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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105화 (105/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105화

체이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유디트도 문득 어렸을 적에 돌아가신 아버지에 관한 기억이 떠올랐다.

물론 너무 어렸을 때 돌아가셨기에 이제 얼굴이나 목소리조차도 희미하게 떠오르는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무척 아껴 주셨다는 것만큼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일이 바쁘심에도 휴일이 되면 근사한 아침을 만들어 주시기도 했고, 시내에 나가 장난감이나 좋아하는 간식을 사 주기도 하셨다.

그런 아버지에게 매일 집을 비운다며 유디트는 투덜대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어린 딸을 남겨 두고 일을 하러 가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을 테다.

‘그때 아버지에게 집에 있어 주면 안 되겠냐며 투정을 부리는 게 아니었는데.’

지나서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후회 투성이었다.

과거의 기억을 곱씹어 보던 유디트가 문득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떠났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런 경험은 체이스의 상황과 무척 비슷해 보였다.

“생각해 보니까 나도 아주 어렸을 적에 아버지랑 함께 바다에 다녀온 적이 있어. 내 생일이라 쉬어도 좋다고 페델리안 부인께서 아버지에게 며칠간의 휴가를 주셨거든. 그래서 그때 아버지랑 함께 바다에 발도 담그고 생선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지.”

시작은 발랄하게 말하던 유디트는 끝에서 살짝 말을 흐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게 아버지와의 마지막 여행이 되었어. 그 후로 아버지께서는 마차 사고를 당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거든.”

그런 아버지가 처음 돌아가셨을 때만 해도 세상을 전부 잃은 것처럼 아프고 힘들어서, 다시는 행복해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내다 보니 다시 평범하게 일상을 영위하는 게 가능해졌고, 드문드문 기쁜 순간들이 찾아왔다.

유디트는 체이스를 바라보며 이제야 살아갈 힘을 얻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구나, 나도 사실 이곳에서의 한때가 유일하게 행복했던 기억이야. 백작저에 있을 때에는 늘 백작 부인의 눈치를 보아야 했거든, 어머니나 나나.”

유년 시절에 아픔을 겪었던 유디트처럼 체이스 또한 지울 수 없는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빨리 훌륭한 기사가 되어 독립하자고 생각했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체이스와 유디트는 서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서로의 빈 곳을 가장 잘 이해해 주고 공감해 줄 수 있었다.

서로 닮은 구석이 있는 사람에게 이끌린다는 말은 진짜인 것 같았다.

겉보기에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체이스와 유디트가 통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서로의 결핍에 끌려서인지도 모른다.

그때 뭔가 고심하는 듯이 한참을 생각하던 체이스가 입술을 열었다.

“유디트, 집안 정리가 다 마무리되고 약혼식이 끝나면 네 아버지를 한번 뵈러 가도 될까?”

“……우리 아버지를?”

“응, 너처럼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리고 싶어.”

“하지만 아버지는 여기서 꽤 멀리 계신걸.”

체이스는 별문제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가면 돼. 너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리고, 앞으로 널 평생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다짐을 보여 드리고 싶어.”

체이스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진 유디트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중에 한가해지면 한번 아버지를 뵈러 가자.”

두 사람은 이후로도 오래도록 손을 잡고 소파 위에 앉아 오후의 햇살을 즐겼다.

분명 앞으로 함께할 미래는, 이 햇살처럼 따뜻하리라고 생각하면서.

* * *

졸업식을 앞둔 겨울 방학 기간 동안, 유디트는 원래 계획대로라면 마음 편히 푹 쉬려고 했었다.

그동안은 좋은 성적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방학에도 학업에 매달리며 휴식다운 휴식을 가져 본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막상 방학이 되었어도 유디트는 아직 쉴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이 그만큼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그녀는 카렐 교수님을 따라 학회에 방문하고, 틈틈이 내년 학생들을 가르칠 수업 자료들을 제작하기도 해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이사이 체이스와 함께 살 집을 오가며 집이 잘 수리되고 있는지도 확인도 했다.

우선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웠던, 정돈되지 않았던 정원은 정원사의 손길로 깔끔하게 다듬어졌다.

상록수를 심어 생기를 더하고, 마구잡이로 자란 나뭇가지들은 가지를 쳐 훨씬 정돈된 인상을 주게 했다.

저택 내부도 깨진 유리창은 물론이고 창틀까지 새것으로 갈고, 인부들을 불러 망가진 곳들도 전부 수리했다.

그러고 나니 황량한 폐가 같았던 집이 차츰 원래의 자태를 뽐내며 집다운 아늑한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흐음…….”

유디트는 집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낡았던 화장실과 주방이 말끔하게 고쳐진 것을 확인했고, 틈틈이 더 부족한 것이 없는지도 살폈다.

집안 창문에 새 커튼도 달고, 주말마다 체이스와 시내를 나가 돌아다니며 고른 가구들을 집안에 들였다.

유디트가 유년 시절을 페델리안 저택에서 보내며 나름 심미안을 갖추게 된 덕택일까.

