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106화
유디트는 로지에나 남매 외에도 약혼식을 방문해 준 손님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한구석에는 멋진 기사복을 차려입은 이들이 몰려 있었다. 체이스의 검술부 동창들도 있었고, 기사단 직속 상사라던 여선배도 보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유디트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저분에게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했었지.’
물론 저분은 아무것도 모를 테지만 혼자 이상한 착각에 빠져 허우적거렸다는 것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눈이 마주친 여기사는 반가운 듯이 손을 흔들며 유디트에게로 다가왔다.
“저번에 인사 나눴었는데 혹시 기억하니? 나는 체이스의 직속 사수란다.”
“네, 당연히 기억하죠. 황성에서 거리가 꽤 먼데 여기까지 약혼식을 축하하러 방문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유디트가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자 여기사는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까지는 없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아냐, 마차를 타니 금방이던걸 뭐.”
그리고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합법적으로 기사단 훈련에 빠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지. 황실 기사단을 대표해서 나 혼자만 참석하기로 했는데, 다른 놈들이 부러워서 죽으려고 하더라.”
여기사가 던진 농담에 긴장하고 있었던 유디트도 긴장을 풀고 웃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유디트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걸 풀어 주기 위해 농담식으로 말을 건넨 것 같았다.
‘체이스의 사수분이 이렇게 상냥하신 분이라니, 안심이야. 오히려 잘됐어.’
덕분에 유디트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여기사를 응시할 수 있었다.
여기사는 그런 유디트를 빤히 바라보다가 회상에 잠긴 듯이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약혼식에 참석하니까 옛날 생각이 나는걸. 사실은 나도 얼마 전에 약혼자와 결혼식을 올렸거든.”
이 얘기는 이미 일전에 체이스에게 들어 알고 있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유디트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 척하며 여기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도 너처럼 결혼 전에는 마냥 행복하고 좋기만 했는데……. 막상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더라. 결혼 선배로서 한 가지 충고하자면,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진 마. 매일을 붙어 살다 보면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라든가, 장점 뒤에 가려져 있던 단점도 하나둘 보이게 되니까 말이야.”
“아 그렇군요…… 말씀해 주신 부분 새기겠습니다.”
“맞다, 그리고 만약 체이스가 못되게 구는 일이 있다면 당장 나에게 말하도록 하고. 내가 체이스의 기강을 세게 잡아 줄 테니까 말이야. 물론 그전에 대화로 풀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여기사는 힘내라는 듯이 유디트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리고 자리에서 떠나갔다.
로지에나 남매에 이어 여기사까지 상대하고 나자 거대한 산을 몇 개 넘은 듯한 기분이었다.
진이 빠졌지만 아직 유디트의 손님은 남아 있었다. 바로 페델리안 부인이었다.
유디트는 부인을 찾기 위해 목을 길게 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유디트!”
다행히 유디트보다 페델리안 부인이 그녀를 먼저 발견한 모양이었다.
등 뒤쪽에서 들리는 페델리안 부인의 목소리에 유디트는 반갑게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내 미소 띤 얼굴은 조금 어정쩡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게, 페델리안 부인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곁에는 바로 아셀이 동행해 있었다.
‘아셀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물론 언제까지고 그를 피하고 지낼 수만은 없었기에 수도에 살면서 우연히 한 번쯤은 얼굴을 마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하지만 하필 오늘, 체이스와의 약혼식에 아셀이 직접 참석할 줄이야.
설사 페델리안 부인이 아셀에게 제 약혼식에 참석할 것을 권하더라도, 아셀 쪽에서 먼저 거절을 할 줄 알았다.
‘대체 아셀은 왜 약혼식에 참석을 한거지? 참석한다고 해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는데. 나를 다시 보는 것은 쟤한테도 껄끄럽기만 한 일일 텐데…….’
아무리 고민을 해 봐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렇기에 유디트의 머릿속도 순식간에 복잡해지고 말았다.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까.
여기서 반가운 듯이 아셀을 반기는 것도 이상하고 못 본 체 넘어가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유디트가 고장 난 것처럼 굳어 있는 사이 페델리안 부인과 아셀은 점차 다가왔다.
그에 유디트도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페델리안 부인, 그리고 아셀. 둘 다 먼 곳까지 발걸음 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런저런 일로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시간을 내주시다니요.”
“아니란다, 유디트. 아무리 멀고 바빠도 네 약혼식인데 당연히 참석해야 하지 않겠니. 오늘 입은 그 드레스도 참 잘 어울리는구나. 선물을 해 준 보람이 있어.”
“아, 네. 드레스도 무척 감사드려요.”
페델리안 부인과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유디트의 신경은 온통 아셀에게 쏠려 있었다.
그런 유디트의 상태를 페델리안 부인도 알아챈 건지, 그녀는 잠시 아셀의 눈치를 보았다.
