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98화
백작은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유디트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집요한 시선에 오히려 더 긴장이 되었다. 그때 백작이 피식 웃으며 입술을 뗐다.
“혹시 내가 왜 저택에 다시 한번 찾아오라고 편지를 보냈는지 아나?”
“아…… 그게.”
유디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끝을 흐렸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처음엔 지난번에 무례를 저지른 일을 핑계 삼아 수습 교수직을 맡아서는 안 된다고 일침을 놓으실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만나 뵈니 생각보다 저를 호의적으로 대해 주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음…… 수습 교수직을 포기하란 말씀을 하시려던 게 아니었나요?”
“…….”
“……아닌가요?”
그녀의 말을 들은 백작이 빙긋 웃더니 몸을 뒤로 젖히며 의자에 편하게 기댔다.
“물론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었지.”
“…….”
“그런데 아네트가 말하길, 체이스 그 녀석이 아가씨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더군.”
왠지 그 말을 들으니 제 볼이 다 홧홧해지는 기분이었다. 유디트가 눈을 내리깔며 입을 꾹 다물었다.
“나로서는 예상도 못 한 일이었지. 오로지 검에만 미쳐 있는 것 같던 그 녀석이, 벌써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질 나이가 되다니…….”
백작이 소파의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이런 말을 하면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네만, 사실 체이스가 그렇게 반항한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네.”
그 말에 유디트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카데미에서 하던 행동으로 미루어 봤을 때, 분명 집에서도 오냐오냐 자라며 제멋대로 살지 않았을까 한때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어머니에게 하는 행동만 봐도 엄청 깍듯하고 예의 바르게 보이긴 했지.
“그런데 아가씨 때문에 그 애가 그렇게 화를 내며, 가문까지 나가겠다고 선언하다니……. 솔직히 충격이 컸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 아가씨를 탓하려는 건 아니네. 그만큼 체이스가 아가씨에게 진심이라는 거겠지.”
백작이 푸욱 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 일로 인해 나도 깨달은 게 많아. 체이스의 말대로, 너무 내 입장에서만 그 애의 행복을 생각했던 게 아닌가 싶었어. 나라고 그 애가 불행해지길 바라는 게 아닌데…… 왜 아니겠나? 그 애도 똑같은 내 자식인 것을.”
거기까지 말한 백작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유디트는 그런 그의 모습을 안타까이 바라보다가 망설이며 질문했다.
“혹시 그런 얘기를 체이스에게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체이스는 백작님께서 본인을 싫어한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 같던데…….”
“말할 상황이 아니었네. 한 가문의 가주라는 위치는 생각보다 더 많은 조심성을 갖춰야 하지. 내가 체이스를 아낀다는 걸 알아차리면, 가신들이나, 방계의 친척들이나…… 아무튼. 그 애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으니까 말이야.”
“아…….”
유디트가 아연하게 입을 벌렸다.
“그래서 일단은…… 그 애가 한 사람의 성인이 되어 충분히 자기 몫을 하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 가문의 기사단장을 맡길 생을 하고 있었지. 그러면 그 애도 충분한 힘을 갖게 될 테니, 더는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했네. 아, 혹시 알고 있나? 우리 가문에서는 오랫동안 가주가 기사단까지 통솔해 오고 있었다는 걸.”
그 얘길 들으니 지난번 체이스의 형과 체이스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유디트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들었습니다.”
“알고 있다니 얘기가 빠르겠군. 하지만 그 방법은 여러모로 비효율적이야. 평생 검만을 수련한 사람이 세상 이치에 밝기도 사실 쉽지가 않거든. ……그래서 난 오랫동안 고민을 하다가, 내 대에서 그것을 분리시킬 생각을 했네.”
백작은 자신이 쭉 계획했던 바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가주와 기사단장이 두 사람으로 분리된다면, 좀 더 가문의 발전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내 아들들만 봐도 그러하네. 첫째인 알렉은 꽤 영리하지만, 검술로서는 영 형편이 없지. 그리고 체이스는 자네도 알다시피…….”
“……머리가 좋지 못했군요.”
유디트는 엉망이었던 체이스의 성적표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점점 체이스의 형이 했던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를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원래대로라면 장남인 알렉에게 모든 걸 물려 주는 게 맞았겠지만, 체이스를 아끼는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걸 물려주고자 그 애에게 억지로 약혼도 시키고-.”
그 말을 하며 백작이 앞에 있는 유디트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리고 억지로 제 어미에게서 떼어 내 아카데미에 보내기도 했던 거라네. 이 집안과 떨어뜨려 놓기 위해 말이야. 물론 그 과정에서 체이스의 의견 같은 건 전혀 들어주지를 않았어. 아마 그 때문에 내내 불만이 쌓였겠지.”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유디트가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그제야 왜 체이스가 아카데미에서 그토록 불량아처럼 굴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두 부자 사이의 갈등의 골은 이것 때문에 생겨났던 거였구나.
