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타니아가 목을 쭉 뻗으며 말했다.
“카일, 말해 보세요. 지금이 밤인가요?”
“아니요….”
“그런데 왜 벌써부터 침대에 누워 있는 거지요? 나태함은 황태자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멀리해야 할 악덕이라고 했을 텐데요.”
카일의 어깨가 움츠러졌다. 아물었을 등이 따갑기 시작했다. 마치 비비안의 무릎에 난 상처를 봤을 때처럼.
카일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그게, 잠시 생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자신의 행동에 변명을 하는 것도 제국을 군림할 자로서 지양해야 할 옳지 못한 행동이지요. 제 교육을 그새 잊은 걸까요?”
“자, 잘못했어요. 어머니.”
“안 되겠군요. 오늘 카일의 외출을 허락한 건 제 불찰이었어요. 날 용서해 줄래요, 카일? 교육실로 갑시다.”
순간 카일의 얼굴에 그늘이 서렸다. 하지만 곧 그는 힘없이 티타니아의 뒤를 따랐다.
***
“이럴 수가.”
나름 몇 시간 동안 고심해서 쓴 절절한 화해의 편지는.
“답장이 안 와.”
카일에게 무참히 씹혀 버렸다.
이런 전개는 예상 못 했는데?
약간 허탈한 기분으로 티 테이블에 몸을 축 늘어뜨렸다. 시원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한가로운 오후의 티타임.
맛있어 보이는 간식들을 눈앞에 두고 나는 지지리 궁상을 떠는 중이었다.
멍하니 간식으로 나온 푸딩을 티스푼으로 톡 건드렸다.
먹음직스럽게 탱글탱글한 커스터드푸딩이 부드럽게 춤을 춘다.
카일이 푸딩을 또 그렇게 좋아하는데.
얌전히 내 화해 요청에 응답하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우리 주방장의 푸딩을 맛보게 해 주려고 했건만.
“리사.”
“네, 아가씨.”
“만약 상대가 내 편지에 일주일 동안이나 답장을 안 해 주면 그냥 무시하는 거 맞지?”
리사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긍정하자니 내가 실망할 것 같고 부정하자니 정답인 것이다.
폭 한숨을 쉬며 턱을 괴었다.
“삐진 걸까?”
“으음. 그건 잘 모르겠지만 조금 놀라신 것 같긴 하셨어요.”
“에휴. 술래잡기 따위 그냥 적당히 잡혀 줄걸.”
장차 황태자로 선택되고 또 황제가 될 카일은 나나 로시에르 후작가에 황금 동아줄이나 다름없다.
원작에서야 로시에르 후작이 잘못된 선택을 하면서 몰락하고 말았지만 이제는 미래를 아는 내가 있잖아?
본디 설정 값인 소꿉친구 포지션을 잘 살려 미래의 황제라는 든든한 백을 만들어 두고 싶었는데.
이게 모두 술래잡기에 너무 열중한 탓이다.
기왕 기억이 돌아올 거면 내가 태어나자마자 떠오르지 이렇게 뒤늦게 생각날 건 또 뭐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황자 전하께서는 바쁘시잖아요. 곧 답장을 보내 주실 거예요.”
리사가 날 애써 위로했다. 나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니 근데 애초에 나를 넘어뜨린 건 카일이잖아.
왜 내가 먼저 우리 다시 화해하고 친하게 지내자는 편지를 보내야 하는 거지?
카일은 답도 안 해 주는데 말이야.
“쳇.”
말 안 듣는 똥강아지는 내버려 두고 간식이나 먹어야겠다.
뚱한 표정으로 푸딩을 크게 한 스푼 떠 입에 넣었다.
입에 넣는 순간 달달하고 부드러운 푸딩이 입 안에서 춤을 춘다.
세상에.
역시 우리 주방장은 천재야!
자고로 달콤한 디저트는 사람의 사고를 긍정적으로 만드는 법이다.
놀랍게도 방금 전까지 꿀꿀 했던 기분이 싹 사라졌다.
그래. 착한 내가 참자.
“리사, 내일 아버지가 입궁하실까?”
“지금 바로 여쭤 보고 올까요?”
“응. 부탁해.”
리사가 잽싸게 내 심부름을 하러 방을 나섰다. 나는 조금 편해진 기분으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냠-.
혀에 닿자마자 사르르르 녹는 푸딩의 맛이 환상적이다.
상대가 내 편지를 무시하겠다면 직접 가 주면 될 일이다.
마침 아버지께서 내일 입궁을 하실지도 모르니 나도 데려가 달라고 부탁해야지.
거기서 딱 기다려, 남주야.
내가 간다!
***
이틀 후.
나는 로시에르 후작과 함께 황궁에 입성했다. 아버지는 궁으로 들어가기 전 내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궁내에서는 이 아버지를 잘 따라다니거라.’
그리고 난 곧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우와.”
황궁 내에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로시에르 후작가도 굉장히 큰 편인데 황궁은 확실히 그 이상이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시선이 빙글빙글 돌아.
이게 바로 황궁 클라스?
연회가 열리는 날이 아닌데도 사람이 빽빽하다.
게다가 다들 옆구리에 무언가를 끼고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닌다.
하긴 저 사람들에겐 이곳이 직장이지.
잠시 애도의 마음을 가져 보았다.
