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108화 (108/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108화

그녀가 수상쩍은 눈으로 아셀을 바라보다 곧 생각을 입으로 내뱉었다.

“너…… 그런 이유라면 굳이 이렇게 빨리 나랑 약혼할 필요는 없지 않아? 아니면 페델리안 부인이 그렇게 보채신 거야? 빨리 다른 여자와 약혼하라고? 하지만 그렇게 억지로 강요하실 분은 아니실 텐데…….”

그녀의 의문에 아셀이 잠시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너한텐 아무것도 속일 수가 없겠어.”

그가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이내 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별건 아니고…… 내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그 애가 안심할 테니까.”

이어 그가 고개를 들어 리아나와 눈을 맞추며 슬픈 어조로 웃어 보였다.

“그래야 그 애와 다시 허물없는 인연이라도 이어 갈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그런 거야.”

“…….”

리아나가 말없이 입술만 벙긋거렸다.

상대를 잔뜩 꾸짖고 질책해 주고 싶었지만, 막상 표정이 너무 처연해 보여서 그러기가 망설여졌다.

리아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렇게 된 상태에서 유디트와 계속 친구로 지내겠다고? 그게 가능해?”

그녀의 질문에 아셀이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가 생각해도 이상하지? 하지만 그래야 내가 살 것 같은걸. 이대로 얼굴도 못 보는 사이로 멀어지는 건 너무…….”

그가 목소리를 쥐어짜 내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너무, 내겐 힘든 일이야.”

그 대답을 듣고 리아나는 마지막으로 그를 말려 보려 했다.

“하지만…… 그 애가 다른 사람과 행복한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는 게 더 힘들지 않겠어?”

그러나 그녀의 질문에 아셀은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나만 조심하면 되니까 괜찮아. 무엇보다 유디트에게 나도 이제 괜찮다고 안심시켜 주고 싶어.”

상대가 저렇게까지 말하자, 결국 리아나도 아셀의 제의를 수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것이 그녀가 가문의 뜻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네가 그걸 원한다면…….”

그렇기에 기뻐해야 함이 마땅할 텐데도, 저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는 아셀의 마음을 알기에 리아나는 속으로 연민의 감정을 금치 못했다.

* * *

유디트와 체이스는 마차를 타고 달려 제국 남부의 바닷가 마을로 향했다.

체이스는 마차를 타는 내내 창문 밖 풍경을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

“나 사실 바다 처음 봐.”

“정말?”

“응, 그냥 책으로 읽어 보긴 했는데 직접 내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야. 네 덕분에 좋은 경험을 해 보네.”

유디트야말로 바쁜 일정 속에서 함께 먼 길을 떠나 주는 체이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 공존하던 상태였다.

그런데 틈틈이 체이스가 공치사로 그녀의 미안함을 덜어 주려 하는 것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역시 체이스는 속이 깊구나.’

그렇게 조금 시간이 흐르자 목적지에 도달했고, 마차는 멈추었다.

“와-.”

유디트는 작게 환호성을 질렀다. 체이스도 놀란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작은 창문을 통해서 보았을 때도 엄청났지만, 실제로 마차에서 내리자 눈앞에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바닷가에 도착하니 쌀쌀한 바람에 코끝이 시렸다. 하지만 왠지 마음까지도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체이스는 그런 유디트에게 숄을 둘러 주었다. 유디트는 갑자기 어깨에 걸쳐진 숄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이건 어디서 난 거야?”

“그냥. 바닷가 쪽은 내륙보다 춥다고 들어서 혹시 몰라서 챙겨 온 거야.”

자신은 사용하지도 않는 걸 오로지 제가 추울까 봐 따로 챙겨 오다니, 의외로 체이스는 다정하고 세심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그때 체이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혹시 이곳이 아버지의 고향이셔?”

“아,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아버지께서는 바다를 좋아하셨거든.”

비록 유디트의 아버지는 손 쓸 새 없이 세상을 뜨셨지만, 평상시에 바닷가를 좋아하신다는 걸 기억해 일부러 이곳에 무덤을 만들었다.

하지만 거리가 멀어 자주 찾아오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평소 아버지를 너무 외롭게 남겨 두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이렇게라도 다시 찾아오게 되어 다행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유디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도 이곳에 묻혀 계셔. 사실은 여기가 두 분이 처음 만나신 장소이시래.”

“그렇구나.”

어머니의 기일 때, 아버지와 함께 바다를 거닐었던 기억들이 유디트의 머릿속을 스쳤다.

