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84화
그렇게 결국 체이스와 유디트, 르데샤와 르데인으로 나뉘어 각각 배에 올라타기로 했다.
어렸을 때 타고 놀았었다는 르데샤의 말처럼 배는 만들어지고 세월이 꽤 흐른 것으로 보였다.
설마 체이스와 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서지는 건 아니겠지?
만약 혹시라도 배가 부서져 호수에 빠지면 어떡하지?
잠깐 그런 걱정도 들었으나 금방 그쳤다.
불안불안한 마음과 함께 유디트가 조심스레 배에 올라탔다.
발을 내디뎠을 때 잠시 휘청일 뻔했으나 빠르게 중심을 잡았다.
비좁은 배 안은 금방이라도 호숫물이 흘러 들어올 것처럼 넘실거렸다.
하지만 살짝 물이 튀기는 것 외엔, 꽤 안정감이 있어서 어느새 유디트는 겁을 먹던 것도 잊고 주변 경치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호숫물이 흐르는 대로 흘러가다 보니, 어느새 유디트와 체이스는 로지에나 남매와 꽤 멀어져 있었다.
르데샤 일행이 거의 점처럼 조그맣게 보이게 되었을 때, 유디트는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하고 싶은 말? 그게 뭔데?”
체이스는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유디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받고 있자니 어쩐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예전부터 체이스에게 말을 해 줘야겠다고 결심하긴 했는데, 막상 이 순간이 다가오니 왜 이렇게 떨리는지.
그녀는 자신이 어째서 아셀을 좋아하게 됐고, 그런 와중에 마음에도 없는 약혼을 결심하게 됐는지 그 속사정을 밝히고자 했다.
마침 분위기도 차분하고 사람도 단둘뿐이겠다, 속에 담아 둔 얘기를 꺼내기엔 지금이 딱 제격인 듯한데.
오늘을 놓친다면 앞으로도 영영 이것에 대해선 말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인데.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머리와는 다르게 입술이 딱 달라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얘긴데 이렇게 망설이는 거야?”
체이스는 슬슬 겁이 났는지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더 시간을 끌었다간 괜한 오해만 심어 주게 될 것 같아, 유디트는 눈 딱 감고 입을 열었다.
“그게, 우리가 앞으로 함께하게 된다면 너도 미리 알아 둬야 할 것 같아서. 아마 너도 계속 궁금했을 거야. 내가 왜 모르는 사람과의 약혼을 결심하게 됐는지.”
“…….”
예상대로 체이스는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놀란 얼굴을 했다.
혹시나 듣기 싫어하면 어쩌나 했는데 그의 눈빛에 호기심이 어려 있어, 유디트는 안심하고 말을 이었다.
“이건 조금 부끄러운 가정사이긴 한데, 내 부모님은 어릴 적에 모두 돌아가셨어. 그런데 아버지가 살아 계실 적 페델리안 가문의 주치의로 일하셨거든. 그러다 병에 걸려 돌아가시게 되자…… 페델리안 부인이 고아가 된 나를 거둬 키워 주셨어.”
이야기를 하며 유디트가 자조하듯 웃어 보였다.
“자비롭게도 말이야. 그 일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정말 감사하고 있어.”
잠자코 얘기를 듣는 체이스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걸 지켜보며 유디트는 말을 이었다.
“그러다 보니 난 어린 시절부터 아셀과 어울리며 친하게 지냈어. 가족이 없는 내 곁엔 항상 아셀이 있어 주었고, 그러는 사이 나도 모르게 아셀에게 마음을 품게 되더라.”
잠시 체이스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이내 짧게 내뱉었다.
“……그렇구나.”
“그런데 페델리안 부인께서는 우리가 나이가 들어 갈수록, 아셀이 나와 스스럼없이 지내는 게 마음에 걸리셨던 것 같아.”
이 대목에 이르자, 체이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겁이 났던 유디트는 자연스레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알겠지? 아셀을 좋아하면서도 너와 약혼하게 된 건 페델리안 부인의 지시 때문이었어. 그리고 어릴 때부터 부인에게 은혜를 입은 난 도무지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고.”
말을 마친 유디트가 면목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로 인해 네게 큰 상처를 주게 됐다면 정말 미안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
“내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해서 놀랐지? 조금 갑작스럽게 들리겠지만, 너에게는 이런 상황을 말해 주고 싶었어.”
이제야 전후 사정을 모두 알게 된 체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털어놓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나도 앞으로 무슨 일이든 네게 알리도록 할게.”
체이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이제 유디트에게 남은 비밀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왠지 체이스와 한층 더 가까워진 것만 같았다.
역시 속사정을 털어놓길 잘했어.
유디트는 비로소 마음이 홀가분해짐을 느꼈다.
“그런데, 유디트.”
조금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고 싶었는지 체이스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화제를 전환했다.
