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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88화 (88/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88화

마지막 시험을 마치고 졸업을 앞둔 학생들은 남은 수업 시간에 자습을 하거나, 각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때문인지 아카데미의 교정에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나와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체이스와 유디트도 그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날이 순식간에 추워지네.”

유디트가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편 그녀의 말을 들은 체이스는 당장이라도 외투를 벗어 던질 것처럼 단추를 끌렀다.

유디트가 기겁하며 그의 팔목을 붙잡았다.

“괜찮아, 단단히 껴입고 나왔으니 그럴 필요까진 없어.”

잠시 붙잡힌 팔목을 내려다본 체이스가 얼굴을 붉히더니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추워지면 말해.”

풋풋한 연인들처럼, 둘은 서서히 사이를 좁혀 가고 있었다. 유디트는 슬쩍 고개를 들어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분명 처음에는 되도 않는 말로 자신을 놀래키고, 그 무례함으로 골치가 아팠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저렇게 말쑥한 신사가 다 된 거람.

물론 이것은 유디트의 단순한 착각에 불과했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체이스는 여전히 옷도 불량하게 입고, 남의 시선은 하등 신경 쓰지 않고 잘 살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남의 눈치를 보는 때는 오직 유디트 앞에서일 뿐이라는 걸 그녀만 몰랐다.

체이스가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을 머쓱해하며 유디트가 화제를 돌렸다.

“참, 할 말이 있어. 체이스.”

“뭔데?”

“사실 어제 카렐 교수님과 만나서 상담을 했거든-.”

말꼬리를 늘리며 유디트는 체이스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그는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드디어 결심한 거야?”

이내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잘 생각했어. 나도 내심 네가 그 일을 맡길 원했거든.”

“……그래?”

“응, 뭔가 너와 잘 어울린달까.”

변함없이 자신을 긍정해 주고 믿어 주는 체이스의 반응에 유디트는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앞으로 겪게 될 복잡한 현실에 눈앞이 깜깜해지기도 했다.

유디트가 곧 씁쓸한 미소를 띄우자 체이스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유디트, 혹시 내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니, 네가 진심으로 나를 응원해 줄 거란 건 알고 있었어. 저번에 한 말들이 마음에도 없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도.”

“그러면 왜 그러는 거야? 내 착각이 아니라면 네 표정이 별로 좋아 보이진 않는데.”

“그야…… 네가 카르단디 가문에 가서 가족들을 설득해야 하잖아.”

“아.”

체이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던 거야? 괜찮아, 그런 문젠 이제 내가 다 알아서 할게.”

그의 생각처럼 유디트는 체이스가 가족들을 설득하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뭔가 체이스라면 가문에서 난동을 피우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뜻을 어떻게든 관철시킬 것만 같았다.

바로 그것이 유디트가 걱정하고 있는 바였다.

물론 체이스가 그렇게까지 막무가내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하는 수 없지. 그런 상황이 애초에 생기지 않도록 내가 옆에서 지켜보는 수밖에는.

생각을 마친 유디트가 입술을 뗐다.

“그래서 말인데…… 이건 내 문제이기도 하잖아. 혹시 나도 같이 카르단디 가문에 따라가서 네 부모님들을 만나 뵐 수 없을까?”

유디트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하자, 얼빠진 듯 입술을 뻐끔거리고 있는 체이스가 보였다.

잠시간 말이 없던 그가 이내 한숨과도 같은 질문을 토해 냈다.

“……뭐?”

역시나 무척 당황한 듯 보였다.

“내가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말해 줄래?”

“……나도 네 부모님을 함께 찾아뵙고 싶다고.”

부러 유디트가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발음하자, 체이스가 한차례 숨을 들이키더니 재빨리 손등으로 입술을 가렸다.

그의 귓불이 서서히 붉게 물들어 가는 걸 보며 유디트는 혹시 그가 또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예감이 들었다.

그녀가 서둘러 변명했다.

“오해하진 마, 어디까지나 너 혼자만 부모님을 설득하는 게 힘들까 봐…….”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마침내 체이스가 손을 내리자, 활짝 올라간 입꼬리가 드러났다. 그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그냥,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우리가 정말 약혼하고 결혼할 사이라는 게 실감이 났달까.”

“…….”

“아, 물론 아직은 내가 더 많이 노력해야겠지만…….”

그리곤 인상을 찡그리며 자조적인 투로 덧붙인다.

