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96화
유디트는 체이스의 말에 아까 식사 자리를 다시 한번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그러고 보니, 체이스와 백작님께서 언쟁을 벌이는 동안 알렉이란 남자는 조소를 지은 채 묵묵히 식사를 이어 가기만 했었지.
이제야 그가 보인 반응의 의미를 알 것만 같았다.
“아무튼 난 한시도 더 여기 있기 싫어. 유디트는 어때?”
“나야 네 의견에 따르고 싶지만…… 말을 못 타는걸.”
“괜찮아, 내가 마차를 몰 줄 알아.”
체이스가 씨익 웃더니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저택 바깥에 위치한 마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그 안에서 새까만 말 한 마리를 꺼내왔다. 유디트가 뭐라 반응할 틈도 없이 금세 작은 짐마차에 말을 연결했다.
“그럼 안에 타실까요.”
순식간에 작업을 마친 체이스가 정중하게 유디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디트가 마지못해 그 위에 손을 얹으려던 순간이었다.
그때 근처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체이스!”
놀란 유디트가 옆을 돌아보니 체이스의 형, 알렉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형?”
체이스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도 형의 갑작스런 등장에 놀란 것 같았다.
알렉은 근처로 다가와 금방이라도 떠날 것 같은 체이스의 팔을 붙잡고 입을 열었다.
“체이스, 잠깐만.”
“무슨 일이야? 만약 아버지께 가서 사과하라는 거라면 난…….”
“아버지께 대든 일로 널 타이르려는 건 아냐. 하지만 네 결정이 경솔하긴 했어.”
그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당장 돌아가서 실언했다고 말씀드려. 넌…… 아버지가 너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몰라.”
그의 말에 체이스가 곧바로 인상을 찡그렸다.
“……그건 내가 아니라 형이겠지. 나는 내놓은 자식이나 마찬가진데.”
그의 말에 알렉이 실소하며 대답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너를 더 우선하셨어.”
그는 인정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네가 나보다 검에 재능을 보였을 때, 마음 놓고 기뻐하지도 못하셨지.”
“그게 무슨…….”
체이스는 뜻밖의 소리에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알렉은 옆에 서 있는 유디트가 신경 쓰이는지, 그녈 힐끔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아버지의 표현 방법이 경솔하셨다는 걸 인정해.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다 내버리겠다는 건 미친 짓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체이스가 답답한지 인상을 찡그렸다. 알렉은 그의 팔을 붙든 손에 힘을 풀며 뜬금없는 대답을 했다.
“우리 가문은 무가야. 그리고 넌, 카르단디 가문의 검술을 완벽하게 구사한 유일한 자식이지.”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그래서 아버지께선 네게 기사단을 물려주실 생각이셔.”
“…….”
뜻밖의 소리였는지, 체이스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그가 눈에 불을 켜고 항변했다.
“하지만 기사단장은 오직-.”
“카르단디 가문의 가주만이 이어받을 수 있지, 맞아.”
“……그래. 그리고 가주는 형이 될 거잖아.”
체이스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고개를 젓자, 알렉이 체념 어린 미소를 입가에 띠며 말했다.
“어차피 나에겐 자질이 없어.”
“내가 가문을 나가려는 게 누구 때문인데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둘의 대화를 뒤에서 엿듣던 유디트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설마 체이스가 당당하게 가문을 나가겠다는 선언을 한 이유가, 제 이복형제 때문인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만약 형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난 더더욱 가문으로 돌아갈 수 없어.”
“나 때문이라면 굳이 양보할 필요 없다, 체이스.”
“착각하지 마. 이건 양보가 아니라, 백작 부인과 가신들에게 내 어머니가 시달릴까 걱정되기 때문이야.”
체이스가 뒤에 서 있는 유디트를 힐끔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젠 보호할 사람이 한 명 더 늘었기도 하고.”
더 설득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곧 알렉이 입을 다물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그는 숨을 들이마신 뒤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게 내뱉었다.
그리곤 다시 입술을 뗐다.
“그래…… 어쨌거나 그동안 내 어머니 때문에 너희 모자에게 고초를 겪게 했던 것 미안하다.”
“…….”
“내가 모자라고 용기가 없어서 어린 널 계속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도 미안하고.”
“…….”
“네가 가문을 떠나든 말든, 이 말만은 꼭 해 주고 싶었어.”
말을 마친 알렉은 이내 그것만으로 족하다는 듯,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 순간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형.”
