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94화
“체이스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다니, 물론 기쁘고 축하할 만한 일이에요. 하지만 저로선 걱정이 크기도 하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람에게 상처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기도 하니까.”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감정이 얼룩졌다.
유디트도 체이스를 통해 나름의 집안 사정을 전해 들었기에 대충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아가씨가 체이스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을 거라 생각진 않아요. 그쪽은 오랜 시간 페델리안 가문의 후원을 받아 왔다지요. 그러니 그 댁 부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사정도 충분히 이해한답니다.”
그렇게 말한 아네트는 체이스가 보낸 편지를 소중하다는 듯 쓰다듬었다.
“하지만 체이스는 겉보기엔 강해 보여도 속내는 무척 여린 아이랍니다. 그래서 그 애가 상처받을까 봐, 억지로 약혼을 맺게 되었을 때부터 절대 먼저 마음을 주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었죠. 그랬는데도 결국 일이 이렇게 돼 버리다니…….”
거기까지 말한 체이스의 어머니는 고개를 들고 유디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족이 길었네요.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가씨가 그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요. 하지만 상처만은 주지 않았으면 해요. 또 만약 이 약혼에 혹시라도 삿된 의도가 조금이라도 들어갔다면 그 애를 위해 지금이라도 미리 포기해 줘요.”
거기까지 말한 그녀가 한숨을 포옥 내쉬더니 이어 말을 마무리했다.
“……체이스를 빼고 단둘이 대화하고 싶었던 건, 아가씨께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랍니다.”
“그렇군요.”
모든 말을 듣고 난 뒤 유디트는 씁쓸하게 미소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모든 말에서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졌다.
체이스의 어머니가 염려하고 있는 부분은 유디트 역시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답변을 드려야, 그녀에게 제 진심이 잘 전달될지 고민스러웠다.
그녀는 아네트의 말처럼 체이스를 실망시키거나 상처 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고민 끝에 유디트가 신중히 입술을 떼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체이스와 약혼하기로 결심한 것은 진심으로 사랑해서는 아니에요. 저는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페델리안 부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고, 중간까지만 해도 부인께서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
“하지만 분명 시작은 그러했을지언정 지금은 많이 달라졌어요. 체이스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체이스가 얼마나 따뜻하고 섬세한 사람인지 알게 되었으니까요.”
숨이 차서 말을 멈춘 유디트가 다시 또박또박 이어 말했다.
“체이스는 제가 힘들 때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그 덕분에 페델리안 가문과의 연을 좋게 마무리 지을 결심도 하게 되었고요.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유디트의 말이 이어질수록 아네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전 부인께서 걱정하시는 만큼 이 약혼에서 어떤 삿된 의도도 갖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 온전히 저의 의지로 체이스와 앞으로의 삶을 함께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저 또한 부인의 말씀대로 체이스를 절대 상처 주지 않도록 평생 노력할 거예요. 체이스를 아끼는 한 사람으로서요.”
말을 마친 후 유디트는 멋쩍은 마음에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유디트의 말을 다 들은 아네트는 왠지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빙긋 웃어 보였다.
“뭐랄까,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이었어요. 하지만…… 덕분에 걱정을 한시름 덜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디트에게 다가오더니 가볍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해 주다니 정말 고마워요. 앞으로도 지금 했던 말 지켜 줄 수 있죠?”
“그럼요.”
유디트는 거부감 없이 그녀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체이스는 본인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시는 좋은 어머니를 두었구나.
다른 가족의 이야기를 할 때는 굳어 있던 얼굴이,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부드럽게 풀어지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평화롭게 이야기를 마친 두 사람은 함께 응접실 쪽으로 나왔다. 그 앞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듯 하녀 두 명이 서 있었다.
“바깥양반은 저녁 늦게나 돌아올 테니, 식사 시간이 다가오기 전까지 준비된 방에서 푹 쉬어요. 그런데 한 가지 주의를 주자면…….”
그녀는 잠시 말끝을 흐렸다.
“아마도 그 사람은 유디트 양의 말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을지도 몰라요. 오해는 마세요. 미워한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그냥 원래 고지식한 양반이라 그런 거니까…….”
“괜찮아요, 이미 각오하고 왔으니까요.”
유디트도 새삼 교수가 되겠다는 자신의 결정을 이 집안에서 바로 지지해 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오히려 냉대받고 무시받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하지만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이겨 내며 살아가야만 했던 그녀다.
