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91화
여기사는 삐딱한 태도로 팔짱을 낀 채 체이스를 바라봤다.
그녀의 말이 크게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체이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장님께서는 내게 네 교육을 일임하며 합숙 때 네 생활 태도를 느긋하게 살펴보라고 하시더군. 하지만 난 그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어. 기사단 안에서는 서로 대련을 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절차를 걸쳐야 해서 귀찮기도 하고. 그러니까 내 결론은…….”
“아까도 들었습니다. 어차피 저와 한번 붙어 보고 싶으시단 것 아닙니까?”
체이스의 말대답이 또 못마땅했는지 여기사가 미간을 구기며 답했다.
”-그래. 네 실력이 정말 이런 특혜를 허용할 정도로 대단한지, 내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어. 만약 내 기준보다 시원찮으면 넌 기사 시험에서 탈락이야.“
거기까지 말한 여기사가 허리춤의 검 위에 손을 얹었다.
“너도 기사라면 내 대련 신청을 거부하진 않겠지? 긴말 필요 없이 대련할 수 있는 장소로 가자.”
“그러죠.”
유디트는 순식간에 대련이 성사되자 입을 떡 벌렸다.
기사들은 다 이렇게 저돌적이고 대담한가? 대련이 무슨 애들 놀이도 아니고 하자고 하면 바로 붙는 거야?
하지만 그녀는 결코 자신이 가진 의문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대련할 장소로 이동하는 체이스와 여기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에.
얼마 후 빈 수련장 위에 그들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유디트는 그 살벌한 광경을 숨죽이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는 있는 힘껏 체이스를 응원하면서.
* * *
챙-.
적막한 공간 내에서 검끼리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아니, 어쩌면 대련하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험악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른다.
유디트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귓전을 때릴 때마다 몸을 움찔 떨면서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괜찮은 걸까?
어느새 그의 이마에는 작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상대방의 쏟아지는 일격을 막아내는 것이 몹시 힘든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가 무투 대회의 우승을 휩쓸었다 한들, 그것은 상대가 같은 아카데미 학생일 때의 얘기다.
지금 그의 대련 상대는 정식으로 임명받은 기사였다. 그것도 에이스들만 모인 황실 기사단 소속의.
체이스를 응원하고는 있지만 사실 승패의 대결은 뻔해 보였다.
여기사의 응대가 일견 여유로워 보이는 반면, 체이스는 무척이나 필사적인 태도로 응했으니까 말이다.
언뜻 보면 여기사가 체이스를 궁지로 몬 뒤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두 사람의 실력 차나 경험 차가 커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검술 실력만큼은 늘 자신에 차 있던 체이스였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그 자신감이 꺾일지도 모르겠네.
유디트가 우려에 섞인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그때, 여기사가 입술을 뗐다.
“못하겠으면 패배를 인정하고 그만둬라.”
하지만 여기사의 말에도 체이스는 별다른 대답 없이 묵묵히 검을 맞부딪혔다. 대련을 포기할 생각은 죽어도 없는 모양이었다.
여기사도 좀처럼 포기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혀를 쯧 찼다.
“도전 정신 하나는 좋군. 하지만 그 용기가 객기가 될지는 두고 봐야지. 이제부터 나도 봐주지 않고 응대하겠다.”
그녀의 말에 유디트가 헛숨을 들이켰다.
지금만 해도 체이스는 공격을 막아내기에 급급해 보이는데, 이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유디트가 전전긍긍해하는 사이 여기사가 한순간 몸을 숙이더니 날렵하게 체이스의 빈틈을 파고 들어갔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 유디트가 헛숨을 들이키는 찰나, 놀랍게도 체이스가 예상했다는 듯 매끄럽게 손을 비틀어 검날을 아래로 향했다.
복부를 노린 여기사의 검이 순식간에 체이스의 검에 가로막혔다.
“……!”
연이어 여기사가 맞부딪힌 칼날의 방향을 바꿔 가슴을 베어 내려고 했다.
체이스가 다급하게 검을 끌어 올리며 두 번째의 공격 또한 막아냈다. 하지만 충격이 컸는지 뒤로 주춤 물러났다.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한 상황에 숨이 막혀 왔다.
그때 대련장 안에 찬 공기가 휘도는 순간, 체이스가 균형을 무너뜨리고 기습적으로 앞으로 달려들었다.
쨍그랑.
“……!”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여기사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시종일관 여유로워 보이던 여기사의 표정이 무너졌다.
그녀가 곧바로 검을 줍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체이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여기사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헉…….”
맙소사.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유디트는 지금 제 눈앞에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어서 입을 떡 벌렸다.
당연히 여기사가 이길 줄 알았는데, 검술 대련의 승자는 바로 체이스가 되었다.
