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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90화 (90/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90화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여유 시간이 대폭 늘어났다.

이렇게 되자 체이스와 유디트는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들답게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 데이트를 즐겼다.

그날은 유디트의 수업이 일찍 끝난 날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르데샤와 함께 점심을 먹었을 테지만, 오늘 그녀는 자리를 비웠기에 곧장 체이스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그의 시간표에 따라 수업하고 있는 교실에 도착하니, 마침 운이 좋게도 복도에 이미 나와 있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체이-.”

반가운 마음에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찰나, 그가 다른 사람과 대화 중이란 걸 알아차리곤 말을 멈췄다.

체이스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머리를 높이 올려 묶은, 키도 크고 늘씬한 여성이었다.

그것도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와 보조개 파인 얼굴이 인상적인 미인.

“…….”

유디트는 떨떠름한 눈으로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그들과는 꽤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대화 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다는 것은 파악할 수 있었다.

체이스가 저렇게 다른 여자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지키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항상 관심이 귀찮다며 낯선 여자에게 날을 세우던 체이스였는데. 왠지 지금은 눈앞의 여자를 전혀 꺼려 하지 않는 듯했다.

어쩌면 당연한가?

저렇게 멋진 여자라면 누구나 단숨에 호감을 가질 만했다. 멀리서 봐도 그녀는 키가 크고 체격 좋은 체이스와 그림처럼 어울렸으니.

그나저나 무슨 일인데 저렇게 대화가 길어지는 걸까.

당장이라도 다가가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사라졌다.

그렇게 유디트가 그 자리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두 사람을 지켜볼 때였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유디트에게로 향했다.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는데 날 어떻게 알아차렸지?

체이스가 이내 반가운 얼굴을 하더니, 앞에 서 있던 여성에게 무어라 이르고는 한달음에 유디트의 앞으로 달려왔다.

“유디트, 무슨 일이야?”

“……아, 오늘 르데샤가 자리를 비웠거든. 그래서 같이 점심 먹으려고 찾아온 건데 대화 중이길래 기다리고 있었어.”

“그렇구나, 그냥 기다릴 필요 없이 와서 말걸어도 괜찮았는데.”

“아냐, 방해를 할 순 없지. 대화는 다 끝난 거야? 그리고 저분은…… 누구셔?”

유디트가 묻는 사이 어느새 여자가 그들 옆으로 다가와 섰다.

아직 할 얘기가 남아 있는 걸까.

멀리서 봤을 때도 미인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성숙하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이분은 누구시지, 체이스?”

그녀가 팔짱을 낀 채 유디트와 같은 종류의 질문을 던졌다. 살짝 허스키한 목소리가 매력적이었다.

곧이어 체이스가 그녀에게 깍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 제 약혼녑니다.”

동시에 유디트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안으며 과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흐음.”

그녀가 아담한 유디트를 눈으로 훑어내리는 동안, 체이스가 뒤늦게 유디트의 말에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참 유디트, 이분이 아까 누구냐고 물었었지? 내 직속 상관……? 이라고 해야 할까. 바로 내 위 기수인 황실 기사단원 중 한 명이셔.”

황실 기사단의 기사라고?

유디트의 눈이 휘둥그레져서 눈앞의 여자를 놀랍다는 듯 바라봤다.

“기사님이셨군요. 그런데 직속 상관이라는 말은…… 무슨 말이야? 아니, 그러니까…….”

곧이어 더듬거리던 유디트의 머릿속에 하나하나 상황이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그러니까, 황실 기사단의 기사고 체이스의 직속 상관…… 바로 위 기수라면 그러니까.

유디트의 설마 하는 표정에 쐐기를 박듯 체이스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뿌듯하게 웃어 보였다.

“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나, 황실 기사단 시험에 합격해서 내년에 기사로 서임될 예정이거든.”

“……뭐? 정말?”

예상치 못한 소식에 유디트는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되물었다.

황실 기사단이라니.

단연코 수많은 기사단 사이에서 가장 들어가기가 까다롭다고 소문난 기사단이 아닌가.

아무리 검술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함부로 입단을 단언할 수 없을 정도로 경쟁률이 치열한 곳이었다.

신분부터 시작해서 학업 성취도, 생활 태도까지 하나하나 까다롭게 따졌기에 누가 봐도 걸출한 인재가 아니면 결코 뽑지 않았다.

그렇기에 한 해에 입단하는 기사도 많으면 네댓, 적으면 하나둘이 될까 말까였다.

