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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86화 (86/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86화

한나는 유디트가 망설이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에 유디트가 더듬더듬 이유를 설명했다.

“그래도 이 일로 체이스는 가족들과의 관계가 나빠질 수도 있고…….”

물론 이미 나쁜 것 같아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제 편을 들어주다가 더욱 악화되기를 바라진 않았다.

“그건 걔가 알아서 하겠지.”

“……그리고 귀족 학생들이 평민인 나를 교수로 인정해 줄지도 문제야.”

“물론 그런 고충이 아예 없을 수는 없겠지. 하지만 네 직속 상사가 바로 카렐 교수잖아! 속으로는 너를 어떻게 생각하든 카렐 교수님이 무서워서라도 네 앞에선 꼼짝도 못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한나의 말은 매우 그럴싸하게 들렸다. 그간 쩔쩔매며 고민하던 것이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현실이 그토록 호락호락할 리가 없다 보니,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밤이 저물었다.

침대에 누운 채로 유디트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 결국, 이 모든 문제들은 카렐 교수와 면담을 통해 상담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수업을 모두 마치자마자 유디트는 카렐 교수의 연구실로 찾아갔다.

학기 말이라 교수들도 한창 바쁠 시기였다. 괜히 바쁜 그의 시간을 뺏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며, 유디트가 방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벌컥 하고 문이 열리더니 카렐 교수가 무척 귀찮다는 얼굴로 등장했다.

“대체 누구…… 아니, 유디트. 네가 갑자기 찾아오다니, 무슨 일이지?”

카렐 교수는 당황스럽고 놀라 하면서도 선선히 그녀가 들어올 수 있도록 문에서 비켜섰다.

주춤주춤 안으로 걸어 들어간 유디트가 잠시 입술을 깨물다 이내 목적을 밝혔다.

“교수님, 괜찮으시다면 잠시 상담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러자 카렐 교수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도, 곧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치 유디트가 언젠가는 찾아오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교수가 정성스레 차를 우려내 왔다.

“안 그래도 네가 내게 면담을 청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졸업 전까지 아무 말도 없을까 봐 걱정이었는데 오늘이라도 찾아와 주다니 다행이구나.”

“…….”

“나를 찾아온 걸 보면 체이스와 벌써 대화를 나눈 거겠지? 그래 봬도 그 녀석이 네 생각을 많이 해 주는 것 같더구나.”

“네, 체이스가 먼저 제안을 해 줘서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그런데 몇 가지 걸리는 점이…….”

유디트가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을 상세하게 카렐 교수에게 털어놓았다.

평민이 수습 교수가 되면 겪는 난항에서부터, 근무 시간과 환경 등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자 카렐 교수는 이미 그녀가 물어 올 질문들을 단단히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상세히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근무 시간은 과목에 따라 유동적인 편이지만 회계학은 평상시엔 그리 바쁘진 않다. 물론 상황에 따라 무척 바쁠 때도 있긴 하지만, 그건 내 재량껏 네 사정에 맞춰 주마. 그리고 네가 원한다면, 내 보조를 하는 것 외에 자율껏 보충 수업을 진행해도 좋아.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그는 마지막으로 유디트가 수습 교수가 된다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비단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교수들 또한 유디트의 성실함과 우수함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말까지도 말이다.

“무엇보다 네가 수습 교수가 된다면, 앞으로 우수한 학생이지만 평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재능을 펼치지 못하는 학생들이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지 않겠니.”

내 선택이 다른 학생들의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니, 그건 지금껏 생각해 보지 못했던 관점이었다.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인생에서 이렇게나 많은 선택지가 있었다니.

아셀과의 짝사랑으로 괴로워하며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고 체념하던 이전과는 다르게, 유디트의 마음속에 새로운 희망이 피어났다.

기나긴 면담 끝에 유디트는 마침내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교수님, 저 수습 교수직 한번 맡아 보고 싶습니다.”

* * *

페델리안 저택.

유디트가 응접실 밖으로 나간 후, 응접실 안에는 싸늘한 공기만이 맴돌았다.

페델리안 부인은 저도 모르게 아셀의 눈치를 살폈다.

아셀은 유디트가 나가고 간 지 꽤 시간이 흘렀건만 그녀가 떠나고 남은 자리를 계속해서 보고 있었다. 조그마한 흔적이라도 찾는 사람처럼.

네가 아무리 그런다고 하더라도 이미 떠난 유디트가 돌아오진 않는단다.