유디트는 이제 이 정도 난관쯤은 금방 극복해 보이리라 생각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오기 전 유디트는 서둘러 정찬용 옷으로 갈아입었다.
때에 맞추어 체이스의 아버님도 저택으로 돌아오셨는지 바깥에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준비를 마친 후 방 밖으로 나오니 체이스가 미리 기다리며 서 있었다.
“준비 다 끝났어?”
“응.”
“그럼 이제 나갈까.”
그들은 아네트와 함께 별채에서 본관까지 이동했다.
체이스의 아버지, 카르단디 백작도 마침 집사에게 외투를 맡기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체이스를 발견하고는 곧장 앞으로 다가왔다.
“체이스.”
잠시 아들의 이름을 부른 채 말이 없던 백작이, 이내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황실 기사단에 합격했다는 말은 들었다, 기특하구나.”
생각보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훈훈해 보여 유디트가 빤히 응시하자, 백작이 곧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쪽이…….”
“제 약혼녀 유디트입니다. 일전에 편지로 인사드린다고 말씀드렸던…….”
“아아.”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 페델리안 공작저의 후원을 받는다던 아가씨군. 반갑소. 모처럼 왔으니 편히 쉬다 가시오.”
“감사합니다, 백작님.”
유디트도 황급히 백작에게 무릎을 굽혀 예를 차렸다.
이후 그들은 얘기를 더 나누거나 할 새 없이, 곧바로 다이닝 룸으로 이동하게 됐다.
체이스가 오랜만에 방문했기 때문인지 테이블 위는 멋들어진 식기와 장식들로 한껏 꾸며져 있었다.
곧이어 체이스의 형으로 보이는 남자까지 백작 부인 옆에 착석하자, 백작이 주위를 둘러보며 흡족하게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한데 모이니 좋구나. 경사스런 일도 생기고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백작이 기특하다는 눈으로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백작 부인이 고개를 돌려 유디트를 바라봤다.
“아가씨가 체이스의 약혼녀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유디트가 긴장하며 답했다.
“평민이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몸가짐이 단정하군요. 공작 부인께서 신경 써서 가르치셨나 보네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옆에서 체이스를 잘 보필해 주세요.”
“……네.”
그녀의 당부에 유디트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는 사이 옆에서는 계속해서 사용인들이 호화롭고 맛있어 보이는 요리들을 한가득 날라다 주고 있었다.
하지만 유디트는 너무도 긴장한 나머지 식사를 제대로 이어 가지 못했다.
그러자 체이스가 대신 그런 그녀의 식사를 살뜰히 신경 쓰며 음식을 챙겨 주었다.
백작 부인이 그 모습을 보더니 놀란 투로 말했다.
“둘 사이가 굉장히 좋아 보이는구나, 체이스. 약혼한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오랫동안 함께 공부했던 학우이기도 하니까요.”
“결혼은 언제쯤 할 예정이니? 너희만 괜찮다면 내가 준비를 도와주고 싶은데.”
그때 백작이 헛기침을 하며 백작 부인의 말을 잘라 냈다.
“체이스도 황실 기사단에서 입단하고 나서 당분간은 바쁠 테니, 좀 더 시기를 두고 봐야지.”
그때, 아까부터 끼어들 기회만 엿보고 있던 체이스가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잖아도 그것 때문에 아버지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백작이 아들을 향해 눈길을 주었다.
“네 결혼에 관해서 말이냐?”
“네.”
드디어 이곳에 온 용건을 밝힐 시간이 다가왔다.
유디트는 긴장한 채 두 부자 사이의 눈치만 살폈다. 부디 체이스가 흥분하지 않고 말을 잘 해 줘야 할 텐데.
“아버지 말씀대로 저도 당분간 바쁠 테고, 또 유디트의 진로 문제도 있고 해서요. 아무래도 당장 식을 올리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건 이해한다만, 진로 문제는 갑자기 무슨 소리지?”
백작이 이해가 안 간다는 시선을 유디트 쪽에 던졌다.
그러자 체이스가 유디트의 손을 꼭 감싸 쥐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유디트가 여러모로 재능이 뛰어난 탓에, 회계학 수습 교수 제의를 받았거든요. 내년부터 아카데미서 근무하기로 결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