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8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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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교수와의 면담이 끝나고 나오자 어느새 해는 저물어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온통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겨울에 접어드는 날씨라 해가 짧아진 건 알고 있었지만 벌써 이렇게 깜깜해질 줄이야.
불어오는 바람에 유디트는 목을 조금 움츠렸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가엔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는데 하나같이 앙상하기만 했다.
사실 볼품없는 광경이었으나 유독 거기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만약 유디트가 수습 교수가 되지 못한다면 이런 풍경을 보는 것이 오늘로 마지막일 테니까.
지금 이 겨울이 아카데미에서 보는 마지막 겨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카렐 교수와의 면담에서 수습 교수직을 받아들이기로 결정은 내렸으나, 결정을 내렸다고 해서 고민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앞으로 어떤 일들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겨났다.
유디트가 선택한 길은 평범하지도 않았으니 쉬이 미래를 상상할 수 없었다.
또 괜히 자신 때문에 체이스를 곤란하게 만드는 건 아닌가 싶어서 어렴풋이 미안함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잠시 고민을 접어 두자. 혼자 고민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
앞으로의 고민은 체이스와 함께 나누면 될 것이다.
유디트는 고민을 멈출 겸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 돌아보았다.
왠지 며칠 사이의 일들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그만큼 수많은 일들을 겪었다.
불과 몇 개월 전, 졸업을 한 뒤 보좌관이 되어 달라는 아셀의 말에 눈물을 흘렸던 그때는 짐작도 하지 못할 만큼의 일들을.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유디트가 아셀에 대한 마음을 접은 일을.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셀이 그녀에게 마음을 품게 될 줄.
잠시 머물다 기숙사로 돌아가려 했던 유디트는 마음을 바꿔 좀만 더 이 풍경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녀는 냉기로 차가워진 벤치 위에 조심스레 앉았다.
어차피 기숙사로 돌아간다 해도 지금처럼 머릿속이 심란한 채로는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할 테니까.
침대에서 괜히 뒤척거리다가 한나의 숙면에 방해가 될지도 몰랐다.
그녀는 추위에 다리를 떨며 어깨를 감싸 안았다. 코끝에 감겨드는 공기가 상쾌했다.
이제 체이스에게 이 소식을 알려야겠지.
물론 체이스는 내 선택을 존중해 주겠다고 했고 원하는 대로 행동하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그도 각오가 필요한 일일 테니 말이다.
체이스는 자신이 카르단디 가문을 설득해 보겠다고 했지만, 그가 혼자 고생하는 동안 자신은 가만히 손을 놓고 있어도 되는 걸까?
언제나 자신을 위해 주는 그에게 어떻게 힘이 되어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왜 체이스가 혼자서 가족들을 설득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지? 나도 함께 가면 되는 거잖아.
사실 약혼을 미루고 싶어 하는 당사자는 유디트였다. 그런데 당사자만 쏙 빠지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체이스의 부모님께는 인사를 드리지 못했으니 이번에 약혼을 치르기 전에 겸사겸사 정식으로 인사를 드려도 좋을 것 같았다.
물론, 좋은 이유로 찾아뵙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쪽 집안에서 약혼을 제의했다곤 해도, 평민인 며느리를 그렇게 달가워하며 맞이하진 않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체이스 혼자 껄끄러운 자리를 견디게 놔둘 순 없었다.
‘체이스가 괜찮다며 거절해도 내가 꼭 카르단디 저택에 방문하고 싶다고 말해 봐야겠어.’
유디트는 두 주먹을 꼭 쥔 채로 결심했다.
복잡한 고민을 마치고 이제 기숙사로 돌아가려던 그 순간이었다. 문득 멀리 놓인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성이는 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은 곧장 유디트를 향해 다가오고 있어서, 사위가 어두운 와중에도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어두운 밤 속에서도 환히 빛나는 낯익은 얼굴, 바로 아셀이었다.
유디트는 그에게 인사를 건네야 좋을지 그냥 모른 척 지나쳐야 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가까워지고 있는 걸 보아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곧 지척까지 다가온 그가 여상한 말투로 물었다.
“왜 늦은 시간에 나와 있는 거야?”
미소 한 점 없이 무뚝뚝하게 굳어 있는 얼굴은 이제 낯설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유디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카렐 교수님과 늦게까지 상담을 했어. 그러는 너는 왜 나와 있는 거야?”
“……잠이 오질 않아서.”
말을 마친 그가 유디트를 빤히 주시했다. 물어보지 않아도 그 이유가 자신 때문이란 걸 알 것 같았다.
유디트는 애써 모른 척하며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래, 그럼 난 이제…….”
“유디트, 뭐 하나 질문 좀 해도 될까?”
자리에서 일어난 유디트의 앞에 아셀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차가운 공기와 함께 아셀의 체향이 물씬 끼쳐 왔다.
다만 전처럼 가슴은 두근거리지도, 설레지도 않았다. 오히려 불안한 기분만 엄습해 올 뿐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무시하고 가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해 유디트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유디트의 허락은 떨어졌지만 두 사람 사이엔 여전히 침묵이 흘렀다. 한동안 유디트를 내려다보던 아셀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저 전부터 궁금했을 뿐이야. 너와 나 사이에 쌓인 인연이 한두 해가 아닌데…….”
