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1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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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 날을 맞이해 다시 학교로 돌아오게 된 유디트는 책상과 사물함에 든 물건들을 정리했다.
다 쓴 노트라든가 잉크가 바닥인 만년필 등은 버리고, 깨끗한 정리 노트나 책들은 따로 빼 두었다.
“이 정도면 되려나?”
정리를 끝낸 후, 차곡차곡 쌓은 교과서들은 따로 들고 가기 편하게 끈으로 묶어 두었다.
아카데미의 졸업식에는 한 가지 특별한 전통이 있었다. 바로 자신이 쓰던 물건들을 후배들에게 물려 주는 것이었다.
책과 필기구 등 선배들이 직접 사용했던 물건들을 물려받으면 졸업이 순탄해진다는 미신이 있었다.
하지만 유디트는 딱히 아카데미에 아는 선배가 없었기에 재학 중에 단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해 보지 못했다.
‘그래도 이젠 친한 사람이 많이 생겨나서, 내가 후배에게 물려 주는 것도 가능해졌네.’
가장 안면이 두텁고 친한 후배는 르데인이었기에 유디트는 그에게 모든 물건들을 건넬 생각이었다.
물론 르데인은 이미 제 누이에게 많은 물건을 전달받았을 테지만 말이다.
뭐, 필요가 없는 물건들은 어차피 르데인이 알아서 정리를 할 테니 상관없었다.
유디트는 양손 한가득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책이며 노트 등을 르데인에게 건네주었다.
“자, 받아.”
“감사합니다.”
르데인은 어쩐지 감동한 눈빛이었다.
그 반응을 보니 마치 물건을 물려 준 사람이 자신이 처음인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유디트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어…… 혹시 선배에게 물건을 받는 거 내가 처음이야?”
그 말에 르데인이 “맞아요.”라고 대답하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에 의아해진 유디트가 재차 물었다.
“르데샤는 어쩌고?”
“아, 저희 누나는 따로 친한 후배가 있어서요. 저더러는 알아서 하라더라고요. 하지만 애초에 전 선배에게 물려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아하,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고맙지만…… 혹시나 필요 없으면 마음대로 처분해도 돼.”
“아니에요, 선배님이 주신 건데 하나도 버릴 순 없죠. 다 간직하고 있을게요.”
완강하게 고개를 젓는 르데인의 모습을 보며 유디트는 피식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졸업 전에 이런 후배와 친해지게 된 것도 큰 행운이었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물건 전달식이 끝나고, 유디트와 르데인은 함께 교실 밖으로 나왔다.
졸업식까지는 아직 시간이 상당히 남았기에 졸업생들은 복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아는 사람들과 시간을 때우는 중이었다.
체이스만 해도 검술부원들과 작별 모임을 가지고 있었고, 르데샤는 알고 지내던 후배나 지인들과 얘기를 나누러 갔다.
그동안 유디트는 식이 시작될 때까지 르데인과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건물을 빠져나오면서 르데인이 뒷짐을 진 채 물었다.
“그나저나 졸업을 하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저는 아직 체감이 잘 되지 않아서 궁금해요.”
하긴, 르데인은 아직 1학년이다.
지금껏 아카데미에서 보낸 시간보다 졸업까지 남은 시간이 더 기니 이런 궁금증을 가질 법도 했다.
“별로 아무렇지도 않아.”
“정말요?”
“응, 내 경우엔 졸업을 해도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와야 하니까. 그냥 짧은 방학을 하는 느낌?”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처음엔 졸업식 날 정든 아카데미를 떠나게 된다는 사실에 몹시 슬퍼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수습 교수로서 다시 돌아올 거란 사실을 알아서 그런가, 남들처럼 울적하거나 아쉽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나저나 학생으로서 아카데미에 다니는 것과 수습 교수로서 일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별 차이는 없으려나?
카렐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내며 수업 준비와 자료 조사를 도와야 한다는 걸 뺀다면 사실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이긴 했다.
유디트가 걱정되는 건 바로 근무 시간이었다.
당장 카렐 교수님만 떠올려 봐도 잠을 언제 주무시는지 모를 정도로 하루 종일 연구실에만 붙어 계셨으니 말이다.
물론 교수님께선 자신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겠다고 하셨지만, 자신도 사람인 이상 눈치를 볼 수밖에 없으리라.
그에 유디트는 저도 모르게 걱정을 토로하게 됐다.
“오히려 조금 지겨울 정도인걸. 이렇게 오랫동안 아카데미에 붙어 있어야 한다니…….”
“하하, 어차피 선배님은 잘하실 거면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며 드디어 졸업식이 시작되는 강당 근처에 도달한 순간이었다.
강당 입구에는 졸업식을 축하해 주려고 모인 후배들이 양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들의 근처에 유디트가 발을 디딘 순간, 학생들은 마치 준비한 것처럼 입을 모아 외쳤다.
“선배님,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군기가 바짝 든 후배들의 모습에 유디트는 속으로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왜들 이러는 거지?’
물론 안면 없는 선배에게도 후배들이 이렇게 하리라는 걸 알았다. 자신도 예전에 그랬었으니까.
하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과해 보였다.
