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102화 (102/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102화

* * *

“이번 학기 동안 학생 여러분과-.”

금방 끝날 줄 알았던 방학식은 교장의 연설 때문에 꽤 오랜 시간 이어지고 있었다.

힐끗 옆을 돌아보니 체이스가 졸려 죽겠다는 얼굴로 서 있었다.

하지만 훈화 말씀만 다 끝난다면 이제 방학식도 끝이 나겠지.

떠나기 전에 르데샤의 얼굴을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아직도 그녀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아무래도 교수와의 상담이 길어지려는 모양이었다.

상념에 빠져 있던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학생들을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여기까지 뛰어왔는지 르데샤가 상기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유디트! 하마터면 얼굴도 보지 못하고 헤어지는 줄 알았어. 교수님과 면담이 오죽 길어져야지 말이야.”

반가움에 유디트가 르데샤의 손을 붙잡으며 대꾸했다.

“르데인에게 이야기 들었어. 그런데 이렇게 얘기가 길어지다니…… 혹시 면담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 아니지?”

혹시 예상하지 못한 착오가 생긴 건 아닐까 걱정하는 유디트에게, 르데샤가 안심하라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그런 건 아니야. 기숙사 입실에 관해서 상담을 받았는데, 대학원생은 평민이 대다수라 원칙상 2명이서 방을 써야 한다지 뭐야. 그래서 나더러 불편하지 않겠느냐고, 웬만하면 집에서 다니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걱정하셨어.”

유디트가 속닥거리며 말을 받았다.

“그건 그렇겠다. 너는 아카데미를 다닐 때 1인실을 썼으니까. 그런데 2인실을 써도 괜찮겠어?”

“응, 본가에 머무르면 엄청 눈치 보일 텐데 차라리 난 그편이 더 낫지. 아, 맞다. 유디트 너는 수습 교수가 되면 어디에 머물 예정이야?”

르데샤가 두 눈을 반짝거리며 말을 이었다.

“있지, 내가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여기 대학원생들도 이 아카데미 학생들과 같은 기숙사를 공유한다더라고. 호수만 좀 다르게 배정되긴 하지만……. 그래서 말인데 너도 기숙사에 머물 예정이라면 우리 같이 한방에서 지내지 않을래?”

그때 체이스가 불쑥 끼어들어 르데샤의 제안을 대신 거절해 주었다..

“기대를 깨서 미안하지만, 유디트는 수습 교수로 일할 거라 방을 빌리더라도 교직원용 방을 제공받게 될걸. 그리고 그걸 다 떠나서, 유디트는 앞으로 나와 살 집을 구하기로 했어.”

“……그래? 그럼 뭐,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대신 새집 마련하면 나도 초대해 주기다.”

“응, 당연하지. 너를 가장 먼저 초대할게.”

유디트가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다짐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모든 연설이 끝나 있었다.

교수님들의 지시에 따라 학생들이 하나둘 강당을 떠나기 시작하면서, 유디트도 르데샤, 체이스와 함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맞다, 르데샤.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긴 하지만…… 혹시 대학원 일은 아직도 부모님께는 말씀 안 드린 거야?”

“……아, 응. 미리 알려 봐야 뭐라 말리실진 뻔하니까. 그냥 대학원에 들어가는 날 말씀드리려고 해.”

르데샤의 낯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막상 일은 벌렸다지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 보였다.

“하지만 나중에 부모님께서 많이 충격받으실 것 같은데…….”

“내 생각도 그래. 하지만 어쩌겠어? 무슨 얘기만 꺼내려고 하면 콧방귀나 뀌며 듣지도 않으려고 하시는데. 이건 전부 부모님이 자초한 일이야.”

“아, 그 맘 이해하지.”

드물게 르데샤의 말에 공감한 건지 체이스가 옆에서 열성적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런 그를 르데샤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돌아봤다.

“얘 오늘 뭐 잘 못 먹었어?”

유디트가 웃으며 르데샤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

“그게 아니라…… 체이스도 부모님 때문에 고민이 많은 편이거든.”

“쟤는 왜?”

“음, 개인적인 사정이라 내가 말할 순 없고…….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이번 주말에 직접 댁에 다시 찾아뵈려고 해. 대화가 좀 필요할 것 같아서.”

“……? 얼마 전에도 한번 다녀왔다고 하지 않았어? 너도 쟤 때문에 참 고생이 많다, 유디트.”

르데샤의 말에 체이스가 옆에서 발끈한 표정을 지었지만, 찔렸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도란도란 떠드는 사이 어느덧 교문 앞이었다. 유디트가 르데샤를 향해 물었다.

“바로 본가로 돌아갈 거야?”

“뭐, 그래야지. 일단 집에 가서 짐도 미리 싸 두고 처분할 물건들이 있으면 하려고 해.”