그제야 유디트는 자신이 단 한 번도 그에게 제 마음을 고백한 적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래도 내 태도로 대충 짐작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유디트가 곤란한 낯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체이스가 목덜미를 긁적이며 서둘러 대답했다.

“그래, 네 말대로 같이 가지 뭐. 그런데…….”

머뭇거리던 체이스가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너는 괜찮아? 우리 집 분위기가 좀 불편할 텐데. 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고 네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을지도 몰라서.”

잠시 고민하던 그는 덧붙였다.

“물론 너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내가 그 집안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라서 괜히 너한테게까지 불똥이 튈지도 몰라.”

체이스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기에 유디트는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너 자신을 그렇게 비하하지 마. 아니면 너야말로 괜히 내가 창피해서 데려가고 싶지 않은 건-.”

그러나 유디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체이스가 손을 들어 그녀의 입을 막았다.

“잠깐, 유디트. 내가 너를 창피하게 여길 리가 없잖아. 구제 불능이던 날 졸업까지 시켜 준 은인인데. 오히려 우리 부모님은 네게 고마워하실걸.”

그가 몹시 당황해하며 크게 항변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유디트의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떠올랐다.

유디트가 밝아진 어투로 물었다.

“그래, 그럼 함께 가는 것 맞지?”

“어? 어…….”

얼렁뚱땅 마무리 지어진 화제에 체이스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유디트가 용기를 내어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끌었다.

“있지, 체이스. 이번 일을 포함해서 너한테 고마운 일이 참 많아.”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인데…….”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체이스가 머쓱해하자, 유디트는 아예 멈춰 선 채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결코 당연하지 않아, 너한텐 정말로 신세를 많이 진걸.”

언제부터 체이스가 내 앞에서 이렇게 쭈뼛대게 된 걸까.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처음 고백하던 날 이후로 내내 제 눈치만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 사실을 생각하자마자 문득 가슴이 아파졌다. 넌 그런 대접을 받아도 될 사람이 아닌데…….

이번에야말로 용기를 내어 진심을 고백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유디트가 이내 웅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아마 내가 널 이렇게 좋아하게 됐나 봐.”

그동안 미뤄 오던 고백을 끝마치고 나니 도저히 체이스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너무 쉽게 마음이 변한 것 같다며 오히려 못 믿지 않을까.

고개를 숙인 채 발끝만 바라보고 있노라니, 연신 정적만이 이어졌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유디트가 쭈뼛대며 고개를 드니, 체이스가 초점이 나간 눈으로 멍하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체이스?”

“…….”

여전히 대답이 없는 그를 재촉하기 위해 유디트가 그의 소맷자락을 좌우로 흔들자, 그제야 그가 놀란 눈으로 유디트와 시선을 맞췄다.

“정말이야?”

간절하게 되묻는 어조에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하는 망설임과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그의 반응이 긍정적이란 것에 안심하며 유디트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느 순간부터인진 몰라도…… 다른 사람은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그렇게 네가 좋아졌어.”

자신을 가득 눈에 담은 체이스의 시선이 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곧 그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오더니 여전히 자신의 소맷자락을 쥐고 있는 유디트의 손끝과 얼굴을 번갈아 응시했다.

“유디트.”

티끌 하나 섞이지 않은 은발 아래로 루비처럼 반짝이는 체이스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의 떨리는 호흡 또한 느껴졌다.

직감적으로 유디트는 체이스가 곧 제게 키스할지도 모른다는 걸 예감했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니 다행히 주위가 덤불로 가려져 있어 다른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안심한 유디트가 동의한단 의미로 서서히 눈을 내리감으려 할 때였다.

“……널 안아도 될까?”

……키스가 아니라?

다시 또렷이 눈을 치켜뜬 유디트의 눈앞에 순진한 얼굴로 자신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는 체이스가 보였다.

……왠지 자신 혼자만 몹쓸 생각을 한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바보처럼 군 자신만 우스워 유디트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자, 그가 불쌍한 강아지처럼 눈치를 봤다.

자신이 너무 큰 걸 요구했나 싶어 눈치를 보는 기색이었다.

그 모습에 유디트는 결국 미간을 찡그리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기뻐하며 체이스가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와락 품에 안았다.

덩치가 큰 체이스가 끌어안으니 한 줌도 안 되는 유디트는 그의 상체에 폭 파묻혔다.

분명 첫 포옹이긴 했다. 그렇지만…….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었지만…….

왠지 모를 실망감에 유디트가 쓰게 인상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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