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100화
“우리 아버지가 네가 수습 교수로 일하는 걸 허락하셨다고? 혹시 그걸 들어주는 대신 다른 대가를 요구하시거나 한 게 아니고?”
짙은 불신에 서린 체이스의 얼굴을 보니 새삼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과 다르게 체이스는 자신을 사랑해 주시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심지어 형도 있는데 왜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야, 체이스. 백작님께선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셨어. 다만 딱 한 가지, 나한테 따로 부탁하신 건 있어.”
유디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너랑 한번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으시대.”
“……나랑?”
체이스가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켜 보이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 모습을 보니, 어지간히 두 부자 사이가 삭막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유디트가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 번도 아버지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어?”
“대화는 무슨. 우리 아버…… 아니 그 사람은 맨날 나에게 명령하기만 했어. 내가 조금이라도 반항할라치면 어머니 얘길 꺼내시며 입도 벙긋 못 하게 만드셨지.”
툴툴거리던 체이스가 목이 탔는지 코코아를 들이키다, 아직 뜨거웠던 건지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유디트는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고맙다며 받아 든 체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 사람에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몰라도…… 난 더 나눌 대화가 없어. 할 말은 지난번에 다 했고.”
생각보다 체이스가 완고한 태도를 보이자, 유디트가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한 번이라도 기회를 드려 봐, 체이스. 이제 그럴 기회도 없는 나 같은 사람도 있는걸.”
그제야 유디트의 우울한 어조를 눈치챈 체이스가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유디트의 부모님은 모두 오래전에 돌아가셨었지…….
자신이 실수로 그녀의 아픈 곳을 건드린 것만 같아 굉장히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유디트는 유디트대로 괜한 얘기를 꺼냈나 싶어 머쓱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일단은 들어 보고 판단도 늦지 않잖아?”
그녀의 열성 어린 부탁에 결국 체이스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내키진 않지만…… 알겠어. 전부 네 부탁이라서야.”
유디트 역시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차가운 손을 붙들어 주었다.
두 사람은 잠시 손을 얼싸안은 채 연인다운 분위기를 즐기다, 다시 화제를 바꿔 일상 얘기로 돌아갔다.
“그래서, 합숙 기간 동안 이것저것 많이 배웠어?”
유디트가 애써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명랑한 어조로 물었다. 체이스도 그녀의 말에 웃으며 답했다.
“많이 배웠다기보단…… 입단식을 대비한 제식 훈련이 대부분이더라고. 그래서 검을 쓸 기회는 별로 없었어. 그냥 기합받느라 좀 힘들었던 정도?”
“아, 그렇구나. 신기하다.”
그쪽 분야에는 정말 문외한이었기에 유디트는 그의 얘기를 듣는 내내 감탄사만 연발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체이스가 돌연 진지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아, 그리고 내가 듣기로, 황실 기사단원이 되면 수도에 기거할 수 있도록 정착 지원금을 내준대. 어때, 유디트? 너만 괜찮다면 우리가 결혼한 뒤 살 집을 이 근처에서 알아볼 수도 있어.”
유디트는 체이스의 열렬한 제안을 듣고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그가 먼저 결혼 준비에 관한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아…… 나야 좋지. 안 그래도 나 역시 고민하고 있던 문제였는걸.”
그녀의 말에 체이스가 다행이라는 듯 웃어 보였다.
“너도 생각해 두고 있었다니 다행이다. 사실 나도 그것 때문에 걱정이 많았거든, 아버지랑 그렇게 싸웠으니 아무래도 도움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고.”
체이스가 유디트의 작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 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선배 중 하나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놓으니 이것저것 조언을 해 주시더라고?”
“선배?”
“응, 왜 지난번에 아카데미에 찾아오신 분. 너도 만났었잖아.”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유디트는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합숙을 하며 두 사람이 친해진 건 확실한 것 같았다.
그 체이스가 자신의 가족사를 털어놓을 정도라니……. 물론, 그의 신의를 믿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 사실을 직접 입으로 들으려니 역시 기분이 우울해졌다.
하지만 다음 얘기를 듣는 순간, 유디트는 자신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 선배도 결혼하셨을 때 정착금을 비롯해서 여러가지로 도움을 많이 받으셨다더라. 그래서 나한테도 이것저것 알려 주셨어.”
“……결혼?”
“아, 내가 알려 준 적 없나?”
체이스가 눈을 반짝 빛내며 말을 이었다.
“그분도 우리처럼 약혼 관계로 있으시다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셨대.”
“…….”
눈을 끔뻑이며 얌전히 체이스의 말을 듣던 유디트가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유부녀시라고?”
“……그렇지?”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 체이스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에 유디트도 속으로만 웃음을 삼켜야 했다.
자신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오해를 했는지에 대해 솔직하게 말한다면 체이스는 재밌어할 것이 분명했지만…….
