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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85화 (85/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85화

유디트가 잔뜩 긴장하고 있던 그 순간, 응접실 문이 열리더니 한 여자가 들어왔다.

바로 페델리안 부인이었다.

“유디트,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구나. 잠깐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서 말이야.”

그녀의 고상하고 우아한 모습은 일 년 전 봤을 때 모습 그대로였다. 유디트는 재빨리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하며 말했다.

“별로 기다리지도 않았는걸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뭘 그리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그러니, 우리 사이에.”

부인은 여느 때처럼 다정하게 웃어 보인 뒤 유디트에게 앉으라 손짓해 보였다.

온화해 보이는 태도 어디에서도 자신에 대한 노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유디트는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여기까지 부른 이유는 편지를 통해 대충은 알고 있을 테지만…….”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선 너를 통해 정확히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부터 듣고 싶구나. 아카데미에서 최근에 불미스러운 소문이 돌고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이니?”

역시 소문에 대해서도 이미 들어 알고 계셨어.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간신히 태연한 낯을 했다.

곧바로 본론부터 대답할까 싶었지만, 진정성을 위해 그동안의 심경을 모두 토로하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아셀에 대한 마음도 완전히 접었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내 유디트가 그간의 일을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부인의 은혜에 외람되지만 자신이 오래전부터 아셀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 하지만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 생각해 단념하게 되었다는 것.

그러다 부인의 ‘좋은 제안’을 받아 다른 좋은 사람과의 약혼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것까지 그간 겪었던 생각들을 모두 말이다.

잠시 말을 멈춘 유디트가 부인의 눈치를 살폈다.

얼굴을 굳힌 채 아무 말이 없는 부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아직 기분이 상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계속해 보렴.”

“……네. 그런데 이후로 부인께 편지를 보내 알려드렸듯, 이제는 아셀을 잊고 체이스와 잘해 보려던 시점이었어요. 아셀이 마지막으로 소꿉친구끼리 즐겁게 놀자고 절 파티의 파트너로 초대했는데…….”

유디트가 잠시 입을 벙긋거렸다. 그다음 일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도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아셀이 소문이 거짓이라고 해명했던 것을 기억해 내 거짓을 입에 담았다.

“누군가 우연히 저희가 함께 있는 걸 보고 악의적으로 부풀려 소문을 낸 것 같아요.”

말을 마치자마자 응접실 안에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부인은 잠시간 아무 말이 없다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난 유디트를 믿었단다. 약혼자도 있는데 그런 무분별할 짓을 할 아이가 아니라고 말이야.”

그리곤 그녀가 굉장히 자상한 어머니 같은 표정을 지으며 유디트를 응시했다.

“그러면…… 유디트는 현재 아셀에게 아무런 마음이 없단 말이지?”

“네, 편지에서도 말씀드렸듯 이젠 완전히 마음을 접은 상태입니다. 무엇보다 약혼자가 된 체이스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서요. ……아셀과의 관계는 이제 좋은 추억으로만 남기고 싶습니다.”

마치 항변하듯, 유디트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그러자 부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왜 아셀은 갑자기 파혼을 하고 너와 체이스의 관계를 반대하려는 거니? 그 애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럴 애는 아닐 텐데…….”

하기야, 그 좋은 자리를 마다하고 평민 소녀에게 구애를 하겠다고 나서는 게 부인으로서는 의아했을 만하다.

그동안 아셀이 자신에게 특별히 좋아한단 티를 낸 적도 없었으니 말이다.

유디트는 이번에도 솔직하게 설명했다.

“사실, 아셀에게 한번 제 마음을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좋은 대답을 듣진 못했지만 뒤늦게 아셀도 그럴 마음이 든 모양이에요. 그렇지만 부인도 아시다시피…….”

“이제 유디트는 체이스를 좋아하게 되었고?”

“네, 그러니 이젠 평생 체이스에 대한 신의를 지키며 살고 싶어요. 아셀의 마음은 고맙지만 이 이상은 제게 폐가 될 뿐입니다.”

유디트가 딱 잘라 대답했다. 그러자 응접실에 다시금 긴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분위기는 처음 대화를 나눌 때보다 훨씬 풀어져 있었다.

부인은 유디트의 답변이 굉장히 흡족했던 모양인지 그녀가 어렸을 때나 보았던 그런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이내 박수를 짝 쳤다.

“들었니, 아셀?”