“…….”
“넌 어떻게 그렇게 날 쉽게 끊어 낼 수 있었는지. 그러다 결국 나 아닌 체이스를 택한 이유가 뭔지.”
“……아셀.”
“나는 아무리 고민해 봐도 모르겠어서.”
만약 이 말을 다른 사람이 했다면 오만하게도 느껴질 만했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아셀이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아셀은 어릴 때부터 친구 혹은 가족 같은 존재로서 누구보다 유디트의 곁에 가까이 있어 주었다.
그로 인해 아셀에게 빚진 게 한두 가지가 아니란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유디트가 오래도록 입을 열지 못하자 아셀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이었다.
“물론 넌 이 모든 게 나를 위해서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라고 앞으로의 우리 관계에 대해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게 아닌데……. 넌 그전부터 어떻게든 날 계속 밀어내려고 했잖아.”
“…….”
“네 말대로 난 체이스와 많은 게 달라. 하지만 유디트 네가 변화했던 건 훨씬 전부터였어. 말해 봐, 유디트. 내 무엇이 널 그렇게 괴롭게 만든 건지.”
언뜻 보면 아셀은 모든 걸 체념한 것 같기도, 도리어 그만큼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이만큼 감정적으로 나오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라 유디트는 선뜻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셀은 이 모든 일에 대한 답을 들을 자격이 있었다. 어쩌면 모든 것이 마무리 지어진 지금에야말로 꺼낼 수 있는 말인지도 몰랐다.
유디트는 저도 모르게 한차례 깊이 숨을 들이키며 입을 열었다.
“아셀, 내가 널 좋아했었다는 말은 진짜야.”
“…….”
“그 모든 상황을 고려했음에도 너에 대한 마음을 참지 못했을 만큼 말야. 너도 기억하지, 내가 너에게 처음으로 고백했던 순간.”
가만히 아셀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왠지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한순간에 입장이 뒤바뀌어 버리다니.
유디트는 다른 점이라면 유디트는 감정을 드러낼 용기가 없어서 꼭꼭 숨겨 왔던 것이었으며, 아셀은 있는 그대로 드러낸 점이었다.
“하지만 그때 넌 내 고백을 믿지 않았고, 새로운 약혼 소식을 전해 오기까지 했어. 그리고 그 이후부터 난 오랜 시간 너에 대한 마음을 끊어 내고자 노력했어.”
“그건-.”
“알아. 그 약혼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단순히 너와 나의 시간이 엇갈렸을 뿐이라는 걸. 그런데 너를 끊어 내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나에게 놓칠 수 없는 새로운 것들이 점점 생겨나더라.”
이제는 아연해진, 아셀의 멍한 표정 앞에서 유디트는 매끄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동안 내 모든 걸 지탱하던 건 너였는데, 네가 아니면 안 될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새로운 친구들, 그리고 약혼자, 나한텐 없는 줄 알았던 꿈까지 포함해서 많은 걸 가지게 됐어.”
“…….”
“그러고 나니 깨닫게 되더라.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위한다는 이유로 도리어 서로를 속박해 온 걸지도 모르겠다고 말이야.”
“유디트-.”
“아셀, 분명히 말할게. 우린 아직 어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많아.”
유디트는 아셀을 향해 진심으로 충고했다.
“그리고 세상에는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 일이 이 말고도 더 많을 거야. 너도 나중에 나에 대한 마음을 떨치고 나면 알게 될걸. 그땐 그렇게 힘들었던 일들이 막상 돌이켜 보고 나니 아무것도 아니었단 걸.”
“……만약 없으면?”
아셀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너 말고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면? 네가 내 운명이었다면? 그런데 내가 바보같이 너를 놓친 거라면 어떡하지?”
그의 청회색 눈동자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유디트도 그가 지금 느낄 상실감이 얼마나 클지 알기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오랜 소꿉친구로서, 곁에서 잠자코 등을 두드려 줄 뿐이었다.
“그렇지 않아, 아셀. 너도 앞으로 나처럼 행복해질 거야.”
“……너만큼?”
“응.”
마치 좁고 험한 길을 헤매다 드디어 자신만의 목적지를 찾은 사람처럼, 유디트는 활짝 웃어 보였다.
아셀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행복해졌어, 유디트?”
“무척이나.”
“그래, 그럼…….”
아셀이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물기를 겨우 날려 보낸 그가 이내 다시 고개를 숙여 유디트를 바라봤다.
“이젠 정말 널 잊어야겠네.”
“…….”
“마지막으로 한번 안아 봐도 될까?”
그의 제안에 유디트가 미처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아셀이 다가와 그녀를 가볍게 품에 안았다.
자신의 등을 두드려 주는 손길은 정말로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듯 사무적이기만 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아셀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밀어내며 말했다.
“……약혼 축하해, 유디트.”
그가 담담한 어조로 덧붙였다.
“한 번도 그 말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그 말을 들은 순간,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듯해 유디트는 입술만 지그시 깨무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