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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110화 (본편 완결) (110/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110화

하지만 상황은 금세 종료되었다. 존재감 있는 한 교수님의 등장 덕분이었다.

카렐 교수가 나타나자마자 체이스를 둘러싸고 있던 여학생들이 바닷물이 갈라지듯 일제히 길을 비켰다.

“이제 곧 졸업식이 시작인데 어수선하게 뭐 하고 있는 거지? 빨리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해라.”

카렐 교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학생들이 제각기 자기 자리로 흩어졌다.

역시 학생 모두가 두려워하는 공포의 대상다웠다.

‘그래도 알고 보면 상당히 세심하시고 자상하신 분인데……. 워낙 무뚝뚝하셔서 무서워 보이는 걸까.’

어쩌면 카렐 교수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은 이 아카데미에서 유디트밖에 없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그때 카렐 교수가 유디트 일행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너희도 이만 자리로 돌아가도록 해라. 계속 눈에 띄게 돌아다니니 이렇게 소란이 생기는 게 아니냐.”

그의 말에 곁에 있던 르데인도, 체이스도 웬일로 바짝 기합이 들어선 “예!” 하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유디트 역시 감사하다고 인사한 뒤 돌아서려는데, 문득 카렐 교수가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잠깐, 유디트.”

“네?”

그녀가 돌아서서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자, 카렐 교수님께서 드물게도 자애로운 미소로 화답해 주셨다.

“졸업 축하한다. 이 말을 잊을 뻔했구나.”

교수님의 말씀에 유디트는 살짝 울컥했다.

찰나지만 지난 학기 동안의 일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카렐 교수님은 유디트에게 꿈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고,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그녀를 자식처럼 살뜰히 살펴봐 주시기도 했다.

어쩌면 지난 3년간 아카데미를 다녔던 것보다 이번 한 학기 동안에 카렐 교수님께 받은 은혜가 더 크단 생각이 들 정도로.

이내 유디트는 미소를 지은 채, 카렐 교수님에게 힘차게 고개를 숙여 인사해 보였다.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 * *

이후로 졸업식은 평이하게 이어졌다.

교장 선생님의 따분한 연설도 하품하며 눈을 몇 번 끔뻑이다 보니 금세 끝났고, 어느새 학생회장인 아셀이 졸업생 대표로 앞에 나섰다.

그가 줄지어 선 학생들을 쓱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교복을 입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참 기분이 생경하네요. 아카데미를 다니는 동안 기쁜 일도 슬픈 일도 힘든 일도 많았겠지만 돌이켜 봤을 때, 모두 좋은 추억으로 남았기를 바랍니다.”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아셀이었지만, 유디트는 왠지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아마 그의 시선이 계속 이쪽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건 그 와중에도 아셀의 연설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동안 부족함이 많은 저를 믿어 주시고 학생회장으로 따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각자의 길을 걸어가게 될 여러분들의 미래를 진심으로 응원하며 이상으로 졸업식을 마치겠습니다. 졸업생 여러분, 다들 축하드립니다.”

아셀의 그 말을 끝으로, 졸업식은 큰 환호 소리와 함께 마무리되었다.

‘이제 아셀과는 아마 더 볼 일이 없겠지.’

그와 리아나의 약혼식에 초대받긴 했지만, 유디트는 그 이후로도 그들 부부와 굳이 가까이 연을 이어 갈 생각은 없었다.

단지 제가 불편하기 때문이 아니라, 체이스도 그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유디트는 체이스가 원치 않는 일을 강제할 생각은 결코 없었다.

어디 그뿐이랴.

자신은 물론 체이스도 새 직장에 적응하느라 바쁠 테고, 아셀도 아셀대로 공작 위를 물려받을 준비를 하느라 바쁠 테니.

사실상 바쁘다는 핑계로 멀리하다 보면 언젠가는 인연도 기억도 희미해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유디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전 아셀이 말했던 것처럼 돌이켜 봤을 때 자신과 보냈던 시간이 그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기를, 그래서 후회하진 않기를 바랐다.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멀찍이서 르데샤가 폴짝폴짝 뛰며 제 동생과 함께 달려왔다.

오늘은 졸업식 겸, 로지에나 남매가 유디트와 체이스의 새집에 방문하는 날이었다.

한나는 오늘 가족들과 약속이 있다고 해서 다음 주쯤에 방문하기로 얘기를 이미 마쳐 두었다.

“와, 너무 지루해서 잠들 뻔했어. 이제 바로 너네 집으로 출발하는 거지?”

“응, 맛있는 음식을 많이 준비해 놨으니 기대해.”

유디트는 방긋 웃으며 이내 세 사람과 함께 같은 마차에 올라탔다.

* * *

마차로 달리기를 약 반 각 정도.

금세 목적지에 당도하게 된 르데샤가 집 외관을 보자마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와, 수도 한복판에 이런 근사한 저택이 있을 줄이야.”

하얗게 칠해진 목조 주택에는 초록 덩굴이 멋스럽게 겉을 감싸고 있었고, 푸른 지붕 너머로는 울창한 침엽수림이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시내와 가까운데도 주변에 나무가 많아 그런지 여기만 외따로 떨어진 것처럼 고요하네.”

“자연도 그렇고 건물 외관도 엄청 고풍스럽고 예뻐요.”

르데샤나 르데인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하자, 유디트가 뿌듯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오래된 건물을 개조했거든. 카르단디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던 건물 중 하나래.”