“그렇구나, 바쁘겠네.”

“유디트 너는?”

이번에는 체이스가 유디트의 대답을 가로채며 대신 대답했다.

“유디트는 나랑 시내에서 데이트할 거야.”

“아아.”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인 르데샤는 곧 유디트를 향해 돌아서서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유디트, 편지 자주 하고. 집 구하는 대로 나한테 연락 줘. 꼭 놀러 가고 싶으니까.”

“그래, 네 편지도 손꼽아 기다릴게. 난 계속 수도에 머물 거니까,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해.”

방학이 되면 매일같이 르데샤를 볼 순 없겠지만, 별개로 그녀와 다음을 기약하는 건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유디트는 체이스의 투덜거림을 흘려들으며, 르데샤가 마차를 타고 떠날 때까지 열성적으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 * *

그리고 그날 저녁, 유디트는 모처럼 근사한 저녁 한 끼를 체이스에게 대접받게 되었다.

영문도 모르고 교복을 입은 채로 체이스의 뒤를 따라와 버린 유디트가 자리에 앉자마자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이렇게 비싼 데를 와도 되는 거야?”

카렐 교수와 함께 처음 식사를 했던 식당만큼이나 가격대가 있어 보이는 곳이었다.

너무 무리하려는 게 아닐까.

백작님과 싸운 뒤로 따로 용돈도 받고 있지 않다 들었는데.

유디트가 염려스러워하자, 체이스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괜찮아, 유디트. 나 돈 많아.”

“……?”

“검술대회 우승 상금이 꽤 되거든.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 뒀어.”

“어,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유디트는 웨이터가 건네는 식전주로 목을 축이면서도 떨떠름한 얼굴을 지우지 못했다.

“그리고 사실, 오늘은 식사하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라서.”

체이스가 머쓱하게 뒷덜미를 주무른 뒤, 앞에 놓인 냅킨을 펼쳤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디트가 이내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혹시 무슨 고민거리라도 생긴 거야?”

그 말에 체이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사실 우리가 만나게 된 게 어찌 보면 어른들께 떠밀려서 그렇게 된 거잖아.”

“음, 그건 그렇지?”

의아해하는 유디트를 향해 체이스가 조금 전보다 느리고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내가 널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건…… 다른 누구의 뜻도 아니라 내가 원해서란 걸 알려 주고 싶어서.”

“…….”

유디트는 잠시 체이스의 갑작스런 고백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그녀가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되었는지, 체이스가 덧붙이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결혼하기로 한 건 어른들 때문이 아니라…… 내가 너와 함께하고 싶기 때문이니까. 꼭 미리 너에게 허락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말을 마친 그가 품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리곤 상자를 열어 유디트가 잘 볼 수 있도록 안에 든 작은 반지를 내밀었다.

이내 그가 긴장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와 결혼해 줄래, 유디트?”

청혼이 끝남과 동시에 테이블 위에 정적이 찾아왔다.

“어…….”

그 순간부터 유디트의 눈엔 반짝이는 보석이라든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 값비싼 음식들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상자를 쥔 체이스의 손이 잘게 떨리는 모습이라든가, 입을 꾹 다문 채 그녀의 대답을 숨죽여 기다리는 모습이 더 시선을 사로잡았을 뿐.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할 텐데.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어서,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았다. 한참 뒤에야 유디트가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 미안……. 약혼이나 결혼은 이미 다 결정되었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따로 의견을 물을 줄은…….”

어느새 체이스가 고개를 들어 붉은 눈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그…….”

결국 압박에 못 이긴 유디트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나도…… 네가 좋아서…… 너랑 ……고 싶어.”

마지막 말은 거의 기어들어 가는 것처럼 작게 말해서, 사실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이 승낙이란 걸 감지했는지 체이스가 금세 기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시 말해 주면 안 돼, 유디트? 잘 안 들렸어.”

“……나도…… 결혼하고 싶다고.”

유디트가 홍당무처럼 얼굴을 붉히며 멋쩍게 대꾸했다.

이후로 이어진 저녁 식사는 사실 여느 때와 똑같았다.

하지만 조금 전 있었던 일 때문인지 두 사람 모두 더 들뜨고 설레는 마음으로 함께 있는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오늘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절로 웃음이 나오는 그런 한때였다.

* * *

커다란 벽난로가 빠직거리며 타오르는 가운데, 유디트 홀로 응접실에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체이스가 백작의 집무실로 들어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밖에서 혼자 기다리는 중이었다.

부자 사이에 앙금이 컸던 만큼 대화도 길어지는 건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사용인들이 내준 찻물이 다 식어 갈 무렵, 드디어 응접실 문이 벌컥 열리며 체이스가 들어왔다.

유디트는 곧장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체이스! 대화는 잘 끝났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