왠지 이번만큼은 그가 좋아서 날뛰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 * *
생각할수록 스스로가 바보 같아서 한숨만 나왔다.
“하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유디트를 본 르데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유디트, 왜 그렇게 한숨을 쉬고 그래? 무슨 근심 걱정이라도 있어?”
“아니, 그런 건 없어.”
“에이, 네가 아무 일도 없는데 한숨을 쉴 리는 없잖아. 편히 말해 봐.”
르데샤는 어지간하면 자기 얘기를 털어놓지 않는 유디트의 성미를 아는지라, 이런 식으로 떼를 써서 대답을 재촉하곤 했다.
대답하지 않으면 분명 한참을 귀찮게 하겠지.
결국 유디트는 대충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그냥, 요새 살이 좀 찐 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어.”
“뭐? 네가 살이 쪘다고? 겉보기로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겨울이라 교복이 두꺼워서 티가 나지 않는 것뿐이야.”
다행히도 유디트의 변명이 르데샤에게 통한 모양이었다. 르데샤는 깊게 공감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나도 그동안 공부를 하느라 너무 안 움직인 건지 살이 많이 찐 거 있지. 얼마 전에 거울을 봤는데 깜짝 놀라고 말았어. 하지만 그거 알지? 이럴 때일수록 쇼핑을 해야 한다는 거.”
“응?”
난데없는 말에 유디트가 눈을 끔벅거렸다. 하지만 르데샤는 자신의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말 나온 김에 오늘 같이 근처 의상실이라도 가자. 어차피 방학도 며칠 안 남았겠다, 시간도 널널하잖아?”
그렇잖아도 유디트는 일전에 쇼핑을 하자던 르데샤에게 잘못 걸려 종일 시달린 적이 있었다. 그때를 떠올린 유디트는 사색이 되어 답했다.
“나는 괜찮은데. 너 혼자 가는 게 어떨까? 어차피 나는 옷에는 문외한이라…… 예쁜 옷을 고르는 데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거야.”
“아니야. 원래 옷은 계속 볼수록 실력이 느는 거야. 그리고 예쁜 옷들을 구경하다 보면 살을 뺄 동기도 생기고 말이야.”
수재다운 언변으로 유디트의 불만을 일축시킨 르데샤는 그대로 그녀를 의상실로 끌고 갔다.
그 안에서 르데샤는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개를 치며 다녔다.
“유디트, 이 목도리 어때? 우리 졸업식 날 같이 매고 다니자.”
“어…… 그래, 좋네. 예쁘다.”
어색한 호응을 하며 끌려다니기를 장장 3시간.
그 시간 동안 유디트가 구매한 물건은 체이스에게 줄 선물이 유일했다.
내년에 입단식을 치르게 되면 그때야말로 어엿한 기사가 될 테니, 검에 달 근사한 장식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금색 수술이 달린 빨간 보석은 은빛과 검은색이 뒤섞인 황실 기사단의 검에 무척 잘 어울릴 것이다.
체이스가 부디 좋아해 준다면 좋을 텐데.
쇼핑을 하고 나오며 르데샤가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엄청 피곤하다.”
“이제 들어가서 좀 쉴래?”
“좋지, 저기 새로 생긴 쿠키 가게도 있어.”
두 사람은 따뜻한 가게 안의 공기에 휩싸이자마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 이젠 추워서 진짜 못 돌아다니겠어.”
“그러니까 곧 겨울 방학을 하는 거지.”
주문을 하고 자리를 잡은 르데샤가 이어 물었다.
“유디트는 방학 때도 기숙사에 남을 거랬나?”
유디트가 그녀의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너는 본가로 돌아갈 계획이지?”
“응…… 그럼 졸업식 전에 유디트랑 이렇게 노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겠네.”
르데샤가 몹시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가끔 수도로 나들이 나와. 그때 만나서 놀면 되지.”
“정말? 르데인도 데리고 가도 돼?”
“나야 상관없지만, 르데인이 깐깐한 누나들이랑 노는 걸 반겨 할까?”
그 말에 르데샤가 키득키득 웃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아, 맞다. 유디트, 그거 알아? 같은 반 에이미가 말이야…….”
르데샤가 어디서 들은 건지 같은 반 아이들의 소식을 차례로 들려주었다.
누군가는 졸업 직후 결혼을 한다는 소식, 누군가는 황궁 관리로 취직했다는 소식, 누군가는 가주 자리를 일찍 이어받았다는 소식 등.
모두가 각양각색의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걸 들으니 이제야 졸업을 해 모두가 다른 길을 걸어간다는 게 실감이 났다.
유디트가 그녀의 얘기를 한창 감상에 빠져 듣고 있을 때, 열심히 떠들던 르데샤가 테이블 위를 톡톡 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유디트. 나도 드디어 결심했어.”
“응?”
잠시 숨을 멈춘 르데샤가 이내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나, 대학원에 진학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