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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103화 (103/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103화

하지만 그녀의 질문에도 체이스에게선 이렇다 할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체이스의 얼굴은, 무척 멍해 보였다.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어딘가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때 체이스가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는 게 진짜일까?”

“응?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아버지랑 대화를 나누는데…… 너무 당황스러운 말씀을 하셔서.”

“안에서 대화를 할 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혹시 별로 좋지 않은 말이라도 들은 거야?”

유디트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그렇게 묻자, 체이스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내 얘기를 많이 물어보시더라고. 내가 어쩌다 가문을 나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는지…… 많이 궁금해하시는 것 같았어.”

체이스의 대답을 들은 유디트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래? 그럼 다행인 것 아냐?”

“……그렇지. 그리고 나에게 엄하게 구셨던 이유들도 찬찬히 설명해 주시더라고. 그래서, 아버지가 이유 없이 내게 나쁘게 구신 건 아니란 걸 알게 됐긴 하지만…….”

그렇게 말한 체이스가 깊은 한숨을 쉬며 유디트의 옆에 앉았다. 소파에 깊이 몸을 기댄 그가 피곤한지 마른세수를 했다.

“뭐랄까, 지금 기분은 좀 허무하긴 해.”

어릴 때부터 마음 한구석에 원망을 품고 자랐을 체이스는, 이제 갈 길을 잃은 감정에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가 유디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유디트는 한쪽 팔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뭐랄까,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모두 이해가 됐다고 해서, 바로 내 응어리가 해소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럴 만해.”

유디트가 조용히 그의 말에 공감해 주었다.

“나 역시 한때는 페델리안 부인을 정말 내 어머니처럼 따르고 존경했던 적이 있거든. 그래서 아직도 부인의 말을 거스르기가 어렵고……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자꾸 의식하게 되더라.”

그 말에 체이스가 고개를 돌려 유디트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고 보니 나만 괜한 어리광을 부린 건 아닌가 모르겠네. 유디트 너도 자라면서 어려운 점이 많았을 텐데…….”

“아, 난 이제 훌훌 털어 버려서 괜찮아. 넌 아직 적응해 갈 시기겠지만.”

그리고 다행인 것은, 체이스는 아직 자신의 가족들과 관계를 좋게 풀어 볼 여지가 남았다는 것이다.

백작님도 지난번에는 그렇게 쑥스러워하시더니, 사실은 체이스가 그렇게 원망을 토한 게 몹시 섭섭하셨음이 틀림없다.

그동안은 어떠한 사정이나 쑥쓰러움 때문에 미처 겉으로 드러내진 못하셨다지만, 이제 열심히 노력한다면 많이 달라지실 수 있겠지.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로 체이스도 생소하긴 하지만 조금씩 백작님에게 마음을 열고 있는 것만 같아 보였다.

왜냐하면 평소 체이스는 백작님에 관한 이야기를 극도로 피했는데, 지금은 본인이 먼저 나서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체이스가 반대하더라도 카르단디 저택에 다시 방문하길 잘했어.

지난 몇 년간 쌓여 온 부자간의 오해와 다툼이 서서히 풀리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자, 유디트는 뿌듯함을 느꼈다.

그런데 그때, 체이스가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참. 아버지가 아까 그 말씀도 하시더라. 결혼식을 미루는 건 좋은데, 약식으로 약혼식이라도 치르는 게 어떻겠냐고. 가족들과 친한 친지만 불러 놓고 말이야.”

“약혼식?”

“응.”

유디트는 고민하듯 인상을 찡그리더니 이내 말했다.

“어른들께서 그러기를 바라신다면, 나도 싫지 않긴 하지만……. 페델리안 부인은 꼭 초대해야겠는걸.”

“그래, 이러나저러나 널 어릴 때부터 키워 주신 분이니까 그래야겠지. 아, 그리고 아버지께서 약혼식 이후에 우리가 살 집도 구해 주겠다고 하셨어.”

“아아.”

그 제안에 대해서는 이미 유디트도 들은 바가 있었으나, 체이스의 입장을 생각해 거절하려 했던 부분이었다.

“넌…… 받아도 괜찮은 거야?”

“잘 모르겠어. 아버지가 화해의 의미로 주신다는데 거절하는 것도 좀 그런 것 같고. 무엇보다 제안하신 건물이…….”

그는 뭔가를 찾는 듯 품속에 손을 넣어 뒤적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종이 뭉치를 꺼내 들었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 어머니와 몇 번이나 들렀었던 별장이거든. 원한다면 새집을 구해도 좋다고 하셨지만, 나만 좋다면 여기서 살아도 좋다고 하시더라.”

