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1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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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을 시작한 기숙사 안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빠져나가 무척 고요했다.
심지어 한나도 본가로 돌아가 유디트는 모처럼 2인 1실을 혼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런 식으로 기숙사에 남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 겪는 일이었다.
아셀과 친했을 때에는 매 방학마다 함께 페델리안 저택으로 돌아가 지내곤 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다시 그 저택에 들를 일은 없겠지…… 게다가 이 정들었던 기숙사 방도 이제 몇 달 후면 끝이구나.’
한나도 역시 유디트와 함께했던 기숙사 생활에 미련이 많았던 것인지, 작별 인사를 할 때에는 몹시 진땀을 뺐었다.
‘가족들이 있을 본가로 돌아가는 것은 좋지만, 이제 우리가 이렇게 한방에서 자는 것도 마지막이라니 너무 슬프다, 유디트.’
‘나도 그래. 졸업하고 나서도 꼭 종종 만나자, 한나. 네가 정말 그리울 거야.’
유디트는 그녀가 떠나기 전, 새로 얻을 집으로 꼭 놀러 오란 말과 함께 편지를 자주 할 것을 신신당부했다.
그렇게 한나를 배웅하고 나니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그녀와 몇 년 동안 얼마나 가족처럼 지냈었는지를 상기하니 더욱 그랬다.
두 사람은 시험 기간엔 함께 불을 밝히며 밤이 새도록 공부를 하기도 했고, 주말에는 맛있는 음식을 사와 함께 나눠 먹기도 했다.
유디트의 어깨가 뻐근한 날엔 한나가 직접 주물러 주었고, 그녀가 소설을 외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 든 적도 있었다.
‘아셀만을 생각하며 따라왔던 아카데미에서 이렇게 다양하고 소중한 인연들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남들에게서 적의와 업신여김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중에서도 자신을 위해 주는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다.
유디트는 새삼스럽게 벅찬 한숨을 내쉬며, 르데샤와 함께 맞춘 목도리를 목에 둘러메고 기숙사 밖으로 나왔다.
체이스가 일찌감치 나와 입김을 뿜으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나와 있었네, 오래 기다렸어?”
“나도 조금 전에 왔어.”
둘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걸었다. 기분 좋은 따스함이 맞닿은 곳에서부터 퍼지며, 심장도 기분 좋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집만 둘러 보고 오는 거야?”
“응, 가서 일단 부족한 것들이 없나 꼼꼼하게 봐야 할 것 같아. 아버지가 필요하면 사람도 부르고 가구도 구매해도 좋다고 하셨어.”
유디트는 마차에 올라타기 전, 머릿속으로 새롭게 꾸려 갈 집에서의 생활을 미리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테라스엔 다양한 종류의 화분을 놓고, 아담한 거실과 응접실엔 푹신한 소파와 양탄자를 놓아야지.
그리고 언제라도 일을 할 수 있도록 조용한 곳에 책상이 놓여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또 마당에는 체이스가 훈련할 만한 공간도 만들어 두고…….
마차를 타고 달려가는 내내 유디트의 마음은 기대로 가득 부풀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체이스가 말한 집 앞에 도착했다.
유디트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광경에 감탄을 토해 냈다.
“와.”
수도 근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주위에 나무가 많았다. 그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집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는지 무척 낡아 보였다.
일단 덩굴이 벽을 타고 마구 자라 있었고, 마당으로 통하는 철제 울타리 문도 녹이 슨 채로 굳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유디트가 놀란 것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체이스의 말을 들었을 때는 작은 별장 정도로 예상했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크기가 커 보여서 놀랐다.
또 많이 낡았다 뿐이지 외관은 무척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 정도면 작은 저택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았다. 어안이 벙벙해진 유디트가 놀란 눈으로 체이스를 돌아봤다.
“체이스, 여기가 맞아? 혹시 잘못 온 거 아니야?”
“여기인데, 왜?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어?”
“문제가 있는 건 아닌데……. 우리 둘이 살 공간인데 너무 큰 건 아닐까 싶어서.”
그도 그럴 게 고작 두 명이 함께 지내는데 이 층짜리 저택이라니.
앞뜰도 관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수풀이 쭉쭉 뻗어 있었지만, 정원 자체는 굉장히 넓은 편이었다.
체이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청소하기 힘들까 봐 그래? 걱정하지 마. 사용인을 따로 구할 테니까. 마부도 한 명 고용할 거야. 내가 자리를 비울 때 네가 외출하기 편하도록 말이야.”
그제야 유디트는 체이스가 다소 삐딱하게 자라긴 했어도, 기본적으로는 귀족 가문의 곱게 자란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었다.
둘이 함께 살게 되면 하나부터 열까지 같이 헤쳐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생각보다 편한 생활이 될지도 모르겠네.
페델리안 가문에 얹혀살던 때보다 마음은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고 유디트는 생각했다.
체이스가 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녹슨 자물쇠와 씨름하며 간신히 문을 열었다.