그런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으나 꾹 참았다.

웬만하면 아셀이 먼저 제게 말을 걸기를 기다리려고 했는데, 저 태도를 보고 있으니 그게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었다.

페델리안 부인은 결국 이어지던 침묵을 나서서 깨고 말았다.

“아셀.”

이름을 부르자 아셀이 페델리안 부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처럼의 표정이었지만 페델리안 부인은 그의 눈동자를 통해 그가 복잡한 심경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유디트, 그 아이가 그렇게나 아셀에게 큰 의미였던 걸까? 겨우 말 몇 마디 들었다고 저런 반응이라니.

페델리안 부인은 어둡게 가라앉아있는 아셀의 눈동자를 보고는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아셀의 눈동자에 한껏 당황한 페델리안 부인의 모습이 비쳤다.

그걸 보고서야 그녀는 혀를 깨물어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아셀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줄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 아셀이 굳게 다물려있던 입술을 열었다.

“혹시 어머니는 유디트가 이런 답변을 하리란 걸 예상하고 계셨나요?”

“뭐?”

“유디트가 이렇게 저를 단호하게 거절할 걸 미리 짐작하고 계셨던 거냐고 여쭤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더러 미리 숨어 있으라고 지시하신 게 아닙니까? 유디트의 솔직한 속마음을 알아보자면서요.”

이걸 뭐라고 답변해야 하지?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페델리안 부인이 해야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무조건 시치미를 떼어야만 했다.

애초에 아셀에게 유디트를 포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그녀를 페델리안 저택으로 불러들인 것임을 들켜서는 안 되었다.

페델리안 부인은 한껏 당황한 듯 연기하며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니. 유디트는 내가 오랫동안 지켜보며 후원한 아이야. 신분이 좀 낮기야 하지만 본질은 괜찮은 아이라는 걸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지 않니. 그래서 만약 유디트의 마음이 너와 같기만 하다면, 나도 너와 유디트의 관계를 전적으로 찬성할 생각이었다.”

자꾸 거짓말을 하려니까 입술이 바짝 말라 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입 밖으로 들리는 목소리는 꽤 자연스러웠다. 스스로가 들어도 그럴듯하게 들렸다.

이 정도면 아셀도 이해하고 넘어가 주지 않을까?

하지만 길게 이어진 페델리안 부인의 말을 들은 그는, 전혀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 평소에 습관처럼 입가에 매달고 있었던 작은 미소조차 온데간데없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페델리안 부인의 손끝이 뻣뻣하게 굳어 왔다.

그녀는 살면서 아셀과 사이가 틀어진다든가 하는 일 따윈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남들은 한 번씩은 사춘기가 와서 자식이 말썽을 피운다거나 한다는데 그에 비해 아셀은 한 번도 페델리안 부인의 속을 썩인 적 없는, 늘 의젓한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어쩌면 유디트 때문에 아셀과의 사이가 틀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아셀은 잔잔하고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실 유디트와 약혼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을 때, 어머니께서 너무 순순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셔서 의아했었어요. 왜냐하면 제가 아는 어머니는 그런 분이 아니시니까요.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어머니는 애초에 유디트 쪽에서 저를 거절할 걸 알고 그렇게 자비로운 태도를 보이셨던 거군요. 제 선택을 존중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차피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니까.”

계속되는 아셀의 말을 두 귀로 듣고 있으면서도 페델리안 부인은 어떤 반응도 보일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니란다,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구나, 따위의 말을 하고 싶었으나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결국 오늘도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되었군요.”

그렇게 마지막으로 말을 하곤 아셀은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페델리안 부인은 그런 아셀을 차마 잡지 못했다. 힘없이 툭 떨궈진 손에 손가락만 움찔 떨었다.

다 아셀을 위한 일이었다. 장차 공작 위를 이을 아셀이 평민과 약혼한다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할 테니까.

물론 자신의 속마음을 안다면 아셀이 원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장엔 자신을 원망한다 해도 어쩔 수 없으리라.

아셀이 보잘것없는 상대와 맺어져 비난받는 것보단 이편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너는 어쩌면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언젠가 좀 더 나이가 들게 되면 나를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한단다.

채 하지 못한 말만이 목구멍을 맴돌다가 사라졌다.

아까 유디트가 떠난 빈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아셀이 조금 답답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저가 그러고 있었다.

아셀이 나간 뒤로도 한참을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맞은편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서야 페델리안 부인은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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