“…….”

유디트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그 문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체이스의 눈치를 살피니, 그에게 꽤 추억이 많이 쌓인 장소 같아 보였다.

어쩌면 체이스는 이미 결심이 선 게 아닐까.

“그래서 말인데…… 괜찮으면 나랑 여유가 있을 때 한번 보러 가는 게 어때?”

“좋아.”

“뭐라고?”

“난 어디든 다 좋아. 너랑 함께 지낼 수 있다면. 그런데 이건 어디 위치해 있는 건물이야?”

유디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보자, 체이스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대꾸했다.

“……이곳에서 몇 시간 정도 마차를 타고 달려야 나오는 곳이야. 수도 외각에 위치해 있긴 한데, 아카데미와는 비교적 가까운 편이니 네가 출근하기에는 나쁘지 않을 거야.”

“너는?”

“난 말을 타고 가면 되니 괜찮아, 대략 반 각 정도?”

“흐음, 그렇구나.”

“아마 너도 가 보면 마음에 들 거야. 그만큼 둘이서 살기에 쾌적하고 주변 경치도 볼 만하거든.”

“그렇게 말하니 기대된다.”

체이스는 유디트의 말에 기쁜 듯 웃어 보였다.

“건물이 좀 낡긴 했지만…… 아버지가 원한다면 수리도 해 주신다고 했으니까. 가서 바꾸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

“너무 신세를 지는 것 같아 어째 미안한걸.”

“그런 거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대신 나도 이 저택을 오가며 기사단의 훈련을 봐주기로 했으니까 말이야.”

짧게 상의를 마친 체이스가 이내 후련하다는 듯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쨌건…… 기숙사를 떠나 어디에 머물러야 할지 막막했었는데, 그 문제는 이제 해결이네. 그럼 가까운 시일에 빨리 들러 볼까? 필요한 가구랑 생필품도 채워 놔야 할 테니.”

“좋아. 그런데 돌아가기 전에, 백작님을 잠깐 뵙고 가야겠어. 안부도 여쭙고 감사 인사도 전해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아버지는 별생각 없이 주신 걸 텐데…….”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한번 인사는 드리고 가고 싶어.”

유디트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체이스도 더 이상 그녀의 행동을 말리지 못했다.

* * *

백작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지만 여전히 긴장되는 일이었다.

유디트가 방문에 노크를 하며 용건을 밝히자마자, 백작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반겨 주었다.

“먼 길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내게 직접 인사까지 하러 와 주다니 고맙구나.”

“아니에요. 사실 도착하자마자 먼저 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체이스와의 대화가 더 중요하실 것 같아서……. 음, 체이스에게서 약혼 얘기랑 신혼집에 대해서 들었어요. 여러모로 저희에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드려요.”

유디트는 백작을 향해 공손하게 머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에 백작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괜찮단다. 어차피 이 약혼을 처음 주선했을 때부터 이럴 생각이었으니까. 만약 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편하게 말하거라. 여러모로 네게 신세를 졌으니, 여력이 닿는 한 최대한 도와주마.”

백작의 말에 놀란 유디트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저어 보였다.

“신세라뇨. 어차피 저도 이 집안의 식구나 마찬가지인데요. 그리고 덕분에 체이스도 마음이 많이 편해진 것 같더라고요.”

거기까지 말한 유디트가 이내 우물쭈물 말을 덧붙였다.

“이 부분만은 제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 고민이 많았었는데, 이렇게 두 분이 화해하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체이스도 속으론 엄청 기뻐하고 있을 거예요.”

그녀의 말을 들은 백작은 그제야 비로소 유디트가 얼마나 체이스를 걱정하며 마음 쓰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난 지금껏 체이스 그 녀석만 너에게 단단히 빠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유디트 너도 그 애를 많이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그 말에 유디트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계기는 백작님께서 만들어 주셨지만, 체이스가 워낙 좋은 사람이라서요. 그러니까…… 앞으론 서로 의지하며 잘 살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 고맙구나. 한결 마음이 편해졌어.”

백작은 그렇게 말하는 한편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 좋은 뜻으로 성사된 약혼은 아니기에 아들의 결혼 생활이 평화로울지에 대해 고민이 컸다.

그런데 예상 외로 두 사람이 진심으로 사랑에 빠지고, 또 이렇게나 서로를 위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다니.

그동안 무거웠던 마음의 짐을 덜게 된 것 같아 백작은 그제야 진심으로 안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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