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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107화 (107/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107화

조촐하게 치른다고 했던 약혼식은 예상외로 무척 성대하게 치러졌다.

처음엔 가벼운 파티 정도로 생각했는데, 실제로 와 보니 결혼식장을 방불케할 정도의 규모였다.

‘이러다가 나중에 정작 결혼식이 별 볼 일 없게 느껴지는 거 아닐까.’

둘의 결혼식은 내후년에나 치러질 예정이었다.

우선 체이스가 입단 이후 타지로 옮겨 다니며 훈련을 다녀야 해서 무척 바빴기 때문이었다.

유디트도 새로운 일에 적응해야 했기에 당분간은 상황을 두고 보고픈 마음이었다.

또 두 사람 다 어른들의 도움 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직접 결혼식을 준비하자는 데에 동의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 보니, 결혼식보다 약혼식이 더 화려하게 치러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카르단디 백작이 며느리가 될 유디트를 지나치게 좋게 봐준 결과인 듯했다.

“내가 다 알아서 준비할 테니, 너흰 와서 참석만 하거라. 반지나 예복은 직접 고를 테냐?”

“아, 제 옷은 페델리안 부인께서 준비해 주신다고 하셨어요.”

“그래? 그러면 나머지는 사람을 시켜 대강 정하면 되겠군. 너흰 신경 쓸 필요 없다.”

분명 준비하실 때까지만 해도 간단하게 치를 거라며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많은 초대객들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손님들은 의례적인 식이 치러진 이후에도 먹고 마시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유디트는 약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그래도 어른들의 말씀대로 하길 잘한 것 같아.’

이렇게 공식적으로 사이를 증명받고 나니 체이스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진 것만 같았다.

그때 상념에 빠진 유디트를 일깨우듯이 저 멀리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디트, 앞으로도 행복하게 잘 지내야 해! 여유가 좀 생기면 꼭 집들이 초대해 주고!”

“초대해 주시면 저도 누나랑 함께 꼭 놀러 갈게요.”

고개를 들어 살피니 벌써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로지에나 남매가 보였다.

유디트는 곧장 그들의 앞으로 다가가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알겠어. 머잖아 꼭 초대할게. 둘 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고, 돌아가서 푹 쉬어.”

유디트는 두 사람이 마차를 타고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른 손님들도 번갈아서 앞날에 축복이 가득하기를 빌어 주었고, 작별 인사와 함께 하나둘씩 떠나가기 시작했다.

늦은 저녁 시간이 되자 사람이 꽉 차 있던 객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썰렁해졌다.

하지만 모두가 떠나가는 와중에도 자리에 남아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아셀이었다.

텅 빈 객석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그를 발견한 체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다.

“쟤는 왜 안 가고 남아 있는 거지?”

“아, 아셀이 약혼식이 끝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었어. 할 말이 있다고.”

“그래? 그러면 자리를 피해 줄까?”

“아니야, 너도 포함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으니까, 일단 같이 가 보자-.”

체이스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듯 보였지만, 유디트가 손을 잡아당기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끌려왔다.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아셀이 곧 고개를 들었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유디트, 바쁜데 괜한 시간 뺏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다 정리하고 왔으니 괜찮아.”

“그렇다면 다행이고, 참. 오늘 약혼식 잘 봤어. 앞으로도 행복하게 지내길 바래. 체이스 너도.”

“그래, 딱히 반갑지는 않지만. 여기까지 와서 약혼식에 참석해 준 건 고맙게 생각한다.”

체이스는 어딘가 경계하는 기색으로 아셀을 살폈다. 아셀도 그걸 눈치챈 건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젠 그렇게 적대적으로 대할 필요는 없어. 너희 약혼을 축하한다는 말은 진심이고, 무엇보다 나도 리아나와 다시 약혼을 했으니까.”

“……뭐?”

체이스가 저 말이 사실이냐는 듯 유디트를 바라보았다. 유디트가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맞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체이스도 유디트를 통해 아셀에 대한 이야기는 대강 들어 알고 있었다.

그가 유디트에게 고백하느라 리아나와 파혼까지 했다는 것도 말이다.

아셀은 체이스가 못 믿을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땐 다소 충동적으로 파혼을 한 감이 없잖아 있었거든. 사실 오늘 유디트에게 대화를 청한 것도 너희를 내 약혼식에 초대하기 위해서야, 자.”

아셀이 곧 품 안에서 화려한 초대장을 꺼내 건네주었다.

“너희도 시간이 되면 함께 참석해 주었으면 해. 특히 유디트는 내 어릴 적 소중한 친구니까, 꼭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 줘.”

그렇게 말하며 아셀이 사감 없이 맑은 눈으로 유디트를 바라보았다.

‘굳이 아셀이 초대받지 않았어도, 페델리안 부인이 부르시면 어쩔 수 없이 가야겠지…….’

