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97화 (97/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97화

카르단디 가문을 다녀오고 난 뒤 며칠 지나지 않아 체이스는 곧바로 기사단 합숙 훈련을 떠나게 되었다.

그의 마중을 나오게 된 유디트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이제 헤어지면 앞으로 몇 주간은 못 보겠구나.

유디트는 기사단 제복을 차려입은 그를 최대한 머릿속에 남겨 두기 위해 애썼다.

새하얀 정복이 체이스의 은발에 무섭도록 잘 어울려서, 지나가는 학생들마다 무심코 돌아볼 정도였다.

‘지금도 이렇게 인기가 많은데, 기사단에 가서는 괜찮으려나?’

예의 선배라던 여기사의 모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얼굴이 어두워졌다.

……기사단 합숙 훈련이라면 체이스의 선배라던 그 여기사분과 함께 어울리게 되겠지.

자신이 없는 동안 그 여기사와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체이스를 상상하자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그의 옷깃을 매만져 주며 유디트가 슬며시 물었다.

“그런데…… 황실 기사단에는 여자인 기사분들이 많은 편인가?”

“응?”

갑자기 그런 걸 왜 묻냐는 듯이 체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지난번에 그 여기사 분을 뵈니 신기해서 말이야. 보통은 흔하지 않잖아?”

“뭐, 확실히 그렇긴 하지.”

사회 통념상 여성들이 험한 일을 하는 것이 그렇게 좋게 받아들여지진 않았기에, 여성 기사의 경우 남성보다 현저히 적은 편이었다.

“그래도 어찌 보면 명예직인 데다 공무원이기도 하니까. 얘기를 들어 보니 대부분 만족하며 근무하시는 것 같아.”

“으음, 그렇구나.”

“그리고, 사실 그 정도 실력을 낭비하기도 아깝잖아?”

이어서 체이스는 황실에 근무하는 기사들의 기량이 어떤지에 대해 잠시 흥분하며 떠들어 댔다.

하지만 그가 말을 이어 갈수록 유디트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지기만 했다.

“유디트, 표정이 왜 그래?”

“……그냥, 네가 훈련을 하다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서.”

유디트는 조금 망설이다가 한마디 말을 더 덧붙였다.

“웬만하면 몸조심해. 다치면 바로 치료받고.”

그녀의 무던한 말투에 어린 걱정을 읽어 낸 체이스가 곧 환하게 웃어 보였다.

“나 걱정해 주는 거야?”

“뭐, 그런 것도 있…….”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체이스가 두 팔을 뻗어 유디트를 와락 부둥켜안았다.

그리곤 정수리에 뺨을 문대며 잠시 얼마간 그녀의 품을 만끽했다.

체이스가 이내 벅찬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 진짜 떨어지기 싫다.”

다시 그의 고개가 떨어지더니, 붉은 눈이 유디트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다녀오는 동안 나 잊지 않을 거지?”

“무슨 질문이 그래.”

“……네가 너무 예뻐서 걱정돼.”

지금 얘가 날 놀리는 건가?

비록 자신의 외모가 크게 못나다 생각한 적 없는 그녀였지만, 어딜 가든 이목을 끄는 체이스만큼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공치사를 들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유디트가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너나 걱정해.”

“나?”

“응, 네가 더 잘생겼잖아.”

“……나 잘생겼어?”

체이스가 생경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에 의아해진 건 오히려 유디트 쪽이었다.

“몰랐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분명 맨 처음 만났을 때의 체이스는 자신의 인기를 훤히 파악하다 못해 자신감이 넘치는 상태였다.

“아니…… 넌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이내 유디트에게 잘생겼단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는지 체이스가 히죽 웃으며 다시 한번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금 네가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다행이고.”

체이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유디트의 귓가를 간질였다. 어쩐지 양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유디트는 그런 체이스의 등을 조용히 두드려 주며 생각했다.

‘왠지 보름이 길 것 같네…….’

아쉬운 마음에 작별 인사를 하느라 꽤 오랜 시간을 소요한 그들은 한참 후에야 떨어질 수 있었다.

“그럼 잘 다녀와, 체이스.”

“응, 너도 잘 지내고.”

휴일 오전이라 그런지 아카데미 정문은 외출을 나가는 학생들로 북적였다.

유디트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체이스가 떠나는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체이스도 차창 안에서 손을 뻗어 그 인사를 받아 주었다.

고작 몇 주짜리 이별에 불과한데 왜 이렇게 마음이 울적할까. 그만큼 체이스의 존재가 유디트에게 커져 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렇게 그는 점차 작아지더니 이내 점처럼 보였다.

체이스를 배웅한 후, 유디트는 왠지 기진맥진해졌다.

그 많은 인파 속에서 체이스를 떠나 보내고 나니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공허하고 쓸쓸했다.

……벌써부터 체이스가 보고 싶어지네.

‘잘 지낼 수 있겠지?’

사실 카르단디 저택을 다녀온 이후로, 체이스는 부쩍 우울해했다.

