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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93화 (93/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93화

비뚜름하게 미소 짓던 르데샤가 문득 중얼거렸다.

“그런데 체이스까지 벌써 진로가 정해졌다니 부럽네.”

그녀는 뭔가를 고심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대체 졸업하고 뭘 해야 하는 걸까. 너는 무려 회계학 수습 교수로 스카우트받았고, 체이스도 황실 기사 시험에 합격했다는데…… 왠지 나만 멈춰 있는 기분이네.”

물론 진로를 정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유디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도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수습 교수가 되는 게 좋을지 아닐지 밤을 새도록 고민하곤 했으니까 말이다.

고민이 많아 보이는 르데샤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을 발견한 유디트는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르데샤 너는…… 아직 졸업 후 뭘 할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둔 건 없는 거야?”

르데샤라면 학업 성취도 우수하고 성실한 데다 집안도 뒷받침이 되니 무슨 일이든 골라 갈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혹은 그 뛰어난 재능으로 로지에나 가문을 이어받거나, 그에 속해 일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런데 유디트의 물음을 들은 르데샤의 얼굴빛은 눈에 띄게 착잡해졌다.

“뭐…….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건 없어. 솔직히 나는 공부를 더 해 보고 싶긴 한데 부모님들이 반대하고 계시거든.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는 게 더 안정적인 삶이 아니겠냐는 고리타분한 소리를 늘어놓으면서.”

르데샤는 짜증이 난다는 것처럼 인상을 썼다. 하지만 왠지 유디트는 그녀가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부모님과 네가 어떤 부분에 흥미가 있고 왜 공부를 하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대화해 본 적은 있어?”

“아니, 그런 적은 없어. 어차피 부모님은 반대할 게 뻔하다고 생각해서.”

“그래도 한번 대화를 해 보는 게 어떨까?”

유디트가 진심으로 염려하는 투로 말했다.

“그래도 부모 자식 간이잖아. 부모님께서 널 사랑하신다면, 결국 네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응원해 주실 거라고 생각해.”

“……정말 그렇게 생각해?”

르데샤도 연이은 설득에 흔들렸는지 고민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응, 평소 공부할 때의 고집만 가지고 밀어붙인다면 충분히 잘 해낼 거야.”

결국 유디트의 진심 어린 조언이 통한 것인지, 르데샤는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너무 완고한 분들이라 말씀드려 볼 생각조차 못 해 봤는데…… 그래, 한번 도전해 보지, 뭐.”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여러 가지 선물들을 골라 계산대로 가지고 갔다.

이번 졸업을 기점으로 헤어지게 될 학우들을 위한 선물이었다.

어느샌가 유디트의 손에서 아까 만지작거렸던 오르골을 발견한 르데샤가 깜짝 놀라 물었다.

“이거 아까 보니 꽤 비싸 보이던데…… 누구한테 주려고?”

“아, 이번 학기 내내 무척 신세 진 분이 있어서.”

유디트는 싱긋 웃으며, 마지막까지 체이스에게 추천서를 써 주었다던 카렐 교수님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 * *

어느덧 약속한 날짜가 되어, 체이스와 유디트는 카르단디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멀리 보이는 저택은 페델리안 저택보다 규모가 작긴 했지만 오랜 전통이 느껴지는 그런 고풍스러운 외관이었다.

전체적으로 엄숙하고 굳세 보이는 분위기에 심장이 금방이라도 뻥 하고 터질 듯 쿵쾅거렸다.

유디트는 주먹을 꼭 쥐며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켜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그녀의 긴장을 눈치챈 체이스가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달래 주었다.

“괜찮을 거야.”

유디트는 체이스를 바라보다 이내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마차가 미끄러지듯 정문을 통과했다. 미리 마중 나와 있던 사용인이 다가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유디트가 마차에서 수월히 내려올 수 있도록 도운 뒤, 체이스를 향해 말했다.

“둘째 도련님, 아가씨. 둘째 마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버지는?”

“오늘도 업무가 바쁘셔서 저녁 식사 때에나 돌아온다고 하십니다.”

“……알겠어.”

두 사람은 곧 체이스와 그의 어머니가 기거한다는 별채로 향했다. 가는 내내 유디트는 몹시 긴장했다.

드디어 체이스의 어머니를 뵙게 되는구나.

근처에 당도하니, 이미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

“오랜만이구나, 체이스.”

체이스의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유디트는 더욱 입술이 메말랐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손수 제 아들의 머리카락에 붙은 나뭇잎을 떼어 주며 말했다.

“다 커서 아직도 칠칠맞지 못하다니까. 오는 길이 힘들진 않았니? 네가 다 커서 약혼녀와 함께 저택에 방문하는 날이 올 줄이야.”