그런 쟁쟁한 기사단에 체이스가 입단하게 되다니. 황제로부터 직접 기사 서임을 받게 되다니.

놀라워하는 유디트의 눈빛을 눈치챈 체이스가 큼 하고 헛기침을 한 뒤 설명을 덧붙였다.

“뭐, 너도 알다시피 내 성적이나 태도가 그리 모범적이진 않았잖아. 그런데 글쎄, 카렐 교수님께서 부탁드리지도 않았는데 추천서를 써 주셨지 뭐야. 덕분에 실기까지 무난하게 합격할 수 있었어.”

그가 황실 기사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아직도 놀랄 일이 남아 있었다니. 유디트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되물었다.

“카렐 교수님의 추천서라고?”

“응, 아마 마지막 학기에서 내가 노력하는 모습을 좋게 봐주셨나 봐.”

체이스가 그렇게 말하며 뿌듯하게 웃어 보였다. 왠지 마음이 뭉클해졌다.

카렐 교수님께서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체이스를 나름 아껴 주시고 계셨구나.

사실 두 사람은 서로의 성향이 잘 맞지 않는 건지 종종 부딪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중간에 낀 유디트만 어쩔 줄 몰라 난처해지곤 했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새에 둘 사이가 이리 좋아졌을 줄이야.

생각을 정리한 유디트가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모두 네가 노력한 결과잖아. 정말 장하다. 축하해, 체이스.”

그녀가 마치 자기 일처럼 진심으로 축하해 주자 체이스도 멋쩍었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빙긋 웃어 보였다.

이내 유디트가 눈앞의 여기사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체이스의 상관이신 줄도 모르고 괜한 질투를 할 뻔했네.

유디트가 정중한 태도로 그녀를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결례가 많았습니다. 체이스의 상관이신 줄도 모르고……. 앞으로 체이스 잘 부탁드릴게요.”

“흐음…….”

그런데 왠지 여기사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잔뜩 미간을 찡그리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런 귀여운 약혼녀라니, 천둥벌거숭이 신입한테 너무 과분한데?”

이런 미인에게서 귀엽다는 소리를 듣게 되자 도리어 기분이 머쓱해진 건 유디트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체이스 또한 자신을 깎아내리는 말에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은지, 오히려 맞장구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내 그녀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묶은 머리끝을 매만지며 인상을 찡그렸다.

“……곤란하네. 내가 오늘 여길 찾아온 건 그다지 좋은 목적은 아닌데 말이지.”

“네?”

“사실 나는 체이스의 입단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거든.”

“…….”

여기사의 솔직한 발언에 유디트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사실 체이스가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은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학우에게는 동경와 관심을 받았을 지언정, 아카데미에 재직 중인 교수들의 대다수는 체이스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편이었으니.

하지만 그의 고압적인 태도도 많이 달라졌고, 이제는 꽤 점잖은 신사가 됐는데 또 뭐가 문제인 걸까.

게다가 체이스는 아직 서임식도 치르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 체이스를 벌써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 이유가 뭘까? 혹시 벌써 또 다른 사고를 친 건가?

유디트가 책망하듯 체이스를 올려다보자 그가 눈빛의 의미를 이해했는지 곧 맹렬하게 고개를 흔들며 스스로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때 여기사가 의아해하고 있는 그녀를 향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내가 체이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는 단 한 가지야. 저 녀석이 입단에 있어 알 수 없는 특혜를 받았기 때문이지. 입단 시험을 치를 때 저 녀석이 제출했던 서류는 내가 일차적으로 검토한 것들이야. 그걸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난 저 녀석이 고속으로 탈락할 줄 알았어.”

“…….”

“그런데 기껏 실기 시험 좀 잘 보고, 검술 대회에서 몇 번 우승한 것만으로 기사단장님이 저 녀석을 뽑자고 하더군. 이게 말이 되나? 황실 기사단 사람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대단한 엘리트들인데.”

역시나, 유디트가 알고 있던 대로 체이스가 황실 기사 시험에 합격한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던 것 같다.

여기사는 쌓인 게 많았는지 계속 유디트에게 자신이 느낀 불만을 표출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는 말이 있듯이, 체이스란 존재 하나가 나중에 황실 기사단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고 생각해. 난 그걸 막기 위해 온 거야. 만약 저 녀석의 검술 실력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보잘것없다면…….”

여기사는 살벌한 눈으로 체이스를 노려보며 묵묵히 말을 이었다.

“난 정식으로 이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고 체이스의 합격을 취소하게끔 만들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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