어머니는 유디트를 낳으실 때 돌아가셨기에 그녀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매년 어머니의 묘를 방문할 때면, 아버지가 무언가 그리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기억이 났다.

그때는 아버지가 왜 그런 얼굴이셨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바닷가에서 물장난이나 하자며 응석을 부리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둘은 잠시 해안선을 따라 걸었다. 별다른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파도 소리가 잔잔하게 깔려 몹시 듣기 좋았다.

바닷가에서 조금 위쪽으로 올라가자 그곳에 유디트 부모님의 무덤가가 마련되어 있었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부모님의 묘 앞에서 유디트는 꾸벅 인사를 드렸다.

“어머니, 아버지. 저 유디트에요. 오랜만에 인사를 드려요. 학업 때문에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 뵙지 못해서 죄송해요.”

왠지 목이 메어 와 중간에 잠깐 말을 멈추었다.

울렁거리는 마음이 진정이 되자, 유디트는 다시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혹시 두 분 다 이미 알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저 얼마 전에 약혼했어요.”

그렇게 말을 하며 유디트는 체이스의 손을 잡았고, 체이스는 진지한 얼굴로 입술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유디트의 약혼자 체이스 카르단디라고 합니다.”

그 말에, 유디트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생전 긴장이라곤 해 본 적 없을 것 같던 체이스가 굉장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체이스,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어. 사실 뭐 부모님이 진짜로 여기 계신 것도 아니니까 긴장 풀고 편하게 해.”

그러나 유디트의 그 말에도 체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최대한 예의를 다해서 인사를 드리고 싶어. 분명 우리를 지켜보고 계실 테니까.”

“……알겠어.”

체이스는 이내 씩씩하게 외쳤다.

“유디트가 말한 대로 저희 약혼했습니다. 결혼식은 아직 멀었긴 하지만, 지금부터 아버님, 어머님 몫까지 유디트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노력할게요.”

체이스의 그 말을 듣자 눈시울이 또 주책없이 뜨거워졌다. 이대로라면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유디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솔직히 유디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이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태어나자마자 겪은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갑작스러운 마차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 등 자신이 바꿀 수 없는 힘든 환경들.

그렇기에 왠지 자신은 세상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불행한 사람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유디트는 자신만큼 행운이 넘치는 사람은 없단 걸 깨달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하는 생각이었다.

너무 힘든 일을 겪어 왔기에 종종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이해가 갔다.

어쩌면 그녀가 겪었던 모든 불행은, 지금의 행운을 맞이하기 위한 초석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는 와중에도 체이스는 돌처럼 딱딱하게 경직된 채로 말을 이었다.

“물론 전 아직 여러모로 모자란 사람이지만, 이것만은 약속드릴게요. 유디트 눈에서 눈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게, 그래서 유디트가 항상 행복할 수 있도록-.”

하지만 그 순간 체이스는 눈에 눈물이 한가득 고인 채로 울먹거리고 있는 유디트 때문에 말을 멈춰야 했다.

“유디트, 나 방금 네가 우는 일 없도록 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바로 울어 버리면 어떡해.”

그 말에 유디트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눈가는 빨개지고, 코는 시큰해졌는데 웃음만은 멈추질 않았다.

‘괜한 꼴을 보였네.’

유디트는 황급히 눈을 깜박거리며 황급히 눈가를 말렸다. 그리곤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체이스를 향해 말했다.

“너 때문이야, 체이스. 네가 너무 비장하게 말하니까 그렇잖아.”

“……그 말이 사실이라면 네 부모님께 면목이 없는데. 벌써 약속을 어겨 버린 셈이잖아.”

그 말에 유디트가 다시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아, 난 지금 슬퍼서 우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충분히 행복하니까 너도 너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 말에 체이스가 무어라 반박하려 했지만, 유디트가 곧장 묘를 향해 고개를 숙여 작별 인사를 하며 그 말을 가로막았다.

“아무튼 아버지, 어머니. 이만 가 볼게요. 저희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찾아와서 인사드리겠습니다.”

체이스도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그는 꽃 두 송이를 품에서 꺼내 묘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그걸 본 유디트는 눈물이 쏙 들어갔다.

“꽃도 챙겨 왔던 거야?”

“응, 오는 길에 조금 시들긴 했지만…….”

체이스가 멋쩍은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마 부모님이 살아 계셨다면 약혼자를 잘 골랐다고 하실 테지.’

유디트는 그 모습을 보며 다시 싱긋 웃을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