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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92화 (92/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92화

“그러면 언제가 좋을까.”

잠시간 상념에 빠져 있던 유디트는 체이스의 말을 단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응? 뭘?”

“……아까 합숙 전에 우리 부모님 뵈러 다녀오자고 했었잖아.”

체이스가 자신의 말에 집중하지 않는 그녀를 보며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아, 그랬었지.”

유디트가 멍하니 체이스를 올려다보다가, 이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체이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옆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겨 주었다.

그 손길이 무척 기분이 좋아서, 유디트는 잠시 고양이처럼 그의 손에 뺨을 기댔다.

곧 그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합숙 시작일이 언젠데?”

“다다음 주.”

“그러면…… 다음 주 주말에 갈까?”

참 신기했다. 조금 전의 서운한 마음은 싹 날아간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유디트가 배시시 웃어 보이자, 체이스도 그녀의 웃음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부모님께 미리 말씀드려 놓을게.”

말을 마친 체이스가 한참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곧 신호하듯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유디트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곧 깊이 맞춰 오는 입술에 유디트가 그의 옷깃을 잡고 매달렸다.

첫 키스를 나눈 뒤로, 그들은 종종 이런 식으로 애정 표현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 덕분인지 키스를 기대했다는 유디트의 말에 어린애처럼 얼굴을 붉히던 체이스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조르게 되었다.

아니, 최근에는 열성적이다 싶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나마도 교정에 보는 눈이 많아 자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졸업하고 너와 함께하는 매일매일은 또 얼마나 행복할까.

유디트는 가늘게 눈을 뜬 채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언제부터인지 하늘에서 눈발이 하늘하늘 떨어지고 있었다.

벌써 겨울이었다.

* * *

그날도 모든 수업이 일찍 끝났다.

방학식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학생들은 이제 교정에서의 산책을 그만두고 일찍이 기숙사로 들어가 쉬곤 했다.

날씨가 급격히 추워졌기 때문이다. 유디트와 르데샤는 뿜어져 나오는 입김을 보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행히 오늘은 눈이 안 내리네.”

“하지만 길이 질척질척할 거야. 요 며칠 쌓인 눈 때문에.”

르데샤가 두터운 털옷 위에 목도리를 졸라 매며 말했다.

아카데미의 일정 구역 내에서는 따뜻한 온도가 유지되어 괜찮지만, 마차를 타고 밖으로 나오면 급격히 외부의 추위에 노출된다.

그 때문에 유디트도 오늘만은 단단히 껴입은 참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뭘 쇼핑할 거야, 유디트?”

마차에 올라탄 르데샤가 신발에 묻은 눈을 털며 물었다.

“친구들한테 줄 간단한 선물들? 이번 학기로 아카데미에서 졸업할 테니까.”

“우, 나는 예쁜 옷이나 구경하려고 했는데.”

“그것도 좋지.”

둘은 잠시간 시답잖은 대화를 하며 달리는 마차의 차창 너머를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르데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주황색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런데 오늘 체이스가 용케도 너랑 내가 단둘이 나오는 거 허락했네.”

“아, 내가 오랜만에 너랑 단둘이 놀고 싶다고 했어. 그런데 그렇게 말하자마자 나한테 글쎄 투정 부리는 거 있지. 자기만 빼고 논다고.”

“엥? 걔가 투정 같은 것도 부려?”

잠시 머릿속에 그 모습을 떠올려 봤는지 이내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으으, 상상만 해도 징그럽다.”

그녀의 반응에 유디트가 킥킥 웃었다.

시내는 비교적 가까운 편이었다. 마차에서 내리니 겨울을 맞이해 새로이 단장한 멋들어진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사이를 사이좋게 걸으며 유디트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사실 체이스도 요즘 많이 바빠. 신변 정리 하느라.”

“아아, 기사 시험에 붙었다고 했지.”

르데샤가 그 말에 하릴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이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물론 축하할 일이긴 한데……. 사실 좀 어색하다. 황실 기사라니. 그건 엄청난 엘리트들만 될 수 있는 거잖아.”

“아무래도 그렇지?”

“그런데 상상이 돼? 그 체이스 카르단디가, 황실 기사단 제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점잔 빼며 거드름이나 피우게 될 거라는 게?”

유디트는 잠시 황실 기사단이 그런 이미지였나 고민해 보았다.

확실히 중요한 행사에는 머리에 기름칠까지 하고 번쩍번쩍한 느낌이긴 하지. 가끔 밥맛 같아 보일 때도 있었다.

“……나도 사실 엄청 의외였긴 했어. 오죽하면 그 일로 황실 기사 한 분이 찾아와서 체이스더러 입단 전에 그냥 명예롭게 나가 달라고 했다니까?”

“뭐?”

그 말을 들은 르데샤는 길거리에서 박장대소를 했다. 한참 동안이나 웃음을 멈추지 못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였다.

“아하하하, 하핫!”

“그만 좀 웃어.”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선물 가게 안으로 들어가며 유디트가 르데샤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학, 미, 미안. 그래서 어떻게 됐어?”

“음, 그분이 체이스에게 대련을 신청했는데……. 음.”

유디트는 떠오르는 기억에 인상을 찌푸리다 이내 말을 마쳤다.

“의외로 체이스가 이겼어.”

“응?”