“전 익숙해서 괜찮아요. 초행인 유디트가 더 고생이었죠.”

“호호, 벌써부터 사이가 아주 단란해 보이는구나.”

그녀는 아들과 잠시간의 해후를 나누고는 곧장 유디트를 향해 돌아섰다.

가까이서 보니 체이스와 똑 닮은 은발에, 푸른 눈이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체이스가 어머니를 닮아 저렇게 잘생겼구나.

멍하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 그녀가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아가씨. 오는 길이 험하진 않았나요? 난 이 근방 언덕을 오르내릴 때 아직도 멀미가 난답니다.”

“괜찮았어요. 보내 주신 마차 덕분에요.”

그들이 방문 소식을 알리자, 카르단디 가문에서 직접 고급 마차를 보내 준 덕분에 오는 길은 제법 안락했던 편이었다.

유디트는 모자를 벗은 뒤 체이스의 어머니를 향해 무릎을 굽혀 정중하게 인사했다.

“일찍 인사드렸었어야 했는데 방문이 늦었습니다. 체이스의 약혼녀인 유디트라고 합니다.”

“죄송할 것까지 있나요. 학업 때문에 바빴을 텐데 이렇게 시간 내서 저택에 방문해 줘서 고마워요. 난 아네트라고 해요.”

그렇게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유디트의 금색 눈동자를 지그시 들여다보며 이어 말했다.

“사실 체이스가 최근에 아가씨에 대한 얘기를 편지에 적어 보내서 어떤 아가씨일지 굉장히 궁금했는데…….”

유디트를 요목조목 살핀 체이스의 어머니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참 귀엽고 사랑스럽네요. 이번만큼은 체이스 아버지의 안목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던 것 같군요. 이런 훌륭한 숙녀와 체이스를 짝지어 주다니 말예요.”

유디트는 갑작스러운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의 보잘것없는 신분을 감안하면 이번 약혼을 불만스러워할 이는 바로 체이스의 어머니일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체이스는 대체 편지에 무슨 말을 적었던 거람?

잠시 아네트는 그런 유디트를 바라보며 후후 웃었다. 그리곤 이내 체이스를 향해 입술을 뗐다.

“그나저나 체이스, 잠시 자리를 비켜 줄 수 있겠니? 유디트와 단둘이 나누고 싶은 말이 있어서 말이야.”

“……절 빼고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요?”

체이스는 자신을 빼놓고 대화 나누겠다는 말이 몹시 불안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설마 저 없는 사이에 본인 흉이라도 볼까 봐 걱정되어 그러는 건 아닐 테고.

그때 체이스가 손을 뻗어 유디트를 제 등 뒤로 감추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어머니라도 유디트를 곤란하게 만들면 용서 안 해요.”

그 말을 들은 유디트는 몹시 놀라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가 체이스를 제지시키기 위해 소매를 꾹 잡아당겼지만 그는 유디트의 쪽에는 조금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어머, 얘 좀 봐라.”

다행히 체이스 어머니는 재밌다는 듯이 호호 웃을 뿐이었다. 오로지 유디트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 의사는 편지로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단지 나도 새로운 며느리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가고 싶을 뿐이란다.”

그렇게 말하며 아네트가 어떠냐는 듯 유디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유디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체이스를 비집고 앞으로 나왔다.

“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야말로 기쁜걸요. 체이스, 피곤할 텐데 먼저 들어가서 좀 쉬고 있어.”

그녀의 말에 체이스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유디트를 내려다봤다.

그러다 이내 결심한 듯 어머니를 향해 마지못해 인사를 남겼다.

“그럼 끝나고 불러 주세요.”

제 아들이 바지춤에 손을 찔러 넣고 다소 불량스러운 태도로 사라지자마자, 아네트가 다정한 목소리로 불렀다.

“그럼 내 방으로 이만 들어갈까요?”

* * *

과연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날 따로 불러내신 걸까.

유디트는 긴장한 채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모으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둘이 마주 앉은 테이블 위 찻물에서 김이 풀풀 올라왔다.

아네트가 눈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키더니, 이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말아요. 아가씨에 대한 얘기는 나도 뒤늦게 전해 듣긴 했지만, 약혼 자체에 불만은 없답니다.”

“아…… 그렇군요.”

유디트는 그녀의 말에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아무래도 자신의 보잘것없는 신분을 염려하고 있을까 봐 미리 말해 준 것 같았다.

“체이스가 지난번에 생전 처음으로 편지를 보내더군요. 아가씨를 집안에 소개시킬 일이 제법 걱정이었나 봐요. 솔직히 난 체이스가 그저 의무감만으로 아가씨를 대해 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품에서 하얀 편지 봉투를 꺼내 만지작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 진심으로 아가씨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걸 이 편지를 통해 깨달았지 뭐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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