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95화
체이스가 말을 마치자마자 식탁 위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아 보였던 백작의 눈매가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갑작스러운 말이구나. 게다가 내 착각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니라, 아예 통보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미리 말씀을 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유디트의 선택을 응원하는 데다, 본인의 진로는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결론만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체이스의 말에 백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황실 기사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으로 느슨해졌던 분위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냉랭하게 바뀌었다.
유디트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분위기에 침만 꿀꺽 삼켰다. 백작이 시선을 돌려 이번엔 그런 유디트를 바라봤다.
“네 약혼녀가 학업 성취도가 높고 생활 태도가 우수한 아이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네 배필로 어울린다 생각해서 약혼을 진행하려 했던 것이니까.”
“…….”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저 아인 평민이 아니냐? 신분의 한계라는 게 분명히 존재하는데, 어떻게 수습 교수가 될 수 있다는 거지?”
“……전공 교수님께서 유디트의 학업 능력을 눈여겨보시고 먼저 제안해 주신 일입니다. 만약 불가능한 일이라면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겠죠.”
체이스는 유디트를 평민이라 낮추어 말하는 아버지에게 화가 났는지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평민이 아카데미의 교수가 될 수 없다는 법도 없으니, 그건 아버지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백작은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체이스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어 그가 무겁게 입술을 뗐다.
“어떻게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란 거지? 네가 졸업을 하면 곧바로 황실 기사단에 입단해야 할 텐데, 네 약혼녀가 일을 한다면 언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 애를 낳는단 말이냐? 또 일하면서 네 약혼녀는 어찌 가정을 돌본단 말이야?”
“하지만-.”
“철부지 어린애 같은 고집 부리지 마라, 체이스. 비록 네가 장남은 아니지만, 엄연한 카르단디 가문의 차남이다. 그런 이의 부인이 남자들과 같이 일을 하겠다니. 온 사교계가 비웃을 거다.”
백작은 더 이상 할 말은 없다는 듯이 나이프를 들었다.
“수습 교수 같은 허튼 소리는 잊어버려라. 내 말을 이해했다면 다시 식사나 하자꾸나.”
“…….”
체이스가 납득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노려봤지만, 백작은 아랑곳 않고 식사를 이어 갔다.
다른 가족들도 백작의 눈치를 보며 말없이 요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유디트는 조금 복잡해진 마음으로 포크로 샐러드를 찍어 먹었다.
물론 체이스의 가족들에게 이 일을 허락받는 게 쉬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반대하시는 부모님 때문에 고민이 많은 르데샤처럼, 대부분의 학우들이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부모님이 정해 준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는 것을 당연시했으니 말이다.
애초에 여자아이를 아카데미에 입학시키는 이유도 이들을 사회의 일원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더 좋은 가문와 연을 맺기 위해서였다.
아카데미서 품행이 바르고 성적이 좋은 여자아이들일수록 결혼 시장에서 더 좋은 신붓감으로 취급받곤 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이니 아마 자신이 여기서 아카데미서 일하고 싶다고 계속 고집한대도 카르단디 가문 사람들을 설득하긴 요원할 것으로 보였다.
만약 백작님이 계속 반대를 하신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역시 수습 교수가 되는 걸 포기해야 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 그때, 정적을 깨고 체이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렇다면 제가 가문에서 나가겠습니다.”
뭐라고?
유디트는 깜짝 놀라서 샐러드를 뒤적이던 포크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 요란한 소리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가족 모두가 마찬가지로 놀란 눈으로 체이스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지난번에 체이스가 집안을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수습 교수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곤 했지만, 설마 진짜로 저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모두의 이목이 체이스에게 집중된 와중, 백작이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 너 방금 뭐라고 했지?”
“가문에서 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그게 무슨 의미인지나 알고 말하는 거냐?”
체이스는 대답 전, 유디트를 잠시 돌아봤다. 그는 미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네, 어차피 황실 기사단에 입단하고 나면 한 가정을 건사하기에 부족함 없는 대우를 받을 테니까요. 사실 아버지께서 허락하시든 아니든 관계없이, 어차피 졸업하면 이 집을 나갈 계획이기도 했습니다.”
