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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89화 (89/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89화

벅찬 포옹을 끝내고 마침내 체이스가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자신과 같이 행복에 부풀어 있을 거라 예상했던 유디트의 표정이 오히려 조금 전보다 뾰로통해진 것이 보였다.

내가 무슨 실수라도 저지른 건가?

체이스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유디트?”

“응, 뭐가……?”

살짝 풀이 죽은 유디트의 목소리에 체이스는 더욱 안절부절못하며 그녀의 눈치를 봤다.

“……혹시 껴안는 게 기분 나빴어? 난 네가 허락한 줄 알았는데-.”

그 말에 유디트가 멍하게 눈을 끔벅거렸다.

나름 표정 관리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꽤 티가 난 모양이었다.

“아…… 그게.”

유디트가 다급하게 변명하려는데, 재차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내가 누굴 좋아하는 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좀 서툴러. 네가 싫다고 했으면 안 그랬을 텐데…….”

제대로 된 설명을 듣기도 전에 체이스는 아예 땅굴로 파고들어 가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유디트는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려야 했다.

“체이스, 그게 아니라…….”

유디트가 골똘히 머리를 굴렸다.

어떡하지. 솔직하게 포옹이 아니라 더한 걸 기대했다고 말해야 하나?

그러기엔 너무 부끄러운데.

그렇다고 말을 아끼자니 이대로라면 체이스는 포옹하지 않겠단 말을 평생 실현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

체이스는 뒤에 이어질 말이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유디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저 표정은 또 왜 이리 귀여워 보이는지.

새삼 체이스에게 단단히도 빠졌다는 생각을 하며 유디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게 아니라 난 그저…….”

“그저?”

도무지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유디트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끝맺었다.

“네가…… 키스할 줄 알고.”

“……키스?”

멍한 표정으로 유디트의 말을 따라서 되뇌던 체이스는 잠시 후 의미를 깨달았는지 얼굴을 훅 붉혔다.

그러더니 홍조가 깃든 얼굴을 마른세수하듯 몇 번이고 쓸어내렸다.

이내 그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음…… 내가 잘못 들었다면 미안한데…… 그러니까.”

“…….”

“나하고 키스하길 원했다는 거야?”

유디트는 굳이 부끄러운 말을 다시 하게 만드는 체이스를 원망스럽다는 듯 올려다보았다.

“원한 건 아니거든. 그냥…… 그런 분위기라고 예상했는데 네가-.”

“그런데 내가 키스하지 않아서 널 실망시킨 거고?”

자신의 포옹이 싫어서 죽상을 하고 있던 게 아니라, 오히려 더한 걸 기대했던 거라니.

새롭게 깨닫게 된 사실에 체이스의 표정이 서서히 변해 갔다.

어느새 기쁘다는 듯 입가에 능글맞은 웃음을 떠올렸다.

그 순간 그 표정이 얼마나 얄밉던지.

유디트가 입술을 삐죽이며 체이스의 가슴팍을 퍽 밀어냈다. 그러나 별다른 타격은 없던 모양이었다.

그는 그녀의 저항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왜, 왜 그래?”

체이스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조금 전 유디트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소매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그리곤 그녀의 작은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살짝 쉰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지? 네가 그렇게 말하기 전까지만 해도 아무 욕심 없었는데…….”

체이스가 느리게 말을 이었다.

“너 때문에 나도 기대하게 됐잖아.”

아까까지만 해도 말갛던 체이스의 눈빛에 묘한 열기가 감돌기 시작한 것이 보였다.

차마 제 손을 빼낼 생각도 못 한 채, 유디트는 가만히 자리에 굳어 버렸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허락으로 받아들인 모양인지, 체이스가 이내 양손으로 조심스레 그녀의 등을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체이스의 품 안에 갇히게 되자 유디트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조금 전 순수하게 마음이 통했다는 기쁨만으로 벅차오르던 분위기완 달랐다.

그보단 좀 더 야릇한 긴장감이 둘 사이에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 들어 봐, 유디트.”

그 말에 체이스의 가슴팍에 빨개진 얼굴을 파묻고 있던 유디트가 움찔했다.

그녀가 위를 올려다보자, 마찬가지로 살짝 긴장한 듯 얼굴을 붉힌 체이스가 보였다.

“정말 해도 돼?”

한 뼘 거리에서도 체이스의 심장 고동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상황이 이쯤 되자 유디트도 더는 마음을 속이고 싶지 않아졌다.

체이스가 더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그저 사랑스럽기만 하다.