당혹스러운 유디트의 반응을 눈치챈 것인지 르데인이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선배님께서 카렐 교수님의 수습 교수가 됐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었잖아요. 졸업하고 나서도 계속 뵐 테니 특히 신경 써서 인사하는 것 같아요.”
“아…….”
그렇게 된 거였구나.
유디트가 자신을 향한 초롱초롱한 눈동자들에 부담을 느끼며 서둘러 강당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그 순간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턱 짚었다.
동시에, 줄지어 졸업을 축하하던 후배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누구…….”
유디트가 인기척에 놀라 뒤를 돌아본 순간, 낯익은 빨간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로 체이스였다.
“다행이다, 아직 안 들어가고 있었네.”
유디트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체이스를 올려다보다가 이내 물었다.
“검술부 사람들과 인사는 벌써 끝내고 온 거야?”
“응, 뭐 잘 지내라고 몇 마디 하면 충분하니까. 그보다 둘이서 뭐 하고 있었어?”
체이스가 은근히 유디트와의 사이를 과시하듯 그녀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리곤 그녀의 어깨에 툭 고개를 올렸다. 그의 숨결이 지척에서 느껴지자 유디트가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을 본 르데인은 ‘또 시작이네’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인상을 찡그렸다.
“저기요. 두 분 사이가 좋으신 건 알겠는데, 요새 너무 붙어 다니시는 거 아녜요?”
그 말에 내심 찔리기도 해서 유디트가 배시시 미소를 짓던 찰나, 체이스가 뻔뻔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졸업하면 내 얼굴은 더 못 볼 텐데,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그냥 참지 그래. 그리고 붙어 다니는 사람이 우리만도 아닌데 뭘.”
체이스의 말대로였다.
기실, 오늘은 유디트와 체이스 정도는 그렇게 특별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유독 많은 남녀가 붙어 다니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지막이다 보니 좋아하던 상대에게 미뤄 둔 고백을 하느라 그 과정에서 많은 연인들이 생겨났기 때문인 것 같았다.
세 사람이 느릿느릿 강당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안을 꽉 메우고 있었다.
졸업생을 비롯해 졸업생에게 인사를 하러 온 후배들, 그리고 학부모들까지 평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인파가 바글거렸다.
그리고 아마 눈앞에 보이는 인물은 단연코 가장 많은 학생들에게 둘러싸인 인물일지도 모른다.
강당 한구석에 왜 이렇게 사람이 모여 있나 했더니, 가운데 익숙한 얼굴이 우뚝 솟아 있는 게 보였다.
그 모습에 르데인이 작게 감탄했다.
“우와, 주위에 죄 여학생들뿐인 게 역시 아셀 선배님답네요.”
아셀은 평소처럼 반듯한 미소를 띄운 채, 몰려든 후배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며 그 많은 사람들을 상대해 주고 있었다.
꽤나 바빠 보여 그대로 체이스와 함께 지나치려는데, 문득 군중 속에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바로 다음 순간, 아셀이 곧장 그 많은 인파를 헤치고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유디트!”
순식간에 지척에 다가온 아셀이 말간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이내 그가 활기차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무사히 졸업하게 된 것, 축하해.”
유디트는 잠시 아셀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겸허하게 맞잡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래, 너도 졸업 축하해.”
“참, 오늘 어머니께서도 참석하셨어. 이따 인사드리고 가.”
“응, 알려 줘서 고마워.”
“그래, 그럼. 이따 볼 수 있음 또 보자.”
용건은 정말 인사뿐이었다는 듯, 아셀은 짧게 대화를 끝내고 자신의 친구들에게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체이스는 내내 인상을 찌푸린 채 지켜보다가 유디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디트, 쟤는 우리 집들이에 초대하지 말자.”
“응, 왜?”
“너한테만 악수를 청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
“뭐? 하하하.”
물론 유디트도 체이스가 불편하다면 굳이 아셀과 어울릴 자리를 주선할 생각은 없긴 했다.
그녀는 곧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아셀은 약혼자가 있는데도 인기가 엄청나네. 체이스 너는 오늘 뭐 없었어? 한때는 너도 팬들이 엄청 많았잖아.”
“아…… 그거 말이야.”
체이스가 피식 웃으며 무어라 대답하려던 찰나였다.
그 순간 거짓말 같게도 멀리서부터 한 여학생이 뛰어오더니, 편지를 내밀며 그들 앞에 넙죽 인사했다.
“체이스 선배님! 졸업 축하드립니다. 이건 제가 드리는 편지에요.”
“…….”
유디트는 잠시 미간을 좁힌 채 여학생이 내민 편지를 내려다보다가 곧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 약혼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
체이스 역시 이 상황이 난처하긴 마찬가지였는지, 잠시 굳은 채로 유디트의 얼굴을 마주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리곤 여학생을 향해 몸을 돌린 뒤, ‘마음은 고맙지만 편지는 그냥 가져가 달라’고 곱게 타일렀다.
그것만으로 상황이 정리되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마지막 날이라는 용기에 힘입은 것인지, 이후로도 체이스를 향해 무수한 여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덕분에 유디트의 기분은 졸업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내내 언짢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