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99화
* * *
눈발이 내리는 이른 아침.
곧 다가올 방학을 대비해 카렐 교수는 오전부터 사무실에 나와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겨우내 학회를 다녀오는 등 자리를 오래 비우게 될 테니, 당장 필요한 자료들부터 해서 챙길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똑똑.
한창 자료 정리에 열중이던 와중, 뜬금없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사전에 약속도 잡지 않고 연구실에 방문하다니, 그가 딱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카렐 교수는 끄응 소리를 내며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하지만 방문객은 카렐 교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유디트?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냐.”
짜증이 어려 있던 카렐 교수의 표정이 금세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는 차가운 복도에 서 있는 유디트가 얼른 연구실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수습 교수직에 필요한 서류를 내러 왔어요.”
유디트가 웃으며 한 말에, 곧바로 카렐 교수의 표정도 환해졌다.
그도 그럴 게 얼마 전, 카르단디 저택에 허락을 구하러 다녀오겠다는 얘기를 전해들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 별다른 소식이 없어 궁금해하던 참이었는데…….
“어른들이 허락해 주시든?”
“네, 처음엔 좀 곤란해하셨긴 한데, 나중엔 흔쾌히 그러라고 하셨어요.”
결론적으로 잘 풀렸단 얘길 듣자마자 카렐 교수는 묵은 응어리를 해소한 것처럼 기쁜 얼굴을 했다.
“정말 잘됐구나. 잘됐어.”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카렐 교수는 부산스레 움직이며 얼른 손님을 대접할 찻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뭘 마실 테냐? 얼마 전에 다른 교수에게 좋은 찻잎을 선물받았는데, 살라메…… 지방에서 났다던가, 그러더구나.”
“네, 그걸로 주세요. 교수님은 아직 점심 안 드셨죠?”
유디트가 빙긋 웃으며 가방에서 종이로 감싼 큼지막한 무언가를 꺼내 놓았다.
“근처 카페에서 파는 샌드위치인데 맛있다고 유명해서요. 오는 길에 포장해 왔어요.”
“이것 참, 신경 써 줘서 고맙구나.”
오늘도 대충 점심을 때우려 했던 카렐 교수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는 사이 유디트의 시선은 어느새 연구실 책상 위에 놓인 오르골에 향해 있었다.
“어, 제가 선물해 드린 물건이네요.”
“오르골 말이냐? 그래, 덕분에 심심할 때 종종 듣는단다.”
“곡이 여러 가지 들어 있어서 좋아 보이더라고요.”
카렐 교수는 뿌듯하게 웃어 보이는 유디트의 얼굴을 바라보다, 얼마 전 그녀가 찾아왔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 당시 곱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었다.
“내 생일도 아닌데 웬 선물이냐?”
“교수님께 그동안 신세 진 게 많아서요. 체이스가 황실 기사단에 합격하는데 도움을 주시기도 했고요. 작게나마 꼭 보답을 해 드리고 싶었어요.”
카렐 교수는 연구에만 몰두하느라 시기를 놓쳐 결혼을 하지 못했고, 아이 또한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때만큼은 딸을 가진 아버지의 심정을 알 것만 같았다.
그동안 주변 교수들이 자식 자랑을 할 때마다 심드렁해하던 그였지만, 이제는 왜 그토록 자식 자랑에 열중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달까.
찡한 속내를 애써 감추며 카렐 교수가 정성스레 우린 차를 들고 그녀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그럼 어디, 빠짐없이 서류를 챙겨 왔는지 볼까?”
그는 갈색 봉투 안에 담긴 종이들을 흐뭇한 눈길로 살펴본 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걸로 내년 첫 학기부터 일을 하면 되겠구나. 그런데…… 교직원들이 쓰는 방은 신청하지 않는 거냐?”
“아…… 그게요, 교수님.”
유디트가 우물쭈물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것 때문에 요즘 고민 중이에요. 다행히 아카데미 측의 배려로 겨울 방학 동안까지는 기숙사에 머물게 되긴 했는데…….”
사실 얼마 전 유디트의 앞으로 또 하나의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
다름 아닌 페델리안 부인에게서 온 것으로, 그녀는 유디트가 아카데미서 일할 거라는 계획을 듣자마자 근처의 작은 집을 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녀에게 신세 지는 것은 유디트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정중하게 거절의 뜻을 표하며 머물 곳은 알아서 구해 보겠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그런데 얼마 전, 카르단디 백작도 근처에 신혼집을 구해 주겠다고 통 큰 제안을 해 주셨다.
그때 처음으로 유디트는 체이스와의 결혼 준비에 대해서 진지한 생각을 하게 됐다.
만약 체이스도 함께 살 집을 구하는 데 찬성한다면, 어른들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둘의 벌이로도 꽤 괜찮은 방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굳이 교직원 방에서 머물 이유도 없어지는 것이다.
“체이스와의 결혼은 서로 당분간 일이 바쁠 것 같아서 좀 더 두고 보기로 했는데……. 생각해 보니 아카데미에서 졸업하고 나면 둘 다 머물 곳이 새로 필요해지더라고요.”