오늘 난 아버지와 함께 황궁에 들어오는 건 허락받았지만 카일과 만나는 건 허락받지 못했다.
황자로서의 교육 일정이 꽉꽉 차 있기 때문에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어쨌거나 오늘 황궁에 들어온 이상 나는 반드시 카일을 만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레이디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하지 않겠어?
나는 겨우 이 정도 일로 우리 황금 동아줄, 아니 카일과 멀어지고 싶지 않다고.
나는 아까부터 복도에서 만난 한 귀족과 대화 중인 아버지를 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는 몰라도 꽤나 열띤 토론을 펼치는 게 내가 사라져도 모를 것 같다.
슬쩍 눈치를 보다가 옆으로 살금살금 움직였다. 그러고는 다들 바쁜 틈을 타 복도 옆길로 쏙 빠져 버렸다.
“휴우.”
탈출 성공이다! 생각보다 쉬운데?
주위를 살피며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복도를 달려 나갔다.
내 키가 작은 탓인지 사람들은 대체로 날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다.
어려서 키가 작은 게 이럴 땐 도움이 되는군.
자, 그러면 이제 어디로 간다?
내 생각에 아마 카일은 루비 궁에 위치한 정원에 있을 것 같았다.
원작 설정상 카일이 궁내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이고 또 이후에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나는 중요한 장소니까.
그런데 카일이 진짜 공부하고 있는 거면 못 만나는 거 아닐까?
에잇, 몰라. 일단 가 보자.
그렇게 루비 궁 소속 정원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익숙한 뒤통수를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황자 전하!”
작은 어깨가 움찔하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곧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날 발견한 카일이 휘둥그레 눈을 떴다.
“비비안?”
“전하! 안녕, 휴, 하세요!”
뛰어온 탓에 숨이 차 잠시 호흡을 골랐다.
카일은 내가 갑자기 등장한 것에 퍽 놀란 것처럼 보였다.
“비비안, 네가 왜 여기 있어?”
“전하께서 연락을 주지 않으시니 제가 왔죠.”
카일의 시선이 잠시 내 무릎에 닿았다 떨어졌다. 상처는 이미 모두 낫고 없어진 지 오래다.
애초에 큰 상처도 아니었다니까.
자, 봐. 나 하나도 안 다쳤다고.
나는 일부러 치마를 붙잡고 발랄하게 한 바퀴 빙글 돌아 주었다.
“짜잔. 어머니가 새로 사 준 드레스예요. 예쁘죠?”
“…응.”
“그렇죠? 자랑하고 싶었는데 전하께서 제 편지를 무시, 아니 답을 해 주지 않으시니까 제가 자랑할 방법이 없잖아요.”
싱긋 웃으며 새 드레스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으니 카일의 표정이 점차 누그러진다.
그래도 걱정을 하긴 했나 보지?
짜식, 기특하기는.
“그런데 여긴 어떻게 왔어? 난 오늘 네가 온다는 것도 몰랐는데.”
“헤헤. 궁에는 아버지를 따라왔어요. 여기는 몰래 들어왔지만요.”
“뭐? 그러다가 혼이라도 나면….”
“괜찮아요. 금방 나가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어디를 갔다 온 거냐고 추궁하면 화장실을 찾았다가 길을 잃었다고 하지 뭐.
황궁은 넓으니 충분히 납득 가능한 변명이다.
하지만 카일은 여전히 불안한 모양이었다. 흘끔대며 정원에 누가 오지는 않는지 확인한다.
“따라와.”
그러고는 나를 정원 안쪽으로 안내했다.
순순히 카일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정원의 구석에 위치한 일종의 사각지대였다.
내 키보다 더 큰 수풀을 헤치고 넘어가니 사람이 머무른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우와.”
감탄사를 내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좁은 공간이었지만 꽤 아기자기했다. 꼭 비밀 아지트 같은 장소였다.
잔디 위에는 얇은 시트가 깔려 있었는데 그 위에는 손때 묻은 목검과 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여긴 어디예요?”
“괜히 들켜서 혼나지 말고 여기에 있다가 가.”
카일은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툴툴거리며 자리를 권했다.
어쨌거나 카일이 당장 나를 내쫓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아 보였기 때문에 나는 수긍하며 자리에 앉았다.
애초에 오늘 여기 온 것도 카일을 만나려고 온 거고.
나를 이런 비밀스러운 곳까지 데리고 온 걸 보면 카일도 내심 내게 사과하고 싶었던 거겠지?
“흥흥.”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카일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왜 이상하게 웃어?”
“큼. 그런 적 없거든요. 그보다 전하, 오늘 바쁘신 것 아니었어요?”
“아니. 왜?”
“전하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는데 이미 일정이 꽉꽉 차 있어서 안 된다고 거절당해서요.”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수요일에는 오전 수업이 전부야.”
뭐야. 공부하느라 바빠서 안 된다며?
역시 내 방문을 거절하기 위한 변명이 맞았던 것 같다.
카일은 오늘 내가 황궁에 온다는 것도 몰랐다 했으니 위의 누군가가 먼저 차단한 모양인데.
쉬는 시간에도 놀면 안 된다는 주의인 건가?
황자 생활도 참 쉽지 않네.
“…왜 그렇게 봐?”
동정의 시선을 보냈더니 카일이 기가 막히게 눈치채고 물어 온다.