쇠가 긁히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문이 열렸다. 꼭 공포 소설 속 한 장면 같은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방치된 지는 몇 년 안 됐다고 말씀하셨는데, 사람이 안 사니 금세 폐가가 되어 버렸네. 일단 정원사부터 불러야겠다.”
체이스는 저택 입구로 향하는 내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 의견에 대해서는 유디트도 전적으로 찬성이었다.
그나마 저택 현관으로 향하는 길목에 땅이 돌로 다져져 있길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체이스의 장검으로 아무렇게나 뻗은 정원수의 가지들을 베고 지나가야 할 판이었다.
정원을 지나 현관문을 여니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는 특유의 을씨년스러운 냄새가 훅 풍겼다.
안을 들여다보니 외관과 마찬가지로 고풍스러운 저택 내부와 흰 천으로 덮인 가구들이 보였다.
“먼지가 엄청 쌓였네. 청소할 게 많겠는걸.”
유디트도 낡아 보인다는 체이스의 말에는 공감했지만, 집 자체는 내심 무척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커튼을 쳐 두지 않은 먼지 낀 창문을 통해 한낮의 태양이 집안 곳곳을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위기 자체는 좋은걸. 잘 수리하면 무척 예뻐질 것 같아.”
요즘은 유행하지 않는 낡은 실내 장식으로 가득했지만, 오히려 그 점이 좋았다.
차분하고 가라앉은 묵직한 분위기가 기분 좋은 편안함을 자아내는 것 같았다.
유디트는 창문 너머로 뒤뜰을 내다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겨울이라 정원이 좀 황량해 보이긴 한데, 날이 풀리면 모종을 몇 가지 사 와서 심자. 여름이 되면 엄청 화사해질 것 같아. 저기에 테이블과 의자를 두고 식사를 해도 좋을 것 같고.”
“그래, 함께 가서 보고 골라 오자. 예쁜 것들로만.”
체이스는 그녀가 제안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다는 듯 싱글벙글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럼 이제 방들 좀 돌아다녀 볼까?”
저택 외관에 나 있던 창문 수대로 방 개수도 많은 편이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며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훑은 둘은 곧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한참을 서성거리느라 다리가 아팠던 유디트는 먼지가 내려앉은 소파에 아무렇게나 덜썩 주저앉았다.
앉자마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체이스, 너도 여기 옆에 앉아 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체이스가 냉큼 유디트의 곁에 앉았다. 그가 잠시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그래서, 집을 살펴본 소감은 어때?”
“마음에 들어. 조금 크긴 하지만, 그만큼 내가 꾸밀 수 있는 영역도 많아진 거니까.”
작은 부분까지 세심하게 직접 집안을 꾸며 나갈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한 번도 자신만의 온전한 공간을 가져 보지 못했던 유디트였기에 그녀는 이런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 무척 기뻤다.
둘은 곧 집을 어떻게 꾸밀지 자세한 의논에 들어갔다.
“2층 전체를 우리가 쓰고 1층에 사용인 방을 두는 게 낫겠지? 손님 방도 한두 개 마련을 하고…….”
“그래, 다만 곰팡이가 핀 데도 있고 녹슬기도 했으니 전문가를 불러서 벽이랑 창문 같은 건 싹 바꿔야 할 것 같아. 커튼도 낡았으니 다 버리고. 가구는 어떻게 할까?”
유디트는 체이스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꾸했다.
“아직 낡았지만 쓸 만한 가구들이 많던데, 전부 버리긴 아깝지 않아? 멋스러워 보이기도 하니까 망가진 것만 빼고 다 활용하자.”
“새로 사지 않아도 괜찮겠어?”
“응, 2층에 놓인 작업용 책상도 무척 근사하더라. 그건 의자만 새로 사면 될 것 같아.”
두 사람은 수리를 마친 뒤 한 번 더 집에 찾아오기로 결심했다. 비어 있는 집안에 무엇을 채울지 다시 한번 고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 정말 졸업식 즈음에야 살림이 대강 정리가 되겠는걸. 각자 짐도 옮겨야 하니까 말이야.”
유디트는 그렇게 말하며 행복한 한숨을 쉬었다.
“벌써부터 집이 어떻게 변할지 엄청 기대된다, 체이스.”
“네가 이 집을 마음에 들어 해서 내가 더 기뻐.”
체이스가 그녀를 따라 기분 좋은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 편안해 보이는 얼굴을 마주하다가, 유디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질문했다.
“그런데 나 뭐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음, 뭔데?”
“혹시 전에 로지에나 가문의 별장에 놀러 갔을 때 네가 나중에 놀러 오자고 자랑했던 데가 이 집이었어?”
“아아…… 기억하고 있었구나.”
체이스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지금 보기엔 많이 낡았지만 내가 어렸을 때엔 정말 근사하고 멋진 별장이었거든. 근처에 냇가도 있어서 가서 발도 담그고 오고, 낚시도 하고 그랬었어.”
“너한테 소중한 추억이 많았나 보다.”
유디트의 말에 체이스가 옛일을 회상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뭐, 그렇지. 어쨌거나 이 별장에서만큼은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나 셋이서 가장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