“그랬더니 이 멍청이 같은 자식이 끝내는 가문을 나가겠다고 선언하게 된 거라네.”
모든 용건을 토해 낸 백작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는 현 상황이 몹시 답답한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자네가 수습 교수를 맡거나 하는 일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네. 그 일은 얼마든지 자네들 마음대로 해도 좋아.”
유디트가 스르르 손을 내리자 놀랍다는 듯 살짝 벌어진 입이 드러났다.
“정말이신가요?”
“……그래, 그보다는 그 멍청이 같은 녀석이 가문을 나가겠다는 발언을 철회하도록, 자네가 설득이나 해 줬으면 좋겠군. 각서를 쓰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내 첫째 부인은 아마 그것을 받아 내려 혈안이 되어 있을 거야.”
그의 말에 지난 식사 자리에서 마주쳤던 백작 부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유디트는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 문득 어딘가에 생각이 미쳤는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어…… 백작님, 하신 말씀은 모두 이해했습니다만. 저로서도 체이스의 의견을 강제할 수는 없어요.”
“수습 교수직을 허락해 준 것만으로는 부족한가?”
“그게 아니라……. 이미 체이스의 마음에 쌓인 앙금이 크기 때문에…… 백작님께서 직접 사정을 설명하지 않으시면 아마 믿지 못할 거예요.”
“아아.”
백작이 그녀의 말에 납득한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덧붙였다.
“아네트도 자네와 똑같은 말을 하더군.”
체이스를 그토록 아끼는 그분이라면 분명 그렇게 말씀하실 법도 했다.
유디트는 싱긋 웃으며 제안했다.
“하지만 체이스와 대화를 나눌 자리는 마련해 드릴 수 있어요. 원하신다면 백작님 입장도 그전에 잘 설명해 드릴게요.”
“…….”
백작이 내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 녀석이…… 나와 대화하기를 원할지 잘 모르겠군.”
“그럴 리가요. 체이스가 그 일이 있고 나서 혼자 얼마나 우울해했는데요. 백작님의 마음을 알게 되면 분명 속으로는 기뻐할 거예요.”
유디트는 부드러운 어조로 백작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처음에는 그다지 반기지 않는 것 같던 백작도, 그녀의 반복된 권유에 혹했는지 다시 유디트에게 물끄러미 시선을 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네, 물론이죠!”
유디트가 씩씩하게 대답하자, 백작의 눈빛이 어느새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뭐랄까…… 아가씨도 참, 아네트를 많이 닮았군. 그 당찬 면이.”
정확히 무엇을 보고 느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나쁜 의도로 말씀하시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유디트는 대화가 좋게 마무리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아카데미로 떠나기 전에 다시 인사를 올렸다.
“오늘 대화 감사했습니다, 백작님의 진심을 알 수 있어 기뻤어요.”
“……나도 아가씨가 똘똘해서 마음에 들었네. 구구절절한 얘기 들어주어 고맙군.”
백작은 유디트를 마중하며 어색하게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참, 아카데미서 일하게 되면, 집도 그 주변에서 구하게 될 계획인가?”
“아, 수습 교수로 일할 경우 따로 교직원 방을 내어 준다고 해요. 그래서 결혼 전까지는 거기서 머물 생각입니다.”
유디트가 밝게 대꾸하자 백작이 인상을 썼다.
“그렇군. 만약 내가 체이스와 화해한다손 쳐도, 두 사람의 일자리를 생각하면 이 저택에서 머물기는 힘들겠어.”
“아…… 아무래도 그럴 것 같습니다.”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내시는 이유가 뭔지 좀처럼 짐작할 수가 없어서, 유디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백작이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신혼집을 따로 사 주어야겠군.”
그 말에 깜짝 놀란 유디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별건 아니네, 내가 주선한 약혼이니 결혼까지는 내가 책임을 져 주어야지. 원하는 집이 있다면 체이스와 천천히 다니면서 알아보게나.”
……정말이지 체이스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아버님이셨다.
“네…… 감사합니다.”
유디트는 당장 어떤 말도 할 수 없어서, 일단은 에둘러 말하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러고 보니 약혼을 미룬다는 생각만 했지, 결혼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계획을 짜 둔 바가 없었다.
그런데 신혼집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확 현실감이 밀려드는 기분이었다.
‘……체이스도 이런 준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으려나.’
왠지 자신을 바라보며 늘 헤실헤실 웃는 얼굴만 보면, 딱 잘라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라 살짝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