거의 모든 살림을 갖췄을 때엔 저택 내부가 꽤 근사해져 있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유디트가 뿌듯한 얼굴을 한 채 체이스를 돌아보았다.

“어디 보자.”

그가 즐거운 눈으로 유디트와 함께 꾸민 저택 내부를 다시 샅샅이 훑었다.

“이만하면 바로 들어와 살아도 될 것 같은데? 방학만 끝나면 바로 짐을 옮겨도 되겠어.”

체이스 역시 오랜 시간을 들여 가꾼 집안 내부가 몹시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유디트는 마지막으로 손님방을 보여 주며 체이스를 향해 의견을 물었다.

“여긴 어때? 이 정도면 손님들을 불러 집들이를 해도 손색이 없어 보이지?”

체이스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뭐 잠잘 수 있는 침대만 있으면 되지, 굳이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있나.”

“하지만 우리 집에 들른 사람들이 편히 쉬었다 갔으면 싶은걸.”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 걱정 말아, 유디트. 그리고 아직 사람들을 초대하려면 멀었잖아.”

유디트는 그의 말이 맞다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때 체이스가 막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아버지께서 고용인들은 이미 몇 명 봐 두셨어. 아무래도 사람이 계속 관리해야 우리가 들어갈 때까지 깨끗한 상태로 유지될 테니까 말이야.”

“그래, 그 부분은 네가 알아서 해 줘. 난 아무래도 좋으니까.”

체이스가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더니, 손가락으로 테라스를 가리켜 보였다.

“그나저나 이제 좀 쉬는 게 어때? 맛있는 거라도 먹을까? 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바빠서 식사도 걸렀잖아.”

그렇게 말을 하며 체이스가 아까 시내에 들렀을 때 함께 사 왔던 음식 봉투를 들어 보였다.

구매하고 나서 시간이 꽤 흐른 후라 음식은 차디차게 식은 지 오래였지만, 은근히 풍기는 맛있는 냄새가 콧속을 스미며 식욕을 돋궜다.

하지만 유디트는 체이스가 내미는 음식을 애써 못 본 척할 수밖에는 없었다.

“아니야, 나는 괜찮아. 너 혼자 맛있게 먹어.”

“왜? 저녁도 굶었는데 배가 고프지 않아?”

물론 배는 고팠다. 이대로라면 두꺼운 옷을 뚫고 꼬르륵 소리가 바깥으로 들릴 것이 걱정될 만큼이나.

하지만 유디트는 그저 도리도리 고개를 젓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게, 며칠 뒤면 약혼식이었다. 물론 약혼식은 아주 간소하게 열릴 터였다.

복잡한 절차 없이 단순하게 먹고 마시는 만찬 정도의 수준이라 봐도 무방했다.

초대받은 손님도 기껏해야 페델리안 부인과 카르단디 가문의 식구들, 그리고 체이스와 유디트의 몇 안 되는 지인들이 다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페델리안 부인이 선물해 준 드레스였다.

그녀는 지금껏 유디트의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보호자 역할을 해 왔기에, 이번 약혼식에서도 기꺼이 유디트의 보호자 역을 자처했다.

그 때문인진 몰라도 약혼 축하 선물로 수도에서 무척 유명한 의상실에 그녀의 드레스 제작을 요청한 것이다.

차마 성의를 거절할 수 없어 받은 드레스는 무척 예뻤지만, 이걸 입고 사람들 앞에 설 것을 생각하니 조금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다.

“걱정 마, 뭘 입더라도 넌 예쁠 테니까.”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유디트가 체이스의 말에 땅이 꺼지도록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너랑 돌아다니면서 하도 맛있는 걸 많이 먹었는지, 전보다 살이 좀 찐 것 같거든.”

* *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서 어느새 약혼식 당일이 되었다.

약혼식은 간소하게 카르단디 저택에서 열렸다. 유디트는 파티가 시작되기 전, 먼 곳임에도 찾아와 준 친구들을 보곤 뛸 듯이 기뻐했다.

“르데샤, 르데인! 세상에, 둘 다 함께 와 주다니 너무 기쁘다.”

로지에나 남매가 한 쌍인 것처럼 밝은 남색의 옷을 맞춰 입고 찾아왔다.

르데샤는 유디트를 보자마자 기쁜지 그녀를 얼싸안으며 말했다.

“유디트, 방학식 치르고 오랜만이야. 와, 그 드레스 진짜 예쁘다. 너랑 잘 어울려.”

그녀가 물러나자 뒤이어 르데인 역시 유디트의 의상을 칭찬하다가 선물을 건넸다.

“아 맞다, 약소하지만 약혼 축하 선물이에요.”

“이렇게 챙기지 않아도 괜찮은데. 고마워, 잘 받을게.”

“체이스 선배님은 어디 계시나요?”

“아까 백작님과 정원 쪽에서 대화 나누는 것 같던데, 그리로 가 봐. 약혼식도 거기서 치를 테니까.”

르데인과 체이스도 평소에는 그렇게 투닥대는 것 같더니,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고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픈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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