이름이 불린 알렉이 잠시 자리에 멈춰 섰다. 그가 동생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자, 체이스가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말을 마쳤다.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
가까운 거리에서 알렉이 보일 듯 말 듯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곧 그는 뒤를 돌아 저택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체이스는 그런 형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유디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눈빛은 혼란스러운 듯 잘게 떨리는 게 보였지만, 이어진 말투만은 단호했다.
“……이제 떠나자.”
뭐라고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걸어서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유디트는 속으로 빌었다.
부디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동안만이라도, 차가운 밤바람이 체이스의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 주기를.
* * *
유디트와 체이스가 식사 자리를 박차고 나간 직후, 다이닝 룸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이어진 침묵 끝에 백작 부인이 냅킨으로 입을 닦은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여간 요즘 젊은이들이란…… 모처럼 흥미로운 만찬이었어요.”
피식 웃은 그녀가 짧게 말을 남긴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장남인 알렉도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졌다.
다이닝 룸 안에는 오직 두 사람만 남은 상황이었다.
“대체 체이스는……”
백작은 계속해서 조금 전의 말다툼을 떠올리고 있었다. 약혼녀의 일을 논하다 갑자기 가문을 나가겠다고 통보하던 체이스의 모습을.
그 모습을 상기하니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져 왔다.
그가 두통에 인상을 찡그리자, 옆에서 눈치를 살피던 아네트가 물잔을 건네주었다.
“이거라도 마시세요.”
“고맙소.”
차가운 물을 마시니 조금이나마 지끈거리는 머리가 나아지는 듯했다. 백작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대체 체이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가문을 나간다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야.”
그는 체이스가 왜 갑자기 그렇게 화가 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드는 것도 모자라 가문까지 나가겠다니. 아비인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물려줄 각오를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옆에서 백작을 바라보던 아네트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체이스도 아마 여러 가지로 마음이 상했을 거예요. 비록 정략적으로 맺어진 사이이긴 하지만, 그 애는 약혼녀인 유디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거든요.”
그녀가 옅은 미소과 함께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내게 구애했을 때처럼, 물불을 가리지 못하는 모습이 아주 똑같던데요.”
아네트의 말에 백작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둘의 사이가 벌써 그렇게 가까워진 건가?”
“그럼요. 젊은 땐 달아오르는 것도 순식간이란 걸 당신도 알잖아요.”
아네트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애 앞에서 당신이 유디트를 폄하하듯이 말했으니…… 화가 날 수밖에 없지요.”
“그건 내가 경솔했단 걸 인정하지.”
백작이 씨근덕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약혼녀를 아카데미서 일하게 해 달라는, 그 허무맹랑한 소리를 들어줄 순 없어. 거기다 가문을 나가겠다니, 선을 넘었지.”
아네트는 잠시 그런 백작을 안타까이 바라보다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체이스도 가볍게 생각하고 통보한 것 같진 않았어요. 말은 하지 않았어도, 평소에 우리에게 서운한 게 많았겠죠.”
“하지만 당신도 알지 않소. 나 역시-.”
“네, 알아요. 가문의 위계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 일부러 그 애에게 냉혹하게 굴었다는 사실을요. 하지만 그 아이는 어렸으니 당신의 깊은 뜻을 이해하기엔 무리가 있었겠죠.”
아네트는 특유의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제 체이스는 충분히 설명하면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에요. 그러니 나중에라도 당신이 솔직하게 사정을 털어놓고 이해를 구하는 게 어때요?”
“…….”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서요.”
조곤조곤 설득이 이어지는 동안 백작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다.
머릿속에는 아직도 아까 체이스가 남겼던 말만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아버지야말로 제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시잖아요.”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체이스가 원하는 건…… 그 유디트란 애가 수습 교수로 일하는 것뿐인가?”
그의 질문에 아네트가 백작과 물끄러미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아마도요. 사실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
“저 역시 당신만 바라보며 살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당신은 내가 집에 있어 좋았을지 몰라도, 난 점점 온실 속 화초가 되어 가는 기분이었어요.”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만을 믿고 함께한 생활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체이스를 가졌을 때도, 낳은 이후에도 심한 우울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어느새 백작의 얼굴에 죄책감이 떠올라 있었다. 그런 그에게 쐐기를 박듯 아네트가 나긋하게 말을 마쳤다.
“그러니 부탁이에요. 나와 똑같은 짐을 그 애들한테 지우지 말아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