오히려 멀리 돌아온 감이 있을 정도로 그와 함께 있는 순간순간이 소중하고 행복하기만 했다.

그래, 너라면.

너라면 다 괜찮아.

곧이어 유디트가 허락을 알리듯 옅은 미소와 함께 눈을 스르르 감았다.

동시에 입술 위에 떨리는 숨결이 내려앉았다.

이제 막 마음이 통한 연인들답게, 처음에 부드럽던 입맞춤은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서툰 열기를 더해 가기 시작했다.

* * *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은 쌀쌀했지만, 조금도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도 입술에 유디트의 부드러운 감촉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유디트가 내게 좋아한다고 고백하다니. 심지어 입맞춤까지 허락해 주다니.

인생의 그 어떤 순간도 지금처럼 행복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기분이 들뜬 것과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은 당연히 평소와 똑같은 광경이었지만 어쩐지 더욱 아름답게만 보였다.

그런데 기숙사에 당도하니 더욱 놀랄 만한 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룸메이트가 편지 한 통을 책상 위에 올려 둔 것이다.

묻지 않아도 봉투를 본 순간 어디서 보내온 것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이건…….”

이 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문양이 편지를 봉한 밀랍 위에 선명히 아로새겨져 있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꽤 걸릴 줄 알았는데 벌써 통지서가 도착하다니?

등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아까의 흥분이 씻겨져 내려갔다.

“큼.”

체이스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조심스레 봉투를 뜯어 보았다.

[황실 기사 임명장]

“…….”

체이스는 얼떨떨한 눈으로 종이 위에 쓰여진 글씨를 다시 읽어 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합격이구나.

기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건가? 마음이 순식간에 들떴다.

사실 입단 시험을 쳤을 때만 해도, 지금의 결과를 장담할 순 없었다.

검술 대회의 수상 실적이나 실기에서는 좋은 점수를 낸 듯했지만, 그 외의 부분에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황실 기사단은 무엇보다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단이니만큼, 검술 실력뿐만 아니라 생활 태도까지 꼼꼼하게 따지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밥 먹듯이 수업을 빠지곤 했던 체이스는 어쩌면 서류에서 탈락할지도 모른다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는 그동안의 전례를 깨고 보란 듯이 합격 통지서를 손에 쥐게 됐다.

“……카렐 교수님에게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야겠네.”

그만큼 이번 결과는 카렐 교수님의 덕이 컸다.

설마 자신이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추천서를 써 주실 줄이야.

항상 그 앞에서 좋은 학생으로 있었던 기억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교수님의 이런 도움이 낯부끄러운 동시에 더없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마지막 학기에 보였던 그의 노력들을 좋게 봐주신 모양이다.

카렐 교수님의 추천서는 검술학 교수님의 추천서와 합쳐져 지난 면접 당시, 면접관에게 좋은 인상을 심는 데 나름 큰 공헌을 했다.

‘생활 기록부 평가가 애매하군요. 원래는 생활 태도까지 깐깐하게 검수하는 편이긴 한데…… 교수님들의 추천서가 꽤나 인상적이네요?’

입단 면접을 보았던 기사단장이 그렇게 말했을 정도이니, 그의 합격 결과에는 카렐 교수의 추천서도 큰 역할을 했음이 틀림없었다.

“유디트가 알게 된다면 분명 엄청 기뻐하겠지?”

체이스는 유디트에게 합격 소식을 전할 생각에 들떴다.

그가 이렇듯 들뜬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이제 가문에서 독립하더라도 걱정이 없겠어.”

황실 기사단에 입단하게 되면 기사 작위를 받게 된다.

즉 가문의 도움이 없이도 유디트와의 탄탄한 미래가 보장되는 셈이다.

제 가문 어른들께 인사하러 가는 일로 내심 걱정이 많았던 체이스는 기쁜 듯 웃었다.

만약 가문의 허락을 받지 못하더라도 다른 방안이 생겨났으니까 말이다.

그때, 편지 아래 방금 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조그마한 글씨가 눈에 띄었다.

[단, 입단 전 합숙 기간을 거쳐야 함.]

방금까지만 해도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체이스의 얼굴이 한순간에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합숙이라고?”

그러면 유디트와 얼마간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거네.

물론 검술학부를 다니면서도 많은 합숙에 참여하긴 했다. 그런데 지금처럼 합숙이 내키지 않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제야 유디트의 마음을 겨우 확인한 참인데. 아직 단둘이 붙어 다니며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고작 보름 남짓의 기간에 불과했지만 그동안 그녀와 떨어져 있을 생각을 하니 체이스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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