그래서 아카데미에 돌아온 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긴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체이스는 한참을 제 유년 시절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러니까 아버지와는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 어차피 사이만 더 나빠질 것 같으니까.’

‘그래도 정말 평생을 안 보고 지낼 수 있겠어?’

‘당연하지. 난 너만 있으면 돼, 유디트.’

‘……네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지금은 체이스가 아버지에게 섭섭한 것이 무척 많아 보여서, 유디트도 섣불리 화해를 제안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체이스와 백작님 사이의 갈등의 골이 더 깊어 보였으니까.

하지만 체이스의 형이란 분이 하신 말씀을 들어 보면, 백작님도 체이스에게 나름 애정이 있으신 것 같던데……

거기까지 생각한 유디트는 언제가 될진 모르겠으나, 나중에 혼자서라도 카르단디 백작님을 다시 한번 만나 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 때문에 두 부자 사이가 영영 멀어지는 것 같아 그녀 또한 마음이 좋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결심한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바로 카르단디 백작에게서였다.

“백작님이 왜 내게 편지를……?”

유디트는 편지를 손에 들고서 잠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여러 가지 상상이 들었다.

분명 마지막으로 만나 뵀을 때 크게 노하셨으니 좋지 못한 일로 연락하신 게 아닐까.

예를 들어 체이스와의 약혼을 없던 일로 하라든가…….

불길한 상상이 유디트의 머릿속을 잇따라 스쳐 지나갔다.

유디트가 이내 다급하게 봉투를 열어 보았다. 하지만 걱정과는 다르게, 편지의 내용은 무척 온화했다.

[유디트에게.

지난번 식사 자리에서 너를 무시하는 듯한 언행을 보여서 미안하구나.

만약 괜찮다면 다시 한번 저택으로 찾아와 준다면 좋을 것 같은데, 언제 시간이 날지 알려 줄 수 있겠니?

체이스 없이 다시 대화를 나눠 보고 싶구나.]

“…….”

유디트는 조용히 헛숨을 들이켰다.

내가 설마 잘못 읽은 건 아니겠지? 아니면 꿈을 꾸는 건가?

설마 그 완고하게 보이던 백작님이 내게 먼저 사과를 하실 줄이야.

유디트는 어쩔 줄 모르고 입술만 잘근거렸다.

‘하지만 아직 긍정적으로 생각하긴 일러.’

이렇게 먼저 만남을 제안해 놓고 체이스와 헤어지라고 나오실지도 몰랐다.

만약 그렇다 해도 자신 역시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이제 유디트 또한, 체이스 없이 살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어쨌건 일단은 카르단디 백작님과 다시 한번 만나서 그때의 무례를 사과드리는 게 좋겠지.’

단단히 결심을 마친 유디트는 손에 펜을 쥐고 막힘없이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그렇게 유디트는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카르단디 저택을 다시 찾았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입김이 하염없이 뿜어져 나왔다.

자신을 맞이해 준 집사가 재빨리 그녀의 짐을 받아 들며, 따뜻한 실내에서 어서 몸을 녹이라고 재촉했다.

“백작님도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유디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하인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지난번 저택에 들렀을 때는 들러 보지 못했던 2층에 올라오니 창문 너머로 바깥 경치가 내다보였다.

저 멀리 언덕 아래까지 하얀 눈으로 뒤덮여 가는 모습이 무척 장관이었다.

유디트가 잠시 방문 앞에서 대기하며 그 풍경을 바라볼 동안, 하인이 문을 두드리며 그녀의 도착을 알렸다.

“유디트 아가씨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잠시 후 부드럽게 문이 열리더니, 하인이 들어오라는 듯 그녀를 안으로 인도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백작이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날씨가 궂은데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아닙니다, 백작님.”

“일단 앞에 앉지.”

그는 곧장 몸을 일으키더니, 유디트에게 소파 자리를 권했다.

나란히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 사이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두 손을 맞잡고 깍지를 끼고 있던 백작이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체이스는 지금쯤 합숙 훈련을 떠났겠군?”

예상외로 아들의 소식을 꿰고 있는 모습에 유디트는 짐짓 놀랐다.

“잘 적응하는 것 같던가?”

“아…… 편지로 근황을 전해 듣기로는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음, 그렇다면 다행이고.”

백작이 근엄하게 한숨을 내쉴 동안, 유디트가 장갑을 낀 손을 꼼지락거리며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저어, 백작님.”

그녀는 내내 마차를 타고 오면서 머릿속에 정리해 두었던 사과의 말을 끄집어냈다.

“지난번에 찾아뵈었을 땐 정말 죄송했습니다.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리고 떠나서, 저도 체이스도 마음이 많이 불편했어요.”

그 말을 들은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글쎄, 아가씨는 모르겠으나 체이스가 본인의 행동을 후회했을 것 같진 않군.”

“…….”

“아가씨야말로 체이스의 갑작스런 행동에 많이 당황했을 텐데, 오히려 내가 사과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백작의 말에 유디트는 잠시간 대답도 못 하고 땀만 뻘뻘 흘려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