤와 르데인은 평소처럼 사소하게 티격태격하던 중이었는데, 거기에 체이스가 한마디씩 말을 얹으며 마차 안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가는 동안 지루할 거라고 생각해서 읽을 책을 가져오긴 했지만 이래서야 느긋하게 독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창문을 통해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구경하는 것도 포기하고, 유디트는 그저 해탈한 미소를 머금고서 신나게 투닥거리는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마차가 멈추었다.

“도착했나 보다!”

르데샤가 그렇게 외치자마자, 체이스는 앉아만 있는 게 꽤 좀이 쑤셨던 모양인지 바로 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런 체이스를 뒤따라서 밖으로 나온 유디트는 곧 눈앞에 들어온 광경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우와…….”

숲길을 꽤 오래 가로질렀다 했더니, 오래된 나무들에 휩싸인 크고 고풍스러운 별장이 떡하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놀란 유디트가 입을 다물지 못하자, 르데샤는 그런 그녀의 반응이 자랑스럽다는 듯 가슴을 쭉 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잘 차려입은 몇 명의 사용인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는 것이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짐은 이쪽으로…….”

페델리안 공작저에서도 사용인들은 많았지만, 지금처럼 정중한 대우를 받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유디트는 저도 모르게 볼을 붉혔다.

하인들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외관과 마찬가지로 고풍스러운 내부가 드러났다.

조금 오래된 듯도 보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멋스러워 보였달까.

“생각보다 더 멋지다.”

유디트가 내내 감탄사를 멈추지 못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체이스가 어쩐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카르단디 가문에도 이것만큼 멋진 별장은 많아. 네가 원하면 나중에 데려가 줄게.”

그 말에 유디트가 잠시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체이스를 바라보다가, 이내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그것도 엄청 기대된다.”

“…….”

체이스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붉어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애꿎은 턱만 매만지는 사이, 어느새 그들은 2층에 당도해 있었다.

하인이 그들이 머무를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가씨들과 도련님들 각각 방 하나씩 쓰시면 됩니다.”

체이스와 같은 방을 써야 한단 사실을 알자마자 르데인의 얼굴이 금세 사색으로 변했다.

하지만 정리해 둔 방이 그것밖에 없다는 말에 그저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네 사람은 무사히 짐을 풀고 다시 1층의 커다란 벽난로 앞에 모였다.

르데샤가 모인 인원을 휘 둘러보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지금 배고픈 사람 있어?”

사실 오면서 마차 안에서 주전부리들을 꽤 집어 먹었기 때문에 딱히 배가 고프진 않았다.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르데샤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르데샤는 반응을 살핀 후 이어 말했다.

“그렇다면 당장 식사부터 할 필요는 없겠네. 그럼 우선 숲부터 산책하고 올까, 어때?”

그녀는 별장 뒤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근처에 근사한 산책로가 있거든. 상쾌한 공기를 마시면서 밤도 줍고 햇볕도 쬐면 운동도 되고 좋을 거야.”

사실 유디트는 운동과 거리가 멀었다. 움직이는 건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달까.

하지만 모처럼 이렇게 멋진 숲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또 밤을 줍는 것도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았고 말이다.

“좋아!”

유디트가 힘차게 외치자 뒤따라서 체이스와 르데인도 긍정을 표했다.

“뭐, 나쁘지 않네.”

“저도 좋아요.”

모두가 찬성하자 르데샤가 악마처럼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래, 그럼 다들 나가 보자고.”

그렇게 유디트 일행은 자루와 집게를 들고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울창한 숲은 르데샤가 자랑한 대로 무척 아름다웠다. 조금 쌀쌀하긴 했지만 햇빛이 너울져 나뭇잎이 반짝이는 광경에 모두가 넋을 잃을 만큼.

다만 거친 흙길이라 그런지 별로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숨이 차오르는 것이 다소 흠이긴 했다.

유디트가 힘겹게 호흡을 가다듬는 그때, 한창 앞서 나가던 르데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생각해 봤는데 밤도 그냥 주우면 시시할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내기 하나 할까?”

갑자기 내기라니. 유디트는 눈을 끔벅거리며 되물었다.

“무슨 내기?”

“밤을 가장 적게 주운 사람이 가장 많이 주운 사람의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는 거야, 어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체이스가 들고 있던 집게를 위협적으로 손바닥 위에 두드리며 눈빛을 달리했다.

그리고 설렁설렁 뒤를 따라오던 르데인 또한 질질 끌고 있던 자루를 바짝 위로 들어 올리며 낯빛을 바꾸었다.

그 둘의 모습을 본 르데샤는 유디트를 쿡쿡 찔렀다.

“저거 봐, 유디트. 내기를 한다고 하니까 두 사람 다 완전 눈빛부터가 변했어.”

“그러게, 얼마나 대단한 소원을 빌려고 저런담?”

“아, 괜히 내기하자는 이야기를 꺼냈나? 사실 내기하면 당연히 내가 이길 줄 알고 말을 꺼내 본 건데…….”

르데샤의 얼굴에는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뒤에서 르데인을 견제하는 체이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넌 그냥 포기하는 게 좋을걸?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만 한 샌님이 어떻게 날 이기겠다고 그래.”

그러나 르데인도 체이스의 기세에 지지 않았다. 그도 자신만만한 어조로 답했다.

“아니요, 지는지 이기는지는 해 봐야 아는 거죠.”

“하, 그건 내가 무투 대회에서 매년 우승해 왔단 건 알고 하는 얘기겠지?”

“……물론 선배님이 재빠르고 체력이 좋으신 건 알지만 저도 어릴 때부터 누나랑 이 숲을 많이 쏘다녀서 누구보다 지리를 잘 안다고요.”

“어쭈.”

그들의 기세등등한 대화를 듣는 동안, 문득 떠올린 사실에 유디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이 중에서 진짜 강력한 꼴찌 후보는 바로 자신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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