“무슨 소원 빌지 생각해 봤어? 어제 내가 네 소원 들어주기로 했잖아.”
유디트는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아…… 그거 정말 들어주게?”
“당연하지. 내기를 했던 거니까.”
사실 체이스가 이렇게 먼저 나서서 소원을 말해 보라고 할 줄은 몰랐다.
만약 은근슬쩍 그냥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어제 열심히 주운 밤들을 다 양보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데, 그 이상을 바라는 건 너무 염치가 없는 일인 것 같았다.
그렇기에 유디트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네게 바라는 소원은 딱히 없어. 마음만으로도 고마워.”
“정말이야?”
“응, 어차피 너는 소원이 아니더라도 나한테 항상 잘해 주니까.”
별생각 없이 말했는데 막상 말을 하고 나자 조금 창피해졌다. 체이스는 그런 유디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유디트가 호숫가 저 멀리를 보면서 애써 시선을 피하고 있을 때, 체이스가 중얼거렸다.
“……혹시 일전에 시험이 끝난 날, 카렐 교수님이 나한테 따로 대화를 나누자면서 데리고 갔던 거 기억나?”
아, 그런 일도 있었지.
그러고 보면 카렐 교수님은 무슨 대화를 하고 싶으셨길래 체이스만 따로 불러내셨을까?
유디트의 궁금증을 알아차렸는지 체이스가 곧 그녀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그때 카렐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 네가 수습 교수 자리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그런데 선뜻 수락하지 않는 이유가 나와의 약혼 때문인 것 같다고 말이야.”
“……교수님이 네게 그런 말씀을 하셨어?”
그야 카렐 교수에게 말했던 대로 유디트는 다른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 큰 흥미와 보람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실제로 이번 시험에서 성적이 많이 오른 체이스를 보며 앞으로도 체이스처럼 졸업이 힘든 학생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면 어떨까, 상상을 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평민의 신분으로 아카데미의 교수직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도 들었거니와.
졸업 후에는 어차피 체이스와의 약혼이 내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유디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래서 어쩌면 교수직에 관심이 없다고 스스로 되뇌며 암시를 걸어 왔던 건지도 모른다.
헛된 일에 기대를 품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으니까.
그러는 사이 체이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교수님과의 대화로 나도 그동안 외면하고 있던 상황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봤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네가 나와의 약혼에 얽매여서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되는 건 정말 싫더라고.”
체이스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니까 솔직한 네 의견을 말해 줘. 나에게도 네 진로를 함께 고민할 기회를 줘. 만약 네가 교수로 일하고 싶어 한다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 테니.”
“…….”
“물론 우리 가문에서는 졸업하자마자 결혼하는 걸로 알고 계실 테지만, 미루고 싶다면 그건 내가 잘 설득을 해 볼게.”
유디트는 예전에 벌 청소를 하면서 체이스의 가정사를 전해 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체이스는 가족들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걸로 보였는데, 나를 위해서 선뜻 가족들을 설득해 보겠다고 말해 주다니.
그리고 체이스가 이렇게 제 미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해 주고 있는지도 몰랐다.
유디트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이렇게까지 말해 줘서 고마워, 체이스. 사실…… 카렐 교수님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눴을 때까지만 해도 아예 포기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네 말대로 두 가지 다 병행이 가능한 거라면…… 나 한번 해 보고 싶어. 네가 도와준다면 정말 기쁠 것 같아.”
원래는 수습 교수직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꿈도 꾸지 않았었지만, 유디트는 한번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체이스가 기쁘다는 듯 활짝 웃어 보였다.
“그래, 얼마든지.”
“그런데 혹시 이것 때문에 어제 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 거였어?”
“……뭐, 얘기도 꺼낼 겸 겸사겸사?”
체이스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모습이 왜 이다지도 뭉클하게 느껴지는지.
유디트가 기쁜 듯이 웃어 보였다. 이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을 거라는 듯이, 해맑게.
* * *
즐거운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페델리안 저택에 찾아가기로 한 날이 되었다.
그곳에 향하기 전 유디트는 체이스에게 미리 언질을 해 두었다.
이러저러한 상황이 되어 불려 가게 됐는데, 얘기를 잘 마무리하고 오겠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현재, 페델리안 가문의 응접실.
유디트는 초조함에 앞에 놓인 홍차를 잡고 홀짝거렸다.
지난 편지에서 페델리안 부인은 화난 기색을 내비치진 않았지만, 아마 지금 꽤 인내심이 간당간당한 상황일 것이다.
왜냐하면 귀한 제 아들이 볼품없는 평민 하나에 휘둘려 약혼을 깨겠다고 말을 꺼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부인께서 당부했던 대로 내가 처신을 잘해야만 해. 아셀에게 내 입장을 확실히 표현해야 이 상황도 끝이 나겠지.
유디트의 두 눈이 결연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