체이스도 로지에나 남매의 공치사가 마음에 들었는지 유디트의 뒤에서 씨익 웃었다. 그리곤 그들 모두를 저택 안으로 인도했다.

겨울 방학 동안 을씨년스럽던 정원은 정원사의 도움을 받아 깔끔하게 다시 정돈되었고, 새로 상록수도 심어 멋을 더했다.

또한 현관 안으로 들어가니 하얗게 새로 칠한 집안과 고가구들이 보였다.

오래된 가구들의 광택에 감탄하며 르데샤가 놀라워했다.

“와, 다 좋은 목재를 썼나 보네. 이렇게 광날 때까지 관리하는 것도 힘든데.”

“그 가구들은 다 이 집안에 딸려 있던 것들인데, 상태가 좋아서 수리를 맡겨서 다시 쓰기로 했어.”

“좋은 생각이야. 덕분에 집안 분위기가 훨씬 근사해 보여.”

한동안 집안을 돌아다니며 내부 곳곳을 구경한 로지에나 남매는 이윽고 힘에 부쳤는지 거실 소파에 늘어졌다.

“아이고, 1, 2층만 왔다 갔다 해도 벌써 진이 빠진다.”

“좀 쉬고 있어. 체이스랑 내가 저녁 만찬 금방 준비할게.”

“아, 참! 유디트.”

그때 르데샤가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아까 거실 바닥에 놔두었던 커다란 가방을 열어 그 안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끄집어냈다.

“자, 받아. 유디트. 명색의 집들이를 오는데 빈손으로 방문하기는 좀 미안해서 선물을 좀 가져왔어.”

분명 사전에 선물을 가져올 필요는 없다고 누누이 말했는데, 로지에나 남매는 고집스럽게도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온 모양이었다.

그 안에는 예쁜 식기나 찻잔도 있었고, 양털 슬리퍼나 테이블보도 있었다.

전부 집안을 꾸미는 데 유용할 물건들이었다.

“이럴 필요는 없는데……”

곤란함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유디트를 로지에나 남매가 뿌듯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새집에 무난하게 잘 어울리도록 일부러 단순한 디자인으로만 골랐는데, 어때. 맘에 들어?”

필요 없다고 말하긴 했지만, 막상 선물을 받으니 기분이 좋긴 좋았다.

르데샤도 유디트가 기뻐하는 걸 눈치챘는지 르데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봤지? 선물을 싫어할 리가 없다니까.”

“그러네요. 혹시 곤란해하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선배님께서 좋아하시니까 정말 다행이에요.”

그리고 결론적으로, 집들이 선물은 물론 그날 집들이 식사도 무척 완벽했다.

카르단디 가문에서 보내 준 요리사가 미리 멋진 만찬을 준비해 놓고 간 것이다.

물론 상을 차리고 음식을 다시 데우고 술을 나르는 등 유디트와 체이스의 노력도 적잖이 들어갔긴 했지만, 덕분에 꽤 편하긴 했다.

다 같이 먹고 마시며 시끄럽게 떠들다 보니 벌써 밤이 깊어 갔다.

그러다 종국엔 로지에나 남매가 술에 뻗어 버리자, 체이스가 그들을 손님방으로 나르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일을 마친 체이스가 다시 유디트의 곁으로 돌아왔을 땐, 그녀는 창가에 서서 별이 초롱초롱 뜬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중이었다.

“왔어?”

유디트가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자, 체이스가 대답 대신 유디트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싸 안았다.

그리곤 다정한 눈길로 그녀를 응시했다.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그냥. 행복해서.”

그의 실없는 말에 유디트가 행복한 웃음을 흘리려 할 때였다. 뒤이어 체이스의 진지한 고백이 이어졌다.

“유디트, 사랑해.”

유디트는 당황스러웠지만 조금 머뭇거리다 입술을 뗐다.

“……나도.”

체이스는 그렇게 대답해 준 유디트가 사랑스럽다는 듯, 그녀의 볼을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그리곤 이내 고개를 내려 유디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이에 유디트도 팔을 뻗어 그의 키스에 호응하려던 찰나.

문득 유디트의 머릿속에 아주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바로 리아나와 약혼했다고 수줍게 고백하는 아셀에게 한바탕 짜증을 냈을 때의 일이었다.

그 자리에 더 머물기 힘들었던 유디트가 막 기숙사로 돌아가려 했을 때, 돌아서는 자신을 붙들어 세우던 이가 하나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마자-.

‘저기, 이거 네 물건이지?’

지금으로선 무척 낯익은 은발이었지만, 그 당시에 유디트는 그 상대가 체이스인 줄도 몰랐다.

그녀는 그의 손에서 제 만년필을 뺏어 가듯 채 가고는 작게 우물거렸다.

‘고마워.’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자리를 뜨려는 찰나, 다시 한번 뒤에 선 남자애가 그녀의 소매를 붙들었다.

짜증스러운 눈으로 뒤를 돌아보자마자 그 애가 뭐라고 말했더라. 분명…….

‘이것도 가져가.’

그렇게 말한 체이스가 건넨 것은 다름 아닌 손수건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눈을 가리키며, 닦으라는 듯 손짓해 보였다.

‘그때 그 애가 체이스였구나…….’

얼굴을 떼어 내며 체이스의 눈을 빤히 응시하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어 왔다.

“왜?”

“……아무것도 아냐.”

과거가 어떠했든, 중요한 건 결국 현재니까. 너와 함께라면 분명 지금처럼 설레고 즐거운 나날들이 계속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유디트는 행복한 미소를 멈출 수 없었다.

― 본편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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