체이스가 황실 기사단 기사와이 대련에서 이기다니. 아직 아카데미를 졸업하지도 않았는데…….
유디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러는 와중 체이스는 여기사의 목에 가까이 댄 검을 뒤로 물리며 말했다.
“제가 대련에서 이겼군요.”
“하.”
여기사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물끄러미 보다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바람 때문에 눈을 감은 그 한순간을 노릴 줄이야. 웅크리고 있다가 기회를 낚아채는 솜씨가 대단하군.”
그녀의 설명에 유디트도 그제야 어떤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를 이해했다.
어느새 그녀의 목소리엔 체이스를 향한 감탄이 섞여 있었다.
“순수 실력만으로 따지자면 아직 한참은 배워야겠지만, 대처 능력이 뛰어난 건 분명한 장점이야. 좋은 검사가 될 가능성이 있겠어.”
거칠게 숨을 몰아쉰 체이스가 검을 갈무리하며 대답했다.
“그럼 약속했던 대로 저를 기사단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십시오. 반드시 다음번에는 요행 없이도 당신을 이겨 보일 테니까요.”
“…….”
유디트는 조마조마한 눈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요행 없이 이겨 보이겠다니.
아직 기사단에 정식으로 입단한 것도 아닌 신입이 하기엔 너무 건방진 말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시종일관 냉랭하던 여기사의 볼이 어쩐지 발그레해졌다. 싸늘했던 눈빛도 어쩐지 새초롬해졌다.
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
그 미묘한 변화에 의아함을 느낄 찰나, 여기사가 툭 내뱉었다.
“너 아주 강한 남자구나?”
“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도 정말 강한 남자로군.”
……뭐지?
유디트뿐만 아니라 체이스도 무척 당황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그런 그에게 여기사가 가까이 다가오며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널 입단시켜야 한다고 고집 부리던 단장의 마음을 이제야 알겠네. 마음에 들었어.”
그렇게 말한 여기사는 이어서 유디트 쪽을 바라봤다.
“……임자가 있는 게 아쉬울 정도로군.”
‘…….’
순식간에 바뀐 기류를 유디트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에 대한 여기사의 입장이 호의적으로 바뀐 건 다행이라 할 만했지만, 그게 연심에 가까운 거라면…….
유디트는 저도 모르게 뾰족한 눈으로 여기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기사는 보란 듯이 체이스와 악수까지 하곤 자리를 떠났다.
* * *
여기사가 떠난 뒤 체이스가 기쁜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대련에서 승리한 것이 못내 기쁜 모양이었다.
하지만 유디트는 그를 반갑게 맞아 줄 기분이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온 체이스도 곧 그녀의 심각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걸음을 멈추곤 눈치를 살폈다.
“……왜 그래, 유디트?”
“…….”
유디트가 불만 어린 얼굴로 그런 그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잘생긴 외모는 물론, 남자답게 듬직한 체격과 뛰어난 검술 실력까지 갖춘 체이스.
사실 그동안 신경 쓸 일이 별로 없어서 그렇지, 그는 남녀를 불문하고 의외로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그동안 자신을 향한 체이스의 마음이 한결같아서 너무 안심하고 있던 걸까.
유디트가 잠시 한숨을 푹 내뱉은 뒤 겨우 불편한 기분을 눌러 삼키며 대꾸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나저나 아까 전에 대단하던데?”
그녀가 웃자 체이스도 안도했는지 따라 웃었다.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해 주니 기쁘다.”
“그런데 떠나기 전에 저분이 합숙…… 어쩌고 말씀하신 거 같은데, 그게 무슨 얘기야?”
“아.”
체이스가 그녀의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잖아도 오늘 너한테 말해 주려고 했는데. 사실 입단식 준비 때문에 그전에 신입들끼리 모여 잠시 훈련을 받는대.”
“……그렇구나. 얼마나 합숙을 하는데?”
“아마 한 보름 정도? 못 보게 될 거야.”
체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몹시 아쉬웠는지 유디트의 손을 들어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부모님도 그전에 뵈러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응. 바쁜 일은 없으니 난 아무 때나 괜찮아.”
유디트는 스스로가 무척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자신을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아쉬워하는 체이스를 보고 기뻐하다니.
그때 머릿속에 한 가지 의혹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 합숙 기간엔 혹시…… 방금 전 기사분도 함께하시는 거야?”
“음…… 신입 교육은 바로 윗 기수 선배들이 시킨다고 하니 아마도? 왜?”
체이스는 유디트가 보이는 관심 하나하나가 기쁜지 해맑은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런 그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유디트는 도무지 조금 전 그 여기사가 신경 쓰인단 말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