그렇게 생각한 유디트가 곧 저항 없이 고개를 끄덕여 수락했다.

“그래, 체이스와 꼭 시간 내어 참석할게.”

“고마워.”

아셀이 싱긋 웃으며 유디트를 가볍게 끌어안고는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어서 체이스를 향해 몸을 돌렸으나, 심각할 정도로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그의 표정을 보고는 포옹 대신 어색하게 손을 내밀었다.

“……이 정도는 받아 주지.”

체이스가 기분 나쁘단 티를 팍팍 내며 아셀의 손을 잡은 뒤 성의 없이 두어 번 흔들어 주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같이 부부 동반 모임을 해도 재밌을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소리.”

아셀이 어떻게든 해묵은 감정을 해소해 보려는 듯 말을 붙였지만, 체이스가 바짝 날을 세웠다.

그에 아셀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직도 나에 대한 원한이 큰 건가? 그래도 유디트의 오랜 소꿉친구인 사람인데, 그만 좀 감정을 풀지 그래.”

“난 능구렁이 같은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체이스의 태도에 아셀도 결국 포기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 그래, 됐다. 아무튼 둘이 신혼집도 구했다고 했나?”

분위기를 전환하려 아셀이 유연하게 화제를 돌렸다.

“리아나가 유디트 네 소식을 엄청 궁금해하더라고. 기회 된다면 나중에 한 번 초대해 줘.”

“리아나가?”

유디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개인적으로 유디트는 보충 수업을 진행하며, 리아나에 대해서도 좋게 생각하게 된 참이었다.

그녀는 아셀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상냥하고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리아나도 자신의 소식을 궁금해하고 있었다니.

“그거 무척 기쁜 일이네. 그래, 나중에 함께 놀러 와.”

리아나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녀와 친해질 수 있다면 무척 기쁠 것 같았다.

아셀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만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아무튼 둘 다 행복해 보여 다행이다. 항상 마음속으로 응원할게. 다음에 만날 때까지 잘 지내.”

“그래, 여기까지 와 줘서 무척 고마웠어.”

그동안 유디트는 마음 한구석에 아셀의 아셀의 존재가 무거운 돌처럼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게 되자, 마음의 짐이 덜어진 것처럼 한결 편안해졌다.

아셀도, 나도 각자의 자리를 찾았구나.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이제 행복한 미래만이 남은 것 같았다. 유디트와 아셀은 각자의 삶을 살아 가며 서로의 행복을 빌어 줄 테다.

그래서 유디트는 아셀을 향해 진심으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늦었지만 리아나와 다시 약혼하게 된 것 진심으로 축하해. 필요한 선물이 있으면 꼭 말하고.”

“아니야, 마음만으로도 충분한걸.”

서로의 약혼을 축하해 주며 그렇게 아셀과의 대화는 끝이 났다.

* * *

“정말 괜찮겠어, 아셀?”

아셀이 갑자기 리아나에게 찾아와 다시 약혼을 청했을 때, 리아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셀을 향해 물었다.

‘얘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리아나는 아셀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파혼을 하자고 한 것도 너무 갑작스러웠고, 그 결정을 다시 무르자고 나올 줄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아셀을 바라보자 아셀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나도 면목이 없다는 거 알아. 하지만 너만 한 적임자가 없어서. 대신 나와 다시 약혼해 준다면, 남은 생 동안 네 행복을 위해 모든 편의를 봐줄게.”

“……이렇게까지 하려는 이유가 뭐야? 넌 아직도 유디트를 좋아하잖아. 그런데 나와 약혼해도 괜찮겠어?”

리아나는 아셀의 상태가 몹시 걱정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게 아셀은 유디트에게 차인 이후로 거의 식음을 전폐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에게 별다른 사감은 없다지만, 전 약혼자로서, 혹은 오랫동안 함께해 왔던 파트너로서 몹시 걱정이 되던 참이었다.

“……그래서야. 이런 어중간한 마음으로 다른 여자와 약혼했다간 불행한 결과만 낳을 테니까. 그런 면에서 넌 나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으니가 딱 적합하지.”

그 말에 리아나가 잠깐 고심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할게. 나에게 결혼 후 자유를 보장해 주겠단 네 제안은 무척 끌려. 하지만 공작 부인이 되면 네 말과는 다르게 신경 써야 할 일이 무척 많아질 것 같은데.”

“그 부분도 네가 최대한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도록 돕겠어. 뭣 하면 각서를 써도 좋고.”

“……으음.”

초췌한 아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리아나는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정말 다른 여자를 불행하게 만들기 싫어서 나를 고른 게 맞나? 내가 아는 아셀이라면…….’

이제는 리아나도 아셀이 보이는 것처럼 바르기만 한 모범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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