그 말에 화들짝 놀란 유디트가 자연히 부인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러자 아까는 눈치채지 못했던, 응접실에 놓인 거대한 피아노 너머에 한 사람이 천천히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바로 아셀이었다.

“부인, 이게 대체…….”

깜짝 놀라는 유디트를 두고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아셀 앞에서는 네가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서 말이야.”

자신이 시험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유디트는 잠시 솜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지만, 이내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토해 냈다.

결국 부인이 원하는 답변을 내놓은 데다, 아셀도 이 일을 통해 완전히 자신을 단념하게 되리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디트의 예상대로였다.

“……유디트, 체이스를 좋아한다는 게, 정말이야?”

언제나 침착하던 아셀의 표정이 놀랄 만치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니 왠지 목이 막혀 오는 것 같아, 유디트는 간신히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어째서? 어떻게 그렇게 마음이 쉽게 변할 수 있지?”

아셀은 유디트가 체이스를 좋아한다는 현실이 믿겨지지 않는 듯했다.

그에게 납득할 만한 대답을 돌려주기 위해, 유디트는 한참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아셀, 예전에 네가 졸업 이후에 내게 뭘 할 거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지. 네 보좌관으로 일하라면서 말이야.”

“……응.”

“그리고 그때 난 너에게 싫다고 대답했는데, 넌 쉽게 납득하지 못하고 날 몇 번이나 설득하려고 했지. 그건 내가 네게 더 이상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

“…….”

거기까지 말한 유디트가 한번 숨을 들이마시고는 대답했다.

“하지만 체이스는 달라, 그 애는 나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내가 뭘 좋아하고 하고 싶어 하는지 늘 의견을 물어봐 줘.”

“……고작 그것 때문이야? 그건 나도 얼마든지…….”

그때 유디트가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곧장 그의 말을 잘랐다.

“아셀, 바로 네 이런 점이.”

그리고 이런 매정한 말을 하는 스스로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웃어 보이며 말을 끝맺었다.

“이런 점 때문에 더 이상 널 좋아하지 못한다는 거야.”

아셀의 얼굴은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희미한 웃음기조차 없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유디트는 놀랍지 않았다. 왠지 언젠가부터 그의 그런 어두운 일면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그동안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함께해 왔던가. 그리고 얼마나 소중한 관계였던가.

하지만 나이를 먹고 성장함에 따라, 익히 알던 사람들과 헤어지고 새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과정은 어쩌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변화일 테지.

유디트는 이제 더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아셀 또한 자신처럼 열린 마음으로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가길 바랐다.

단지 그 상대가 자신이 아닐 뿐.

“그럼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부인.”

말을 마친 유디트가 태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난처한 표정을 짓던 부인도 따라 일어났다.

“그래, 오느라 고생 많았다. 이런 분위기에 식사까지 하고 가라고 할 수도 없고. 언제 한번 약혼식에나 불러 주렴.”

오늘 부인은 자신이 이런 대답을 내놓으리라고 예견해 이런 도박을 벌인 걸까?

하지만 여전히 말간 낯으로 웃고 있는 부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조금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네, 물론이죠, 부인. 그때 가서 다시 편지 드리겠습니다.”

빠르게 저택을 벗어난 유디트는 곧바로 돌아가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유디트는 살짝 당황했다. 이미 그 안에는 예쁘게 포장된 선물들이 가득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물더미 위에는 페델리안 부인이 쓴 것 같은 카드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졸업을 미리 축하한다, 페델리안 부인으로부터.]

그것을 본 유디트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이내 덜컹거리는 마차 속에서 눈을 감았다.

* * *

길었던 주말이 끝난 후, 유디트는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주말 동안 유디트는 고뇌에 고뇌를 거듭했다.

체이스의 말대로 수습 교수 제안을 받아들여 볼지 말지를 고민하는 유디트에 한나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했다.

“유디트, 그걸 뭘 고민하고 있어? 이 아카데미의 교수가 된다는 게 얼마나 큰 명예직인데? 그리고 너도 다른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재밌다며?”

“응, 그렇게는 한데 아무래도 현실적인 요소가-.”

한나는 계속 망설이는 유디트가 답답했는지 중간에 그녀의 말을 끊은 채 불쑥 내뱉었다.

“게다가 네가 수습 교수를 하고 싶다고 하면 체이스가 가문을 설득해 보겠다고 했다면서? 네 약혼자까지 너를 응원해 주고 있는데 왜 사서 걱정을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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