재미난 결과를 기대했던 르데샤가 흥이 빠졌는지 곧 실망한 표정이 되었다.

“뭐야, 시시하게.”

“체이스가 재능이 있긴 한가 봐. 그 후로 좋게 봤는지 덕담도 해 주고 가셨어.”

진열된 장난감들을 훑으며 유디트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잠시 그 모습을 눈여겨보던 르데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래? 근데 넌 왜 그렇게 죽상이야.”

“응?”

내가?

유디트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뜨곤 르데샤를 바라봤다. 그러자 목도리에 반쯤 파묻힌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보니 르데샤는 추위를 심하게 타는 모양이었다.

“꼭 체이스가 재능이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얘기했잖아. 뭐 걸리는 거라도 있어?”

“그렇게 들렸어?”

유디트가 잠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르데샤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런 제 친구의 얼굴을 살피더니, 이내 익살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응, 혹시 드디어 체이스가 밥맛없는 애란 걸 깨닫게 된 건가?”

“하하, 그건 아니야.”

“그럼 뭣 때문인데?”

친구의 집요한 관심에 잠시 고민하던 유디트가 이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게 사실……. 그때 대련을 하고 간 기사가 여기사거든. 그것도 엄청나게 미인인.”

“…….”

“그런데 그분이 대련을 마친 이후로 체이스에게 엄청 호의적으로 바뀐 데다가……. 앞으로 그분이 합숙 훈련도 그렇고 체이스 교육을 담당하게 될 거라는 거야. 물론 괜한 생각인 건 알지만…… 조금…… 신경이 쓰여서.”

“으음, 그랬구나.”

모든 사정을 듣고 난 르데샤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유디트는 체이스와 그 여기사 사이를 질투하고 있다는 거네.”

“…….”

그게 그렇게 되나.

잠시 유디트는 멍하니 선 채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런데 충격이다.”

“……뭐가?”

“이렇게 들으니까 정말 유디트가 체이스를 좋아한다는 게 느껴져서.”

르데샤가 의외라는 얼굴로 유디트를 바라보며 물었다.

“난 솔직히 너랑 아셀이 같이 여름 파티에 참석했을 때만 해도 둘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거든. 학생회장도 말은 안 해도 네게 꽤 관심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렇게 보였어?”

“응, 물론 넌 그때 체이스와 약혼한 상태였으니까 아는 척하진 않았지. 하지만 이런 어린 나이에 약혼을 한다는 건 뻔하잖아. 어차피 정략혼일 테니 서로 마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속사포처럼 말한 르데샤가 그 와중에도 앞에 진열된 물건에 관심을 보였다.

작고 예쁘게 생긴 오르골이었다. 옆면의 손잡이를 돌리자 곧 익숙하고 부드러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유디트도 르데샤의 말을 들으며 물건을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어느 순간 보니 체이스가 널 꽤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 물론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지. 유디트는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니까.”

“…….”

“그런데 넌, 아셀 같은 사람이 바로 옆에 있었잖아. 그리고 그 와중에 체이스를 좋아하게 됐다는 거 아냐. 맞지?”

르데샤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단 얼굴이었다.

한 학기가 넘도록 붙어 다녔으면서 여전히 체이스에게 엄격한 그녀를 보고 있노라니 유디트는 그저 웃음만 나왔다.

사실 초반에는 유디트도 체이스가 잘난 척하거나 안하무인인 듯 굴 때마다 머리를 콩 때려 주고 싶은 적이 많긴 했다.

손이 닿지 않아서 한 번도 시도는 못 해 봤지만.

유디트가 익살스런 미소를 머금은 채 대꾸했다.

“체이스가 그래 봬도 꽤 다정하거든.”

“으음…….”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르데샤가 이내 과거를 회상해 보곤 마지못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너한테 지극정성이긴 하더라.”

잠시 후 르데샤가 다시 밝아진 얼굴로 유디트를 돌아보았다.

“참, 생각해 보니까 유디트. 그 기사분 일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

의아해하는 유디트에게 르데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해 주었다.

“사실 지난번에 체이스랑 네 얘기를 한 적이 있거든. 근데 걔가 그때…….”

뭐라고 했더라. 르데샤는 잠시 그때의 대화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내년에 진짜 유디트랑 결혼하는 거야, 체이스?’

‘응, 넌 초대 안 할 거지만.’

‘난 유디트가 초대해 줄 거라 괜찮아.’

‘…….’

‘넌 진짜 유디트한테 감지덕지하며 잘해 줘야 해, 알지?’

‘네가 그렇게 말 안 해도 잘해 줄 거야.’

‘그러니까 바람 피지 말고, 일편단심으로 잘하라고.’

가뜩이나 체이스가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걸 알기에 노파심에 해 본 말이었다.

그러자 체이스가 르데샤를 바라보더니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야, 기사의 맹세는 신성한 것 알지.’

‘……그렇지?’

‘그런 내 평생의 사명이 유디트야.’

‘너 아직 기사 아니잖아?’

‘서임식 날 맹세할 테니 찾아오든가. 그때 내가 얼마나 진지한지 확인해 봐.’

그렇게 말하며 눈썹을 까딱이는 체이스는 여전히 재수가 없었지만, 확실히 각오는 대단해 보였다.

“아무튼, 정말 걱정 안 해도 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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