왠지 페델리안 부인도 아셀이 골치 아프다는 반응이었다.
‘저 반응을 보면 아셀이 약혼식에 참석을 한 건 페델리안 부인의 권유나 강요 때문이 아닌가?’
아셀을 제외한 두 사람이 불편한 공기를 느끼던 중, 굳게 다물려 있던 아셀이 입술을 열었다.
“유디트, 오랜만이야. 약혼을 축하해 주려고 왔어. 이건 별것 없지만 약혼 축하 선물이야.”
“…… 고마워.”
아셀이 건넨 물건은 화사하게 피어난 꽃다발이었다. 독특하게 생긴 생화들과 레이스, 리본으로 꾸며져 있어 무척 화려했다.
이렇게만 본다면 평범해 보였지만, 이걸 한겨울에 구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했다.
‘굉장히 비쌌을 것 같은데…….’
선뜻 받아들이기가 망설여졌다.
“너에게 어울리는 꽃이라고 생각해서 준비했어. 어릴 때부터 넌 생화를 좋아했으니까…….”
그나저나 약혼에 이어 곧 결혼까지 하게 될 여자에게 꽃다발을 선물하다니, 다소 고약한 선물 선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다른 의미라도 있는 걸까.
유디트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아셀의 표정을 살폈다.
언제나 그랬듯 그의 얼굴엔 무감하고 다정한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계속 받아 들지 않고 머뭇거리면 저만 이상해 보일 듯해, 유디트는 마지못해 선물을 받아 들었다.
사실 지난번 만남에서 약혼을 축하한다고까지 했는데 이제 와서 뭘 더 하겠나 싶었던 것도 있었다.
“고마워.”
아셀에게는 고맙다는 말 말고는 따로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아셀이, 페델리안 부인을 슬쩍 돌아보았다. 이내 그녀에겐 들리지 않도록 유디트의 귀에 고개를 바짝 붙이며 속삭였다.
“유디트, 네가 아직 나를 불편해하는 건 이해해. 하지만 너도 나에게 아무 감정이 없고, 나도 그렇다면 아직 친구로 남을 여지는 있는 거잖아?”
그렇게 말한 아셀이 천천히 몸을 떼어 내며 말을 마무리했다.
“너와는 어릴 때부터 나눈 추억들이 많으니까…… 이대로 멀어진다면 너무 아쉬울 것만 같아서.”
“…….”
“약혼 축하한다는 말은 진심이야. 잘 지내길 바래.”
그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페델리안 부인이 대화에 끼어들어 입술을 열었다.
“맞다, 유디트, 오늘처럼 기쁜 날에 또 기쁜 소식을 전해 주어야겠구나. 사실 아셀이 리아나와 다시 약혼을 하기로 했단다. 정확한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두 사람도 몇 달 내로 약혼식을 올리게 될 거야.”
아셀이 리아나와 약혼을 다시 한다니.
유디트는 깜짝 놀라 페델리안 부인을 쳐다보았다.
“그때 리아나와의 약혼을 깼던 건 역시 아셀이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라며 후회하더구나.”
그렇게 말하는 페델리안 부인은 못내 기쁜 듯 보였다.
하긴, 유디트가 생각하기에도 두 사람은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자신 또한 약혼을 파기하는 게 아깝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아셀이 다시 친구처럼 지내자고 했던 거구나.’
이제야 아셀이 했던 말과 행동이 이해가 갔다. 유디트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아셀을 바라볼 수 있었다.
“유디트, 혹시 약혼식이 끝나면 잠깐 이야기가 가능할까? 너와 체이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래, 알겠어.”
체이스도 포함해서 세 명끼리 대화를 나눈다면 문제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유디트는 승낙의 의미로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 * *
간소하게 치러진 약혼식이었지만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이 모두 참석해서인지 몹시 즐거웠다.
오히려 복잡한 절차가 없었기에 훗날 돌이켜보면 더욱 기억에 남을 특별한 약혼식이 아닐까 싶었다.
유디트와 체이스가 서로 손을 잡고 입장을 하자 저 멀리서부터 커다란 환호성이 들렸다.
“와아아-.”
하지만 객석에 점차 가까워졌을 때쯤, 체이스의 동창들 쪽에서 짓궂은 농담이 튀어나왔다.
“약혼자보다 약혼녀가 더 아깝다!”
깜짝 놀란 유디트가 힐끗 보니 체이스의 또래로 보이는 기사였다.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체이스가 아카데미에서 생각보다 외톨이로만 지낸 건 아닌 듯했다.
그 증거로 체이스는 친구의 농담에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고, 칭찬인 것처럼 받아들였다.
곧이어 둘은 단상에 올랐고, 쏟아지는 축하 속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반지를 교환하며 약혼식은 금세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