체이스는 황실 기사단에 근무해야 했고, 유디트는 아카데미를 다녀야 했으니 수도에 방을 구하면 딱이었다.
괜히 좁은 개인 숙소에서 고생하느니, 이 기회에 제대로 된 집을 마련하는 편이 편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체이스와 대화를 좀 나눠 보고 결정하려고 해요.”
“그렇구나. 뭐, 아직 기간이 남아 있으니 천천히 고민해 보려무나.”
카렐 교수가 생각하기에도 교직원 방은 좀 비좁은 편이었으니, 편하게 지낼 방법이 있다면 그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며 두 사람은 순식간에 샌드위치 두 쪽을 해치웠다.
함께 테이블을 정리하며 카렐 교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이 서류는 내가 아카데미 측에 제출하도록 하마. 서류만 통과되면 별도의 절차는 없을 게다. 다른 귀찮은 일들은 내가 해결할 테니 걱정 말고.”
카렐 교수가 안심하라는 듯 호언장담을 하는 것에, 유디트도 빙긋 웃어 보였다.
“네, 부탁드릴게요, 교수님.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내년부터 최선을 다해 일해 보겠습니다.”
“그래, 나도 잘 부탁한다.”
카렐 교수 역시 마주 웃으며 손을 내밀어 유디트와 악수를 했다.
그의 재직 기간 중 처음으로 수습 교수가 생긴 순간이었다.
* * *
“편지가 와 있었네.”
고작해야 보름 남짓한 기간에 불과한 데도, 체이스는 합숙 첫날부터 시작해서 매일매일 편지를 한 통씩 보내 왔다.
정작 기숙사에서 지내는 유디트는 카르단디 저택에 들리랴, 아카데미에 제출할 서류를 준비하랴 정신이 없어 답장도 못 했는데 말이다.
오늘이야말로 답신을 써 보내야겠어.
일단 편지 내용부터 확인하기 위해 유디트는 익숙하게 편지를 뜯어 보았다.
그 안에는 그가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 등이 짧은 문장으로 적혀져 있었다.
내용을 자세히 훑어보던 유디트는, 체이스가 새로운 생활에의 설렘으로 잔뜩 들뜬 것을 알아차리고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곧 그녀가 펜을 들어 답장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체이스에게.
이런저런 일로 바빠서 미처 답신을 보내지 못한 걸 용서해 줘.
네가 돌아오면 놀랄만한 소식이 한 가지 있어. 분명 너도 기뻐할 거야.
아마 이 편지를 받을 때쯤이면 합숙도 막바지에 이르렀을 테니, 어떤 소식인지는 돌아와서 꼭 들어줬으면 해.]
걱정과 그리움 속에서 시간은 빠르게 흘러, 순식간에 체이스가 합숙을 끝내고 아카데미로 돌아오게 됐다.
유디트는 교문 앞에서 마차 한 대가 들어서는 걸 지켜보고 있다가, 체이스가 내리는 걸 확인하자마자 그 앞으로 달려갔다.
“체이스!”
마중 나온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체이스의 표정이 대번에 환해졌다.
“유디트, 오래 기다렸어? 코끝이 빨개졌는데.”
“날이 추워서 그래.”
“그러게 굳이 안 나와 봐도 된다니까. 어서 들어가자.”
체이스는 꽁꽁 껴입은 유디트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그녀를 실내로 이끌었다.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훈훈한 공기가 둘을 감쌌다.
두 사람 모두 입구에서 눈이 달라붙은 신발을 털어내다, 시선이 마주치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왠지 웃기다.”
“그러게.”
입꼬리에 진한 미소를 매단 채 유디트를 바라보던 체이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맞다, 편지에서 알려 주고 싶다던 좋은 소식이 대체 뭐야? 궁금해서 미치는 줄 알았잖아.”
“아, 그거 말이지.”
유디트가 그의 질문에 멋쩍게 볼을 긁적이더니, 주위에 돌아다니는 학생들의 눈치를 봤다.
“일단 어디 앉아서 얘기할까?”
두 사람은 곧 아카데미 내에 위치한 작은 카페테리아로 들어갔다.
유디트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코코아를 두 잔 주문한 뒤, 그것을 홀짝이며 말문을 뗐다.
“일단 듣고서 화내면 안 돼.”
“좋은 소식이라며?”
“응, 그건 맞는데…… 사실 나 혼자 너네 집에 한번 다녀왔거든. 백작님께서 부르셔서.”
그 말을 듣자마자 대번에 체이스의 얼굴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우리 집엘? 아버지가 대체 또 무슨 얘길 하…… 아니, 됐다. 계속 이야기해 봐.”
체이스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화를 삭이는 동안, 유디트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괜찮아, 체이스. 백작님께선 아주 정중하게 날 대해 주셨으니까. 오히려 내가 수습 교수직을 맡아도 상관없으니 널 잘 부탁한다고 하시더라.”
“……? 농담이지?”
턱을 받치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어 내며, 체이스가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