체이스의 입술에서는 계속해서 충격적인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농담기도 섞여 있지 않았다.
백작이 말도 안 된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 집을 나갈 계획이었다고? 대체 왜? 지금껏 카르단디 가문의 검술을 그렇게 배워 놓고 말이냐?”
“그야 더 이상 아버지께 의지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너는 가문을 나간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다. 그러니까 그렇게 쉽게 허무맹랑한 말을 할 수 있는 거겠지.”
그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푹 한숨을 내쉬더니, 백작 부인을 힐끔 바라봤다.
그리곤 다시 체이스를 향해 고개를 돌린 후 어르듯 말을 이었다.
”가문을 나간다는 것은 네가 카르단디의 구성원으로서 누리던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한단 얘기다. 네가 앞으로 받게 될 가문의 보호나 권익이 얼마나 큰지 아느냐?”
“그것도 상관없습니다.”
“……하, 정말이지 기가 막히는구나.”
백작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런 백작의 곁에서 흥미롭다는 듯 웃고 있던 백작 부인이 입술을 뗐다.
“여보, 굳이 반대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어차피 이 가문은 장남인 알렉이 이어받게 될 텐데. 본인이 저렇게 사양한다는데 어쩔 수 없죠.”
백작 부인은 그렇게 말하며 체이스를 돌아봤다.
“체이스, 지켜보다 보니 약혼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주 기특하구나. 이번에 황실 기사 시험에도 합격한 걸 보니, 너라면 어디서든 잘 해낼 거라 믿는다. 두 사람을 계속 응원하마.”
유디트는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백작 부인은 체이스를 진정 자식으로 아끼는 것 같지 않았다.
가문의 모든 권익을 포기한다는 건 일반적인 부모 입장에서는 반대하고도 남을 일인데, 오히려 쌍수를 들며 환영하다니.
그녀는 체이스가 보잘것없는 평민과 맺어진 데다, 가문에서 나가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을 무척이나 기뻐하고 있는 듯 보였다.
체이스 역시 백작 부인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비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덕담 감사합니다.”
이어 그가 유디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자, 유디트. 여기에 더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가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백작이 화를 참는 듯 가라앉은 음성으로 그들을 붙잡았다.
“이 고얀 놈. 내가 이때껏 너를 위해…….”
그의 노기 어린 목소리에 체이스가 아버지를 돌아봤다. 이내 그가 나직히 입술을 뗐다.
“아버지, 더는 저를 위한다는 말로 저를 휘두르려 하지 마세요.”
“넌, 네가 지금 무엇을 포기하려 는 건지 모른다.”
그 말에 체이스가 비웃듯이 피식 웃었다.
“아버지야말로 제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시잖아요.”
이어서 체이스가 유디트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렇지 않아도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 보이던 체이스였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멀어져 버리는 건 아닐까.
죄책감이 든 유디트는 나가자는 체이스의 말에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단호한 체이스의 눈빛을 알아차리곤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아무래도 그가 하루 이틀 고민해서 내린 결정은 아닌 것 같았기에.
* * *
저택 밖을 완전히 빠져나와서야 체이스의 발걸음이 멈췄다. 유디트는 여전히 심란해 보이는 체이스를 위로하기 위해 입술을 뗐다.
“체이스…….”
“많이 놀랐지? 미안해. 좀 더 예의를 차리려고 했는데 화가 나서 어쩔 수 없었어.”
그렇게 말하며 그가 거칠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아버지께서 네가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널 면전에서 무시하는 걸 들으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라.”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네가 왜 사과해? 무례했던 건 우리 가족들인데.”
“그래도…….”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아버지에게 더 따지고 싶었는데, 네가 중간에서 괜히 난처한 상황이 될까 봐 그나마 참은 거야.”
어쩐지 심히 날카롭게 반응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를 위해서 그랬던 거였구나.
상황이 곤란해지긴 했지만, 그가 자신을 생각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체이스는 여전히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디트의 뺨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리고 혹시나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내게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어. 네게 자세히 말하진 못했지만, 이 문제 말고도 아버지와 전부터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릴 때부터 내가 본인 뜻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엄청 화를 내셨지. 아마 그 때문에 나뿐만 아니라 형까지 고생이 많았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